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남짓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본다. 그것은 분명 뽑자마자 뚝뚝 잘려나간 가래떡과 비슷하다. 본디 뜨끈하고 유연한 한 줄기로 만들어졌지만, 한번 썰리면 금세 딱딱해지는 가래떡 말이다. 대학, 일, 결혼이라는 그릇에 따로 담겨 본래의 모습은 잊은 채 소화되었다. 언제나 역부족이었다. 깨끗하고 말랑한 '나'를 기억하며 되새기기도 전에 급히 썰려버렸다. 인생은 상황과 인물에 휩쓸리는 시간의 연속이다. 분명 내 인생인데 '나'를 잊지 않고 살기란 쉽지 않았다. 천천히 되짚어 본다. 작게나마 '나'란 존재가 드러난 순간을 말이다. 언제부터 내 이름 석 자를 새기기 시작했는지.
처음이었다. 나의 말이 커다란 액자에 걸린 그때.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끄적였던 시 한 편이 학교 복도에 걸렸다. 당시 나는 말수 적고 매사 시큰둥한 아이였다.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힘들어했던 나는 '그 시가 내 시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신나게 떠들었겠다만 그만큼 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이 아주 작게 보이는 아이였다. 자랑할 줄 모르는 나였다. 그저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혼자 뿌듯해하며 슬며시 웃을 뿐이었다. 정작 시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그림 위에 내 시가 적힌 커다란 초록색 액자만이 떠오른다.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았지만 나를 담은 첫 번째 액자였다.
모교에서 나름 인정받으며 석사를 마친 나는 다른 학교로 학업을 옮겨야 했다. 모교에는 박사과정이 없었다. 그렇게 익숙한 울타리를 벗어났다. 박사과정은 석사와는 달랐다. 학교이면서 동시에 사회였다. 다양한 인맥들이 얼기설기 엉킨 복잡 미묘한 공간이었다. 서로에게 친절했지만 그만큼 보이지 않는 경계도 심했다. 인원도 무척 많았기에 어떻게든 자신을 빨리 드러내는 사람이 교수님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살짝 비껴가는 말을 하자면, 영화 여고괴담에서 배우 최강희가 분했던 '진주'의 이런 대사가 있다. "아마 내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을 거야. 그냥 교실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머릿수를 맞춰주면 됐으니까." 물론 난 귀신도 아니고 원한도 없지만! 조금의 과장을 덧붙이자면 진주 같은 박사생이었다. 여전히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살갑게 먼저 다가서는 것도 엉성했다.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그 무렵, 박사생들은 수료를 마무리하는 시험이 끝나면 관례로 교수님들께 작은 선물과 함께 손 편지를 준비했다. 그 편지가 발단이었다. 아무도 선뜻 감사의 글을 쓰려하지 않았다. 살짝 뒤로 물러나 있었던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내가 쓰겠다고 하고 편지지를 가져왔다. 다 쓴 편지를 동기 대표에게 건넨 후 처음으로 '오~'하는 감탄을 들었다. "승아 선생님, 글 잘 쓰는데? 필력 있네! 선생님들, 이것 좀 봐." 박사과정 중 처음 받아본 관심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발표와 연구를 해왔는데 은사님들께 드리는 감사 편지 한 장으로 주목을 받은 것이다. 역시나 편지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네모반듯한 편지의 그림만 떠오른다. 나의 두 번째 액자, 생각지도 못했던 감사편지였다.
살다 보니 어느새 사십 대가 되었다. 눈 감았다 떠보니 작은 아이가 품에 안겨 있다. 무럭무럭 자란 아이는 엄마만 바라보는 나이를 지나가고 있다. 나는 육아의 틈에서 점점 여유가 생겼다. 아이를 낳은 후 처음으로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 결국 책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육아하며 만난 그림책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지그시 감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가까이 두고 오래 보고 싶은 명화 같은, 어제와 오늘의 메시지가 다르게 보이는 매력이 그림책 안에 있었다. 그림책 애호가가 된 나는 잊고 있던 글을 다시 쓰리라 마음먹는다. 쓰다 보니 직접 말로 소개하고 되었고, 호응이 있었고, 재미도 느꼈다. 어느새 본의 아니게 그림책 전문가란 말도 듣게 된다. 대학 강사 시절 내가 얼마나 가르치는 것을 싫어했는지 가까이서 지켜봤던 후배가 지나가는 말을 했다. "그렇게 싫어하더니 그래도 다 쓸 데가 있었던 거야, 언니." 그래. 그 말이 맞다. 언제나 시작은 그 끝을 알지 못한 채 굴러간다. 삶의 순간마다 오롯이 나라는 사람을 담을 수 있었던 네모반듯한 액자가 있다. 고등학교 복도 끝에 걸린 시화, 교수님께 드렸던 감사편지 그리고 그림책이다.
