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계란밥과 아보카도밥
"응? 뭐가 그렇게 비싸?"
내가 아마존에서 적당한 가격의 전기밥솥을 찾아 노트북을 건네주었을 때 처음으로, 그는 이 세상에 "전기밥솥"이라는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동안 스패니쉬 라이스나 이탈리아식 리조또를 숱하게 만들어 먹을 때마다 커다란 팬을 사용해 왔던 그 사람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우리의 흰 쌀 밥도 팬에서 나오는 거라 믿었지 싶다. 어느 날, 똠카까이 Tom Kha Gai (태국식 치킨 수프)를 만들어 주겠다며 한참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주방에 들어섰는데, 쿡탑 위에는 내가 계란 프라이를 만들 때나 사용하는 가장 작은 팬에 뚜껑이 덮여 있고 그 안에는 소복하게 재스민 라이스가 들어 있었다. 냄비밥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프라이 팬 밥을 내려다보면서, 혹시나 뭔가 잘못되었을 때 쌀밥 먹고 자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어쩌나 싶어서 슬그머니 내 방으로 피신했다.
어찌 저찌 쌀이 제대로 익어서 그 날의 저녁 식사는 별 탈 없이 지나갔지만, 그 날부터 전기밥솥의 필요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방은 대체로 그가 도맡아 요리를 했기에, 그 사람이 쌀밥 지어서 한식을 뭐 얼마나 만들겠어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밖에서 외식을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육개장! 비빔밥! 을 외치는 내 모습이 떠올라, 그래 이제 슬슬 한식 만들기를 시작해야겠다 싶은 마음도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마존에서 찾기 시작한 전기밥솥은, 비쌌다. 한국에서 내가 처음 독립을 했을 때 엄마가 사 오셨던 "쿠쿠" 밥솥이 그렇게 비싼 모델이었다니. 같은 것을 사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한국 가정집처럼 매일 밥을 할 것도 아니지 싶어서, 그 절반 정도의 가격에 나름 예뻐 보이는 모델을 하나 골랐다. 그럼에도 그것은 250달러 정도였다. 그러니, 세상에 전기밥솥이라는 게 있어? 싶은 마음으로 노트북을 들여다본 그의 첫마디가, "헐. 이렇게 비싼 거야?"인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비싸서 사기 싫으면 관둬"라는 말 대신, 나는 "진짜 사고 싶은 건 500달러가 넘네."라는 말을 남겼고, 그 며칠 뒤에, 쿠쿠가 배송되어 왔다.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완료하였습니다. 밥을 잘 저어주세요. 쿠쿠~"
밥솥이 생긴 기념으로, 그 날의 저녁을 담당한 나는, 부담스러웠다. 늘 요리는 그 사람의 몫이었는데, 나는 무슨 요리를 해서 그 사람에게 쿠쿠의 가치를 어필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아무도 "전기밥솥을 왜 사?"라고 묻지 않는데, 정말 밥이 맛있게 잘 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밥은 밥솥이 하는 거'라는 믿음 때문인지 문득 헷갈렸다. 밥이 더 맛있네 없네 하고 시비를 걸 사람은 아니지만, 그동안 당연한 듯 밥솥에 거금을 들여온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만약에 그가 "별로 다를 것도 없는데?"라고 한다면.
한참 곰곰 생각하던 중에 문득 떠오른 것은, "간장 계란밥"이었다. 밥 맛을 제대로 느낄 때, 그러니까 본인이 만든 프라이 팬 밥보다 훨씬 맛있다고 느껴질 때, 밥솥의 가치를 알아보지 않을까 싶었다. 쌀을 씻고 쿠쿠의 전원을 연결했다. "안녕하세요, 쿠쿠입니다."라는 아리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는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그 목소리가 그렇게도 사랑스럽고 예쁘단다.
취사가 완료되기 5분 전, 그는 수제 소시지를 하나 꺼내어 반으로 가르고 팬에 구워냈고, 나는 계란을 구웠다. 흰쌀밥을 접시에 담고, 작은 버터 한 조각을 얹었다. 스르륵 녹아내리는 버터 위로 반숙 계란을 올렸다. 간장과 통깨를 뿌리고, 미리 잘게 썰어 둔 김을 살포시 올렸다. 짭짤한 소시지와 쌀밥, 버터 간장 계란 통깨 김, 그 모든 조합이 그대로 너무 완벽했다.
그 날 이후로, 우리에게 간장계란밥은 하나의 정식 메뉴로 등록되었다. 한참 동안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꼬박꼬박 해 먹었다. 먹을 때마다 어김없이, 마지막 한 입을 삼킬 때까지 "정말 이건 고오급 레스토랑 식사에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아."라거나, "누가 나한테 간장계란밥 먹을래, 스테이크 먹을래 물으면 나는 무조건 이거야."라고 만족감을 표현하면서.
맛있는 쌀밥을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되자, 그의 저녁 메뉴 탐색 범위도 확장되었다. 냉장고에서 적당히 찾아낸 재료들을 지지고 볶아서 흰 밥 위에 덮어 주는 덮밥류를 만들거나, 재료와 밥을 같이 볶음밥으로 만들거나. 그렇지 않아도 손목 스냅 화려하게 뭐든 챠르르 맛깔나게 볶아내는 사람인지라, 냉장고에 들어 있던 찬 밥을 꺼내어 볶음밥을 만들어도 쌀알이 한 알 한 알 입 안에서 춤을 추는 행복한 볶음밥 한 그릇을 뚝딱 만들어 낸다. 그렇게, 전기밥솥을 옆에 끼고서 그의 요리 창의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데, 최근 성공작은 "아보카도 밥"이었다.
