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읽기 AZ 13
관능과 순결 사이에서 눈치 보며 두리번거리는 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최소한 짐승으로서나마 완전하다면 좋으련만! 짐승에게는 그래도 순진무구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욕정에 가득 찬 눈을 하고서도 학습된 죄책감으로 몸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차라리 짐승의 순진무구함을 배우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에로티즘을 부정하고서는 생명을 긍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들 그 밖의 많은 사람들도 나름대로 절제라는 것을 한다. 그렇기는 하나 저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에서 관능이라는 암캐가 시샘의 눈을 번득이고 있다.”
관능에서 멀리 떨어진다고 순결해지는 것이 아니다. 관능적 욕망의 길이 막히면 외려 시샘으로 터져 나오는데, 그것이야 말로 순결을 더럽히는 일이다. 관능의 순진무구, 몸의 발정과 절정은 순결과 다른 것이 아니다.
“나 다만 너희에게 관능의 순진무구에 이르도록 권하고 있거늘.”
관능을 편견 없이 긍정할 때 순결이라는 관념 자체는 지워지고 우리는 몸에 정직한 삶을 살게 된다.
“깨달음에 이른 자가 진리의 물속으로 뛰어들기를 꺼리는 것은 그 물이 더러울 때가 아니라 얕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