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채 수많은 네 동포와 똑같은 이름으로 무심하게 불러왔어. 심지어 타인과의 대화에서 너를 지칭하는 용도로 흔해 빠진 그 이름을 입에 담아봤을 뿐, 널 바라보며 다정하게 한번 부르지 못했다. 우리는 각자 비슷한 점이 있다는 거 아니? 본디 작은 씨앗이었던 너는 스스로 화초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지. 너의 뜻과 상관없이 넌 관상용으로 답답한 집 안에서 생을 시작한 거야. 나 역시 너를 스스로 내 화초라 선택하지 않았어. 시골로 이사 간 우리 엄마가 내게 너를 일방적으로 맡겨 버렸어. 나 스스로 널 선택하지 않았단 말이야. 우린 그저 그렇게 만난 관계란다. 하지만 이런 만남은 세상에 수없이 많지.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아. 이제 나는 너만의 이름으로 너를 부르려고 해. 금이야 옥이야 너를 신경 쓰기로 결심했거든. 그래서 너의 이름은 이제 금옥이란다.
내가 금옥이를 맡게 됐을 때 넌 참 기운이 없었어. 내 엄마는 널 무지 아꼈지. 난 사실 화초 가꾸는데 그다지 관심 없었는데 그때부터 널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이 꽤 길어졌어. 기운이 없던 너를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거든. 넌 그동안 참 행복했을 텐데, 나와 만나서 생의 불행의 단계로 접어들었단 기분이 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제야 엄마에게 전화 걸었어. “엄마, 금옥이, 아니 관엽죽 이거 물 며칠마다 줘야 해?” “일주일 한번! 1리터 생수병 하나로 듬뿍!” 밥 먹는 시간을 알았으니 너의 축 처진 무성한 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했지. 굵고 튼튼한 가지만 남기고 싹 미용을 했어.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난 것들끼리 끈으로 단단히 고정도 했어. 그때쯤 금옥이 너도 내가 조금은 좋아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정말 다행이야.
그 후 너는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새 잎사귀들이 똬리를 틀고 쏙쏙 나오기 시작했어. 네 새잎은 정말 귀엽더구나. 돌돌 말아서 잎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하루 중 남편이 출근하고 아들이 학교 가고 난 후의 시간은 내게 비밀 같은 시간이란다. 홀로 집에 남아 머리 하나 질끈 묶고 특별히 밖에 나가지 않을 경우는 세수조차 하지 않아. 나는 이리 늘어져 있는 내 모습에 해방감을 느껴. 세상 편하게 소파에 누워 남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경박한 가십들이 넘쳐나는 유튜브 채널을 보면서 낄낄거리기도 해. 그 시간 나의 가장 후진 모습을 묵묵히 어쩔 수 없이 참아내고 관찰해 온 금옥이 너를 참 칭찬한다. 그렇게 너도 나와 함께 즐기고 있는 거였으면 좋겠어.
내가 좋아하는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 중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를 보면 금옥이 같은 화초들이 많이 등장해. 책 속 화초들은 저마다 몰래 자신만의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보고 있지. 너도 그런 표정을 가지고 있니? ‘우리 아줌마, 또 누워있구나’. ‘우리 아줌마, 또 안 씻고 그냥 자는군.’ 이러고 있는 거니? 너에게 물을 주고 바람을 맞게 해 주고 잎에 먼지를 닦아주는 것만으로도 네 숨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아. 더운 여름날 햇볕이 뜨거워서 블라인드를 내릴까 하다가도 해를 좋아하는 네가 눈에 밟혀 그대로 두기도 한단다. 금옥이 너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요즘 이리 무성하게 새 잎사귀들을 뿜뿜 만들어내고 있잖아. 보는 내내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 봄이 오면 영양 듬뿍 담긴 짙은 갈색 흙 이불을 새로 덮어줄게. 그러니 금옥아, 시들지만 말아.
혹여 내가 너를 요즘 너무 귀찮게 하고 있단 생각이 드니? 네가 말할 수 있다면 표정 하나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신나겠다. 전소영 작가는 그림책 <적당한 거리>에서 유난히 화초를 잘 키우는 사람들의 이야기하고 있어. 적당한 햇빛, 적당한 물, 적당한 흙, 적당한 바람 결국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말이야. 내가 너에 대해 알아가는 데에 시간이 걸린 만큼 ‘넌 금옥이구나!’ 하고 인정하게 된 후의 우리 사이의 적당한 거리는 지금까지 잘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해. 분주하게 알아가는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서로에게 편안한 거리가 만들어지나 봐. 금옥이 너를 가꾸면서 깨달았어. 사람과의 관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야.
항상 그 자리에서 푸른빛을 간직해 줘서 고마워. 약간 목이 마르면 바로 잎사귀 색으로 말해 줘서 고마워. 너에게 이름을 만들어주고 관심을 가지게 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계속 살아. 더 이상 널 외롭게 만들지 않을게.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는 그런 우리가 되어보자. 나의 화초, 금옥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