그 날은, 시푸드 트럭 아저씨가 추천해 준 생선 Sword fish를 팬에 구워 내고 가벼운 소스를 만들기로 한 날이었다. 생선 구이에 곁들일 사이드 메뉴로 뭐가 좋을지 결정하지 못해 며칠을 미루었다가, 그 날 그는 쿠쿠 밥솥을 끄집어냈다. 생선에 어울릴 밥을 짓겠노라 했다. "아보카도 밥, 만들어 보자."
파마산 치즈 잔뜩 넣고 올리브 오일에 으깨어 만든 과카몰레 Guacamole를 토스트에 얹거나, 얇게 썰어서 타코에 넣거나, 연어 초밥을 만들거나, 간장 계란밥에 얹어 먹거나, 아니면 그냥 작게 썰어서 구운 아스파라거스, 반숙 계란과 함께 와인 안주로 먹거나, 아무튼 어떻게 먹어도 무조건 사랑하는 아보카도이지만, "아보카도 밥"은 도대체 뭐라니? 질문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친 것은 그의 "아보카도 컵라면"이었다. 컵라면 입문 시절, 그는 좋아하는 것을 무엇이든 같이 넣어서 끓이면 더 맛있어지겠지 기대감으로 아보카도를 넣었다가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그의 창의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가 싶어서 내심 불안했다. 그가 뜨거운 팬 앞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생선을 주시하며 소스를 만드는 동안, 그의 지령대로 내가 아보카도 밥을 만들었다.
잘 익은 아보카도 껍질을 조심스레 깐 뒤, 수줍게 연둣빛 등짝을 드러낸 아보카도 반 토막을 작은 믹싱 볼에 넣는다. 라임 반토막 즙을 짜고 제스트를 슥슥 긁어 넣는다. 적당히 작게 자른 실란트로 Cilantro (고수 혹은 코리앤더) 와 함께 재스민 라이스도 넣는다. 밥주걱으로 포슬포슬 천천히 섞어준다. (향긋한 실란트로는 취향에 따라 생략해도 될 것 같다.)
아아. 그토록 수많은 아보카도를 이렇게 저렇게 먹어 왔건만 왜 이제야 이 맛을 알게 된 건가,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만큼, 기가 막힌 맛이었다. 그 날의 생선 구이와 궁합도 좋았지만, 다음 날 우리는 똠얌꿍 Tom Yum Soup (태국식 새우 수프) 얼큰하게 끓여서 다시 한번 아보카도 밥을 지어먹었다. 그리고 아보카도 밥을 또 먹기 위해서, 똠얌꿍 소스 Tom Yum Paste를 대량 주문했다. 아마도, 간장계란밥만큼이나, 삼겹살 파티 후의 김치볶음밥만큼이나, 한동안 우리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될 것이다.
"쿠쿠, 절대 비싼 거 아니야."
그는 어떤 메뉴를 선택하더라도, 처음부터 제대로 만드는 "정석"을 좋아한다. 반쯤 만들어져 나오는 간편한 식품이나 캔에 들어 있는 식재료 코너에 발을 들이는 일은 좀처럼 없으며, 유튜브 쿠킹 비디오에서 초간단 초스피드 하게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는 치트키를 알려주거나 요리의 과학에 어긋나는 조리 순서를 알려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저 사람은 요리할 줄 몰라 He doesn't know what he is doing."라고 말하곤 한다. 슬로우 쿠커에 서너 시간씩 소고기 돼지고기를 익혀내는 것은 기본이고, 라구 소스, 멕시칸 포졸레, 프렌치 어니언 스프, 루이지애나 치킨 검보, 일본식 돈코츠 라멘, 육개장을 만드는 날이면 신선한 재료를 준비하고 시간을 충분히 들여 정성껏 만드는 것이 "요리"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그 사람에게 쿠쿠는 신세계를 열어 주었다. 초간단 초스피드 치트키라고 무시하기에는 쿠쿠의 밥맛이 너무 좋은 거지.
재료 준비와 레시피 점검까지 다섯 시간씩 걸리기도 하는 요리가 부담스러운 날에는, "오늘은 간단하게 만들어 먹자"라고 말하면서 뿌듯한 미소와 함께 전기밥솥을 꺼내고 전원을 연결한다. 그에게 쿠쿠는 간단하지만 최상의 만족을 주는 든든한 보조 셰프인 것이다. 쿠쿠를 들여오고 한 달쯤 지났을까, 간장계란밥 예찬을 한껏 늘어놓으며 식사를 마쳤을 때, 그가 말했다. "쿠쿠, 절대 비싼 게 아니었어. 우린 이미 본전을 뽑았지. 왜 그 가격인지 이제 알겠어."
그는 요즘도 밥을 지을 때마다 쿠쿠와 대화를 한다. 영어로 설정해두면 더 알아듣기 쉬울 텐데도, 한국어의 그녀 목소리가 훨씬 더 정겹다며, 설정을 다시 한국어로 바꾸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단다. 전원을 연결하고 쿠쿠가 살아나면, 양 손으로 밥솥을 쓰다듬으면서 "안녕하세요"라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 사랑스럽고 고운 목소리의 그녀가 하는 말을 "쿠쿠가~", "밥을~" 하고 흉내 내면서 행복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