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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sa Zsa Zsu Apr 10. 2024

아빠의 모자

아끼지 말지 그랬어...

십 년 전 쯤, 아빠의 생일을 맞이해 백화점에서 큰 맘 먹고 50여만원 짜리 모자를 샀었다.

파킨슨을 오래 앓으셨던 아빠가 싸늘한 날씨에 휑한 머리로 점퍼 하나만 걸치고 대충 산책을 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쩐지 불안하기도 했고, 왠지 허접스런 모자를 사드리면 쓰지 않으실 것 같아 일부러 조금 무리해서 좋은 걸 사드렸었다.

그런데 분명 이것 저것 써보시고 당신 손으로 직접 고른 모자였음에도, 아빠는 단 한번도 그 모자를 쓰고 밖에 나가지 않으셨다. 왜 모자를 쓰지 않는지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아빠에게 나는 아빠의 생일 무렵인 매년 12월만 되면 다시는 좋은 선물 안 하겠다고 화를 냈었다. 그 때마다 내 시선을 피해 자리를 뜨던 아빠한테 내심 많이 서운했기도 했지만 그렇게 한 해 한 해 흘러 어느덧 내 기억속에서 그 모자는 자취를 감췄었다.






마지막 몇 주는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셨었다.

거리상으론 산본과 미리내성지 요양병원 사이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을 수도 있지만, 이직해 새 직장으로 출근하기 열흘 쯤 전이었던 나는 이런 저런 준비들을 하느라 심적으로 참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용인 부모님 댁에 들른 날은 꼭 아빠를 찾아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곤 했다. 초등학생 때 아빠랑 동네를 산책하며 두런두런 얘길 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대학생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무뚝뚝한 딸이 되어버린 나는 멀어진 아빠와의 마음의 거리만큼 면회를 가도 할 얘기 없이 어색하게 앉아있다 올 줄 알았는데, 어느덧 아빠의 손을 잡고 다정한 말을 하는게 어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자꾸 엄마한테 응석을 부리는 아빠를 보고 좀 화를 내기도 했다... -_-)


코시국 이후부터 면회 시간에 제한이 있다하여 30분 이상 아빠곁을 지키지 못하고 자리를 뜰 때마다 강인하고 고집 세던 분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가지말라고 칭얼거리시는 걸 달래며 자리를 뜨느라 혼났었다. 한 편으로는 혹시나 다음이 없을까봐 불안한 마음이었고, 야속하게도 그 불안감은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왠지 명절을 앞두고 한 번 다녀와야 할 것 같은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나와 엄마를 비롯해 밤 늦게 부산에서 올라온 아우 녀석과 조카까지 요양병원을 찾았다. 이런 저런 사는 얘기들을 들려주고 의외로 조금은 증세가 호전된 것 같아 보였던 아빠에게 병원을 나서기 전 인사를 했다.



아빠 면회시간 끝났대.
곧 또 올께.
숨 쉬기 넘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잘 버티고 있어요.
금방 또 올께.




금방 또 온다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렇게 작년 추석 하루 전, 아빠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추석 연휴 첫 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성길에 있어 빈소를 찾지 못할거라 생각하고 쓸쓸한 빈소에서 아빠가 외로워하실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정말 많은 분들이 찾아와 아빠의 가시는 길을 배웅해주셨다. 찔끔거리고 울다가도 정신없이 손님을 맞이하며 그렇게 3일 밤낮을 뜬 눈으로 지새고 장지에서 돌아오면서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와주신 가까운 지인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러 집 근처 식당으로 향하는 자리에 도저히 함께 할 힘이 나지 않아 나는 입맛도 없고, 너무 힘들고, 반납할 상복도 갈아입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 부모님댁으로 향했다.


아빠의 영정 사진을 잘 챙겨두고, 상복을 갈아입고, 집안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아빠 방에 시선이 멈췄다. 그러구 보니 명절때마다 부모님댁에 와서는 엄마방에 널브러져 있거나 거실에서 노닥거리느라 아빠 방에 들어가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문득 궁금해져 방 문을 열었다.


살아계실 때 아빠 방은 늘 어지러웠다.

