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와 수학이 있는 주방

리가토니 볼로네제

by TwoHearted
그는 25% 이탈리안이라고 했다.

그에게 고마운 것이 한 가지 있다. 괜한 신경전을 벌이고서 어색하고 답답한 기운이 내려앉아 있는 날에도 그는 혼자서 휙 어디론가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쯤 서로에게 별다른 말 없이 뚱하게 지내는 동안에도, 그는 혼자서 밥을 챙겨 먹지 않는다.


반대로 나는 보란 듯이 내 방에 하루 종일 문을 닫아놓고 숨어 있기도 하고, 차를 타고 근처 카페나 공원에 가기도 한다. 하다못해 동네 산책이라도 나가서 한두 시간씩 마음을 가다듬곤 한다.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혼자서 라면도 끓여 먹고, 일부러 김치전을 구워내 온 집안에 기름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그런 혼자의 시간이 필요함을 존중하면서도 그는, 끼니를 챙기는 것은 "같이" 해야 할 일이라 굳게 믿는 것 같았다. "배고픈데, 피자 주문하면 같이 먹을래?" 하고 메시지를 보내거나, 내 방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와, "파스타 소스 만들고 있어. 몇 시쯤이면 배고파질 것 같아?" 하고 조심스레 말문을 트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화해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기분을 살핀다. 주방에서 퍼져 올라오는 구수한 토마토소스 냄새에 이미 마음이 누그러져서 내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면, 그는 휴- 하고 안도하는 표정과 함께 더욱 힘이 실린 목소리로 "당신의 조언이 필요해." 내 손을 잡고 주방에 데려간다. 그렇게 나를 주방에 세워 놓고, 그는 파스타 삶기의 알덴테 Al dente 정도를, 마늘빵이 구워지는 갈색 빛깔의 농도를, 소스에 이탈리안 소시지를 넣은 게 좋은지 초리조를 넣은 게 좋은지를, 질문하고 확인한다.



그의 친가 쪽 할아버지가 이탈리안이라서, 그의 몸에는 25%의 이탈리아 피가 흐른다고, 몹시도 뿌듯하게 말했던 적이 있다. 그 말을 하던 당시, 그는 아직 이태리 피렌체나 로마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니가 이태리를 알아?" 싶기도 했지만, 그가 묵직한 토마토소스를 정성 들여 저어 내고 파스타를 삶는 날이면 마치 이태리 시골 마을의 단골들만 아는 숨겨진 맛집에 찾아가는 기분으로 설레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그의 이탈리안 혈통에 가산점을 주고 있는 것도 같다. 아무튼 그가 만들어 주는 파스타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무조건 맛있음 예약이다. "오늘은 파스타 어때?"라는 제안에는 무조건 "오예~"라고 외치고 본다.



파스타 한 팩은 8인분

소스를 준비하고 면을 삶을 때면 우리는 심각해진다. "얼마나 삶아야 하지?"


파스타 상자에는 대부분 8인분 (8 servings)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그 내용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게 8명 분이라고? 에이 설마. 싶은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그토록 수많은 날들에 파스타 삶기를 했어도 매번 고민스러운 순간이다.


파스타 상자에 적힌 대로 얼추 1인분 분량을 가늠하고 나면, "어쩌면 그들이 말하는 1인분은 유아용일지도 몰라."라는 가설에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우리는 성인이니 두 배 정도는 먹어 줘야지" 하고. 평소에 딱 적절한 성인용 1인분 이상의 음식을 절대 먹지 않는 그가 그렇다고 하니 나는 또 팔랑귀처럼 그런가 보다 싶어 진다.


그가 파스타 한 팩을 뜯어서 얼마만큼을 삶고 얼마만큼을 남겨두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을 때면, 나는 파스타 봉지를 테이블 위에다 차르르 털어놓는다.


리가토니 Rigatoni 총 224개.


상자에 적힌 대로 8등분을 해 본다. 그러면 "역시. 이건 어린이용 1인분인 거야." 싶을 만큼 그 양이 초라해 보인다. 우리는 딱 절반, 112개의 리가토니 파스타를 삶고, 나머지 112개는 다음번을 위해 보관해두기로 했다.


파스타의 1인분. 224 나누기 8.



수학적 사고의 다양성

224개의 리가토니 개수를 세고, 반으로 나누는 방법이, 사람마다 어떻게 다른지 목격하는 것은 일종의 지적 희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부터 224까지 번호를 매기면서 수를 세고, 나는 다섯 개 혹은 열 개씩 묶어서 줄을 세운 뒤에 전체 개수를 계산한다. 그는 224개의 절반이 112개이니까, 20개씩 놓인 5줄을 선택하고 12개를 더 보탠다. 나는 20개씩 놓인 총 11줄의 양쪽 끝에서부터 5줄씩 떼어 놓고 한가운데 줄을 10개씩 반으로 갈라 보탠 뒤, 따로 놓여 있는 나머지 4개를 2개씩 양 쪽에 보태준다.


