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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숲 with IntoBlossom Aug 11. 2023

미련이 남았습니다

2000자 소설 #1

“그냥 지금처럼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될까?

꽤나 의미 있단 말이지. 나한테...”


말꼬리 늘어뜨리는 꼬락서니는 여전하다. 매사 흐리멍덩한 맺음에 스리슬쩍 대강의 논리로 넘어가려는 저 성격. 너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더 이상 그 표정 보기 싫어 일단 후퇴를 결심하려던 그때, 녀석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의뭉스러운 표정을 보인다.


“정 그렇게 가져가겠다면

내가 그동안 보살폈으니 성의는 좀 보여주는 게 어때?

그럼 생각해 볼게.” 치사한 놈 그럴 줄 알았다.


“네가 무슨 돈이 필요해?

따박따박 들어오는 공무원 월급 충분하잖아?”


“여전히 너란 여잔 날 몰라. 나도 꿈이 있단 말이지.

작가가 될 거야.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단한 이야기를 그냥 썩힐 순 없지. 그러니 노트북이 필요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좀 도와줘. 아니지! 내가 돌봤잖아! 그 정도 수고비는 진짜 인간적인 수준이라고.”


평소 표정이 없는 난 눈코입을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대꾸하기 싫었고, 그저 경멸의 눈빛을 던지며 말없이 돌아섰다. ‘노트북이라고? 노트북이라니. 넌 그냥 노트 한 권이 딱인데.’ 이제 와서 작가가 되겠다고?


치열하지 않은 녀석에게서 낭만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함께 있으면 숨통이 터지고 나에게 없는 여유가 좋았다. 종종 외투 주머니에 넣어주던 쪽지에는 피식 웃을 수 있는 짤막한 메모가 남겨 있었지. 행복하다고 인정하려는 순간, 녀석의 잘 구성된 연극 안, 난 그저 한 명의 배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나 이전에 누군가 있었고, 나와 헤어진 후에 누군가로 채워질 것이다. 그것이 녀석이 만들어 가는 낭만의 무대이다.


절대 묻지 않기로 결심했었는데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는데 결국 스스로 묻고 또 묻게 된다. ‘날 사랑했을까?’ 누가 들을까 겁이 나 내 머릿속에서조차 맴돌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게 물었다. ‘날 사랑했을까?’


이제 와 무슨 소용이냐고? 아마도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잊게 되는 그때가 올 때까지 계속 질문할 것이다. 아니지, 죽을 때까지 문득문득 궁금해지겠지. 사랑의 흔적은 똑 떨어지는 딱지가 아닌 영원히 남아 있는 흉터이다.


그래도 찾아와야 한다. 그 집에서 나온 후로 녀석은 번호키를 바꿔버렸다. 정황이 없었다. 좀 더 이성적으로 행동했어야 했다. 왜 챙기지 못했을까. 열쇠집 아저씨를 부를까 생각도 해봤지만, 도둑처럼 완력을 쓰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대화로 풀자. 그래도 5년간 함께 살 부대끼며 살았었는데 이 정도 대화는 통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노트북이라고? 이럴 순 없다. 노트북값만큼의 인질인 것인가. 고작 노트북값. 함께 떠올렸고 같이 선택했으며 한 집에서 숨을 쉬었다. 잊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냥 잊어. 가져와서 뭐 하게?

괜히 예전 사귈 때 생각이나 나지.

혹시 너 아직 미련 있는 거야?

진짜 데리고 오면 힘들지 않겠어? 둘 다 이상해 진짜.”

녀석과 나의 시간을 옆에서 쭉 지켜본 친구는 혀를 찬다


‘그래, 맞아. 생각나겠지. 안 날 수가 없겠지.’


현관문을 억지로 확 따버리기 직전 일단 나는 염탐하기로 한다. 저녁 7시, 녀석은 언제나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한다. 오늘도 어김없다. 그새 살이 포동포동 올랐다. 아장거리며 걷던 발걸음에 어느새 우다다다 속도가 붙었다. 이제 다 컸다 싶다. 설마 날 잊진 않았겠지.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던 내 발길은 어느새 내 체취를 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져 버렸다. 고개를 바짝 들고 눈을 마주쳤다. 나를 향해 꼬리 짓하며 달려온다. 웃고 있다. 분명 반가움의 표정이다. 내 새끼, 너무 예쁜 내 강아지. 살랑살랑 멈출 줄 모르는 강아지의 꼬리 뒤, 녀석의 촌스러운 농구화가 보인다.


“왔으면 전화하지 왜 이러고 있어? 살 꽤 올랐지?

매달 심장사상충 약도 먹였어.

그래야 산책할 수 있다고 네가 맨날 말했잖아.

온 김에 산책 한번 시켜볼래?”


실로 선택의 기로이다. 당장이라도 안아 올려 보송한 가슴털에 뽀뽀하고 싶다. 함께 속도 맞추어 걷고 싶다. 하지만 녀석과 나에게 그럴 틈이 있을까. 틈이 생기면 골치 아파질 것을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갈팡질팡 생각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 순간조차 우린 걷고 있다. 신나 좋아 헥헥거리는 귀여운 강아지와 함께.


아직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우리 강아지. 아니 내 강아지. 우리 강아지일까? 아직 미련 안에 남아 있기에 이름 하나 불러주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고, 녀석은 알량한 노트북값을 빌어 연락하고 있는 걸까. 눈치 없이 저녁노을은 하염없이 아름답다. 걷고 또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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