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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숲 with IntoBlossom Sep 14. 2023

한때 그렇게 스쳐갔던

<별숲 에세이> 첫사랑...

 대학생 시절 나는 인류 역사상 세 번째 밀레니엄을 맞이했다. 밀레니엄버그 같이 세기말 감성이 듬뿍 담긴 이슈로 세상은 시끄러웠지만 난 그저 연애하느라 바빴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어설펐지만 마냥 좋았으니 사랑이었다 말해도 무방할 듯하다. 순진하기 짝이 없었던 스무 살의 겨울, 그 사람은 세 살 연상의 동호회 오빠였다. 한창 PC통신이 활개를 치며 우후죽순 여러 동호회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먼저 친해지고 나중에 만나는 이 독특한 사회관계에 빠져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바보같이 푹 빠졌다. 상대는 군대를 갓 전역한 뭐든 다 알고 있는 듯한 멋짐을 가진 연상의 남자였고, 우린 파란 PC통신 화면에서 ‘방가방가’를 먼저 외치면서 친해졌고, 난 그것을 연애라 느꼈다. 지금 스스로 뒤집어보면 능구렁이 같은 예비역 병장이 이제 막 입학한 새내기 여자애를 꼬드긴 형상인데 이마저도 그에게나 나에게나 낭만이었다고 한다면 낭만이었으리라.


 우린 꽤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동호회 사람들은 부러워했고, 여대인 우리 학교에 자주 놀러 왔던 그 사람 덕분에 난 과 친구들 사이에서 뭔가 진상스러운 이미지를 장착하기도 했다.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다’라는 것이 그 시절 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처음 하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함께 했다. 압구정동 테이크어반 카페도 가보고, 재즈바 블루문도 가보고, 콘서트도 갔다. 운전면허학원도 함께 가서 지도(?) 받으며 단박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부정할 수 없는 20대의 처음을 그와 함께했다.


  지금과 다르게 꽤 순하고 수용적이었던 성격인지라 그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았다. 타임머신이 생긴다면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그 당시 나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싶다. 적당히 하고 정신 차리라고. 이미 지난 일에 대한 부질없는 읍소지만, 좋았던 만큼 끝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 서늘히 느껴질 것이다. 애증의 아이러브스쿨. 그는 하이텔에서 나를 만나고 아이러브스쿨에서 첫사랑을 만나 갈아탔다. 마무리가 좋지 않았다. 말끔하게 헤어지자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잠시 시간을 두자’라는 세상 애매한 표현으로 거리를 두면서 난 미련하게 기다렸고 그는 혼자만 헤어졌다. 난 그렇게 그것이 헤어짐이었다는 것도 모른 채 헤어졌다. 그만큼 씁쓸한 것도 없다. 시작이 좋았던 것처럼 배려 있는 끝도 있었다면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첫사랑의 추억이었을 텐데, 나에게 첫사랑은 추억이 아닌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첫사랑과 결혼했다.


 몇 년 후, 대학원 생활을 하며 흑화 에너지로 가득 충전돼 있어 한창 까칠했던 나는 강남역 거리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다. 저만치서 걸어오는 특유의 걸음걸이 가 너무나 익숙한 한 남자가 다가오는데 아마 그도 나를 그리 느꼈나 보다. 반가운 얼굴로 “오랜만~”이라고 말하려는 그의 입꼬리를 확인한 순간 화가 치밀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멸스러운 눈초리를 발사하며 그를 그냥 스쳐 지나갔다. 한마디로 개무시한 것이다. 다행히 쫓아오진 않더라.


 그날 밤 친구와 수다를 떨며 슬쩍 강남에서 그를 만나 째려보고 무시했다고 하니까 친구는 아직 그 사람을 못 잊었냐고 했다. 친구 말대로 나의 잊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이 미움이 되어 그를 무시한 걸까. 아니다. 관계를 끝맺음에 있어 비겁하게 도망가버린 그 사람의 미성숙함에 화가 났을 뿐이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나를 두고 첫사랑한테 가버렸다는 사실이 망가진 자존심이 되어 웅크리고 있었고 말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워 함묵했다. 헤어짐에 있어 나의 자존심을 먼저 챙기고 속상해했던 나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도 나는 그보다도 스스로 설렜던 스무 살의 사랑을 더 사랑했었나 보다.


 첫사랑과 평생 함께하는 사람은 사랑값에 대한 효율이 높다. 포장을 벗겼을 때 가장 향이 진한 향수처럼 첫사랑의 열정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다. 그 열정을 그대로 녹여 평생의 반려로 맞이하는 건 멋진 일이다. 비록 난 그러지 못했지만, 그는 성공했으니 축하해줘야 하나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우연히 동호회 지인의 인스타를 보니 본인 주먹코를 똑 닮은 복스러운 딸내미를 낳고 아주 잘살고 있더라. 이거면 됐다 싶었다.

 오랜만에 회상했다. 전혀 나 같지 않았던 하지만 분명히 나였던 스무 살의 나를. 한때 나의 전부였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오빠, 당신의 사랑값을 지킨 걸 축하해. 그리고 당신 주민등록번호 있지? 난 그 뒷자리까지 아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오. 내가 내 가족 이외에 유일하게 기억하는 주민등록번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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