그는 일찍이 "세상과 우주의 질서를 집약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학의 언어에 매료되었고, 우주 신비의 기저에 수학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 여가 시간을 위한 교양서적으로 "수학의 역사"와 같은 책들을 즐기는 부류의 사람이다. 모닝커피를 마시며 잠을 깨우는 용도로 온갖 종류의 퍼즐을 패키지로 구독하면서, 퍼즐 중에 수열 문제가 나오면 괜히 나에게 던져 주고 내가 얼마나 빨리 답을 얻는지 시간을 확인하곤 한다. 아주 간단한 수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매 번 그와 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답을 얻게 되는데, 답을 맞히는 그 자체보다 "너는 어떻게 풀었어?" 하고 서로의 방법을 설명하고 설명 듣는 그 시간에 더욱 엔도르핀이 도는 두 사람이다. 그럴 때마다, 답을 찾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도 "괜찮다"라는 것을 학창 시절부터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곤 한다. 수학 문제 정답지에 "여러 가지 접근 방식 가능함. 대표적인 예는 xx임."이라고 적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숫자와 논리에 민감한 서로를 때때로 놀리면서 때때로 공감하면서, 우리는 파스타를 삶는 저녁의 주방에서도 종종 수학을 얘기한다. 이런 괴상한 너드 nerd 같은 면을 인정하고 같이 깔깔대고 웃어 주어 고맙다고 서로에게 인사한다.


친구가 놀러온 날, 바게트를 3등분해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너의 파스타는 나의 집밥

우리네 집밥 혹은 소울푸드 비슷한 의미로 미국인들은 "comfort food"라는 말을 자주 쓴다. 우리말처럼 "homey"라고도 표현하지만, 그네들이 comfort food라고 말할 때마다 내 엄마의 짜글한 김치찌개가 떠올라서 개인적으로 내가 더 자주 쓰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튼, 한국에서 집밥을 생각하면 우리 엄마의 맛깔난 된장찌개, 고등어 시래기, 굴밥 같은 젓갈 냄새 진득한, 참기름 향 고소한 메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지만, 지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미국에서의 집밥 comfort food는, 단연코 그가 만들어 주는 토마토소스 뭉근한 파스타 한 접시이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 날에도, 돌아온 날에도, 그에게 꼭 부탁하는 것은 "당신의 파스타 한 그릇이면 기운이 솟아날 것 같아요."이다. 머리 맞대고 깔깔대며 파스타 개수를 세는 모습과, "니 입맛에 딱 맞게 알 덴테가 되면 알려 줘."라는 맞춤형 셰프의 듬직함과, "파스타에 곁들일 마늘빵 담당"을 맡아 나도 한 역할했음을 느끼는 기쁨과, 그런 내 역할을 위해 미리 바게트도 썰어 두고 올리브 오일에 다진 마늘도 미리 담가 놓는 그의 다정함이 진한 포옹처럼 한꺼번에 와락 느껴지는, 그런 거.


3월 첫 주, 그러니까 코로나로 미국이 무너져 내리기 바로 직전, 일주일 간의 휴가에서 돌아온 날 우리의 첫 집밥도 그의 파스타였다. 그 식탁에서 우리는 우리가 비행기와 공항을 거쳐 돌아온 여행자라는 불안함에 자가격리 2주를 서로에게 약속했었다. 그 2주가 채 끝나기 전에 주지사는 자택 대기명령을 선포했고, 이주씩 삼주씩 연장을 거듭하여 이제 100일을 코앞에 두고 있다. 그 백일 동안, 온갖 종류의 파스타로 열다섯 번의 집밥을 먹었다.


최근, 석 달 동안 이어졌던 자택 대기 명령은 무력하게 해제되었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아내고 상황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어찌 손을 쓸 수 없으니 경제라도 살리자는 의미인 것 같다. 그래서 강제성은 줄어들었지만, 마음이 가볍지는 않아서, 우리는 한동안 더 집밥을 만들어 먹으며 상황을 지켜보자 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한참 동안 나는 25% 이탈리안의 파스타를 종종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오예~!




224개의 리가토니 뒷 이야기

유아용 1인분 말고 성인용 1인분을 먹자고, 우리는 112개의 리가토니를 삶아서 토마토소스와 치즈를 듬뿍 얹은 캐서롤 casserole 스타일로 오븐에 구웠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날 저녁에 각자 캐서롤의 4분의 1 조각씩 먹었다, 그것도 아주 배부르게.


그렇다. 파스타 상자가 옳았다. 8인분은 어린이가 아닌 아닌 성인 기준이었다. 그 날 우리는 224개 중에서, 절반의 4분의 1을 먹었으니까, 정확히 파스타 상자가 주장하는 1인분을 먹은 것이다. 남은 절반의 캐서롤을 다음 날 저녁으로 데워 먹었다. 다음 번 파스타를 삶을 때, 오늘의 교훈을 꼭 기억하자고 약속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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