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읽기 AZ 15
“가상히 여길 만한 것, 그것은 저마다의 민족에게 힘겨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없어서 안될 것과 힘겨운 것을 저마다의 민족은 선이라 부르며, 더없는 곤경에서 해방시켜주는 것, 진기하고 더없이 힘겨운 것을 신성한 것으로 기린다.”
“진정,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게 일체의 선과 악을 부여해 왔다. 진정, 그것들은 저들이 받아들인 것도, 찾아낸 것도 아니며, 천상의 음성으로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다.”
민족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공통의 고난을 마주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을 선으로, 반대로 그것을 더 심화시키는 것을 악으로 평가하는 습관을 공유하게 된다. 함께 곤경을 극복한 경험은 그러한 습관을 강화한다. 한편 다른 시련을 겪은 다른 민족의 사람들은 다른 가치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기에 ‘일체의 선과 악’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부여된 것이 아니다.
니체는 사람이 절대적 가치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가치 평가하는 존재’라고 강조한다.
“사람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에 가치를 부여해 왔다. 먼저 사물들에 그 의미를, 일종의 인간적 의미를 창조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자신을 ‘사람’, 그러니까 ‘평가하는 존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평가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다.”
“평가라는 것을 통하여 비로소 가치가 존재하게 된다.”
가치를 평가하는 행위는 하나의 창조 행위다. 왜냐하면 가치란 평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평가의 결과물이자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가치의 변천, 그것은 곧 창조하는 자들의 변천이기도 하다. 창조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자는 끊임없이 파괴를 하게 마련이니.”
기존 가치 체계의 파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새롭게 평가하고 가치를 전도하는 창조적 행위다. 물론 이것은 자기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가치 체계를 절대자로부터 부여받은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다른 가치 체계를 몰살하려 하는 폭력적 파괴와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천 개나 되는 목표가 있었다. 천 개나 되는 민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천 개의 목에 채울 쇠사슬이 없을 뿐이다. 단일한 목표가 없는 것이다. 인류가 아직 목표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니체는 수많은 가치 추구들을 바라보는 상위에서 그것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목표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일, 위버멘쉬로 사는 일이다. 하나의 목표라 하여 획일화된 전체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지향하는 위버멘쉬의 세상은 모든 사람이 창조자이자 평가자로서, 서로의 벗으로서 가치를 경쟁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