요즘 세상에 신문을 6~7개씩 참 다양하게도 구독하셨던 아빠는 좋은 기사들이 있으면 정성스레 가위로 오려 책상에 몰래 올려두고 가시곤 했는데, 그게 살빼는 법, 건강 챙기는 법, 공부 잘 하는 법, 전국 수석 인터뷰, 물먹는 습관, 올바른 자세....등등의 내용들이었고 나는 아빠가 내게 하고 싶은 잔소리를 그렇게 대신하고 있다고 삐딱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괜한 반항 심리에 읽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종이쪼가리들을 던져 넣곤 했다. 아빠의 방엔 늘 누군가에게 줄 신문 기사들이 오려져 여기저기 흩어져있었고, 접두사 접미사, 조사만 한글이라 도저히 읽을수도 없는 아빠의 메모들이 한가득이어서 정작 우리 식구들은 보기만 해도 심란한 그 방에 들어가는 것 조차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날은 아빠의 방이 너무 가지런했다. 산책하다가 넘어져 심하게 다치신 뒤, 집 안에서만 지내시다가 건강이 급격히 안좋아지셔서 돌아가시기 전 한달 전쯤부터 세브란스 병원,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셨기 때문에, 입원할 짐들을 챙기고 엄마는 아빠의 방을 깨끗히 청소했었던 것 같다. 아빠의 메모와 오려진 신문기사들은 모두 가지런히 정돈되어 서랍에 넣어져 있었고, 늘 어지럽게 벗어져있던 아빠의 스웨터나 겉옷들은 (아빠는 따뜻한 집에서도 늘 패딩이나 스웨터, 가디건 등을 입고 계셨다) 모두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침대의 이불들도 모두 개어져 놓여있었고, 입원 직전 자꾸만 침을 흘리셔서 항상 곁에 두곤 했던 수건은 자취를 감췄다. 나는 한참을 그 어색한 공기속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 방엔...아빠가 없었다.


주인 잃어 어색한 아빠의 방에 적응이 되지 않아 머뭇거리며 둘러보다가 젤 안쪽 장롱 문을 무심코 열었다.

그리고...젤 잘 보이는 곳에 내가 선물했던 그 모자가 놓여있었다. 정말이지 한 번도 쓰지 않아 사용감이라곤 1도 없는 상태였다. 입관식 이후로 꾹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참을 펑펑 울면서 생각했다. 이깟게 뭐라고 이렇게 아껴두었담. 얼마든지 더 사드릴 수 있었는데, 왜 십여년을 모셔만 두고 있었담. 나는 늘 좋은 것만 입고 쓰고 먹고 아끼지 않고 했는데, 아빠는 이깟 모자 하나가 왜 그리 아까웠던 걸까. 원망스럽고 속상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아빠가 요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장롱안에 있던 그 모자 가져다 드렸음 좋았을텐데.

아니, 돌아가셨을 때라도 화장터에 그 모자 들고 갈껄.

가실때라도 멋있게 모자 쓰고 가셨음 좋았을텐데.


한참을 울다가 그 모자를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며칠을 못 감아 떡진 내 머리에 아빠의 모자를 꾹 눌러 쓰고는 택시를 불렀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거짓말같이 인순이의 아버지가 흘러나왔다.

햇살은 너무 쨍하고 하늘은 높았는데, 난 내가 너무 좋아하는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멍해져 있다가 기사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를 오늘 보내드리고 오는 길이에요..."

"아이고 저런..."


아저씨는 내 마음을 알고 계셨던 건가.

노래를 좀 더 크게 틀어주셨고 그렇게 울렁울렁 집으로 돌아왔다.





도착 하자마자 소파에 쓰러져 잠들었다가 새벽녘에 잠시 눈이 떠졌는데, 희미한 등만 켜두고 암막 커튼을 친 창문 맞은편으로 성인 어른 크기만한 그림자가 스윽 지나갔다. 꿈인가 싶었지만, 왠지 아빠가 마지막 인사를 하러 우리집에 다녀가신걸까 하는 생각도 들어 참았던 눈물을 한참 쏟아냈다. 지금도 너무 생생한 그 그림자가 가끔 떠오른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새 직장에 출근했다.

누구보다 밝고 열심이고 극성스러운 나 답게, 또 새 생활을 시작했고 이내 적응해 나갔다.


그 날 이후로 아빠 집에서 이사온 그 모자는 내 집 장롱에 자리를 잡았다.

가끔 아빠가 보고싶을 때 모자를 꺼내보곤 하는데, 그 때마다 새삼 고마워진다.

살아계실 땐 그렇게 속상하기만 했던 모자였는데, 이젠 너무 소중한 날의 아빠 모습을 떠오르게 해준다.


아빠. 잘 지내지?
혼자 너무 외롭진 않지?
우리 모두 잘 지내요.
늘 지켜주셔서 고마웠어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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