그림책 <키오스크>의 표지를 살펴보자.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에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가판대가 보인다. 온갖 것들을 판매하는 가판대 키오스크는 주인공 올가의 일터이며 동시에 편안한 보금자리다. 올가는 키오스크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장사가 끝나면 그대로 키오스크 안에서 양치질을 하고 언제나 꿈에 그리는 바닷가 사진을 바라보며 잠이 든다. 사실 바다가 가고 싶다면 키오스크 밖으로 나오면 된다. 하지만 올가는 그러지 못한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일까. 키오스크를 벗어날 용기가 없는 걸까. 딱히 키오스크를 답답해하지도 않는 올가의 모습을 보며 과연 그녀에게 그 좁은 키오스크가 어떤 의미일지 계속 질문하게 만든다.
아네테 멜레세 글/그림, 김서정 옮김. 미래아이.
어느 날 올가는 우연히 키오스크가 손쉽게 땅에서 들린다는 것을 발견한다. 키오스크는 올가를 옭아매고 있던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든 나갈 수도 움직일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키오스크는 답답한 장애물이 아닌 올가의 안전장치로 보인다. 올가는 그대로 키오스크를 몸에 지닌 채 산책을 한다. 그리고 또다시 우연히 강물에 그대로 퐁당 빠진다. 물에 빠진 올가는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마치 한 몸과 같았던 키오스크는 그대로 올가를 강물에 둥둥 뜨게 만드는 구명정 역할을 하고 올가는 그 손길을 마다하지 않은 채 그대로 흘러간다. 그녀의 표정은 무척 행복하다.
'내가 오늘은 꼭 바다에 가고 말겠어!' 이런 올가의 다짐은 없었지만 결국 올가는 바다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여유롭고 행복한 표정으로 핑크 키오스크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며 바다를 바라본다. 인생의 시나리오는 다양하다. 매사 치열하지 않은 올가일지라도 꿈을 꾸지 못할 건 없다. 우연의 우연을 거듭해 바다에 도착했지만 올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언젠간 이곳을 벗어나 바다로 갈 거란 바람을 간직했기 때문이겠지.
누구나 매사 꿈을 좇는 삶을 살지 못한다. 고등학교 때 내 안의 문학소녀는 근 십 년 동안 까맣게 잊혔다. 다시 글에 대해 생각하며 꿈을 되찾는 시간은 지루하고 미련해 보이기까지 하다. 느려도 너무 느리다. 아무렴 어떤가. 달팽이집처럼 돌아 돌아 크게 벗어나지 않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누군가 올가에게 말했을 수도 있다. "제발 당장 그 낡은 키오스크에서 나와!"라고. 하지만 올가는 마음의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올가는 그 안에서 생계를 꾸렸고, 숨을 쉬며 잠을 청했으며, 무엇보다 꿈을 키웠다. 올가의 키오스크는 나의 액자와 다르지 않다. 키오스크를 버리지 않은 채 계속 살아가는 올가에게서 나는 오히려 낭만을 느꼈다.
나의 액자는 편안하다. 나는 그 안의 활자로 안전함을 느낀다. 액자 안이라면 나를 모르는 사람들 앞이라도 무서울 것이 없을 것이다. 결국 마흔 넘어 정착한 나의 세 번째 액자, 그림책 안에서 지치지 않을 꿈을 꾼다. 깨끗하고 말랑한 나를 위해! 네모 반듯한 그 안에서 다음 꿈을 키울 수 있는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