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피자
몇 해 전, 하프 마라톤을 뛴 적이 있다.
걷기 라면 하루 종일도 자신 있지만 느린 속도라도 달리는 일은 어쩐지 내 몸에 맞지 않는 듯 어색한 기분 때문에, 기차나 비행기 시간에 늦어서 꼭 뛰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달리기에 동참하는 것은 내 사전에 없는 일이었다. 물론 헤어 밴드로 잔머리 싹 쓸어 올리고 뉴욕의 거리를 달리는 멋진 여성들을 떠올리면, 왠지 일도 잘하고 잘 노는 사람이 자기 관리도 잘하는 것만 같은 생각에 부러워지기도 하지만,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믿었다.
뉴욕 같은 대도시가 아닌, 한적한 교외의 미국 생활이 시작되면서 받은 첫 번 째 문화 충격은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타벅스의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매장에 들어가면 바로 주문하고 그 자리에서 커피를 받아 나올 수 있는데, 텅 비어있는 매장이 민망하게도 건물 밖 드라이브 쓰루 Drive Through에 늘어 선 차들은 항상 열 대가 넘었다. 한 명 한 명 느긋하게 주문하고 느긋하게 계산하는 미국 스타일을 생각하면, 저들은 그렇게 차에서 버려지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걸까, 싶다. 테이크 아웃 레스토랑뿐만 아니라, 은행의 atm 업무도 드라이브 쓰루에서 가능하고,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을 픽업할 때에도 약국 앞 드라이브 쓰루에 가면 인터폰으로 약사와 대화를 나누고 운전석 창문 높이의 철제 상자 문이 열리면서 인형 뽑기처럼 약봉지가 툭 하고 떨어진다. 그러고 보면 코로나 이전에도 미국 교외 생활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일찍이 실시하고 있었구나.
처음에는 그렇게 충격적이던 그들의 생활이 점점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집 밖을 걸어 나가 맥주 한 캔 물 한 병 살 수 있는 편의점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 였던 것 같다. 동네 산책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면, 차 없이 걸어서 어딘가를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운동을 하려고 해도 차를 타고 짐이나 공원에 가야 하는, 차 없이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너무 불편해지는 것이 미국의 교외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나 역시 길고 긴 드라이브 쓰루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도시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소모시킬 수 있었던 "걷기"의 에너지를 그대로 안고 있으니, 대신 군 살이 붙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첫여름, 유럽의 어느 도시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일이 없던 주말, 호텔에서 부터 몇 시간을 걸어 단골 피자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을 만끽했다. 발갛게 달아 오른 얼굴과 옅은 땀 냄새가 좋아서 우린 호기롭게 약속했다. 가을의 하프 마라톤에 등록하고 그때까지 조금씩 훈련을 하자고. 하프 마라톤을 성공하겠다는 야망보다는, 매일 꾸준히 운동하는 습관을 기르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우리는 집에서 40분 거리의 도시에서 열리는 하프 마라톤을 신청했다. 그리고, 훈련 계획표를 만들고 식단도 조절했다.
매일의 칼로리를 기록하고, 단백질과 야채로 이런저런 메뉴를 궁리하며 탄수화물을 피하던 어느 여름날, 해피 아워의 동네 바 Bar에서 마시는 IPA 한 잔이 몹시도 그리웠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떠올리듯 상상에 잠겨 징징 거리던 우리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짜 냈다. "걸어서 가자. 5km를 걸어갔다가 다시 5km를 걸어서 돌아오면, 맥주 한 잔과 피자 두 조각 정도의 칼로리는 벌 수 있을 거야." 곧바로 운동화를 꺼내 신고, 큰 도로가 아닌 호수를 끼고도는 한적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호숫가 집들을 구경하면서 딱 1시간을 걸어서 패밀리 레스토랑 겸 바인 그곳에 도착했다. 해피 아워에 자주 보이는 사람들 아무도 우리가 걸어서 왔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굳이 왜?" 하는 표정으로 각자의 맥주와 피자로 시선을 옮겼다.
그 날 마셨던 맥주의 첫 모금이 얼마나 상쾌했는지, 그 날 먹었던 피자의 첫 한 입이 얼마나 달콤하게 입 안에서 녹아내렸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부터 우리에게 "걸어서 오브리 Aubree's"는 서로를 더욱 단단하게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해주었다. 볕이 좋은 날이면 "걸어서 오브리 가기 딱 좋은 날이네" 말하기도 하고, 나른한 일요일 오후에 "저녁 하기도 귀찮은데, 걸어서 오브리 갈까?" 제안하기도 하고, 심드렁하게 사이가 서먹한 날에, "같이 걸어서 오브리 갈래?" 화해의 손을 내밀기도 한다.
그래서, 정말로 내 인생에 없을 일인 줄 알았던 하프 마라톤을 성공적으로 뛰어 낸 날, 자축할 장소로 우리는 동시에 "오브리!"라고 외쳤고, 구석 자리 테이블에서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에 취하여 피자 한 판을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피자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긴 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엄마의 진한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 것처럼, 그에게 피자는 그런 음식이다. 다이어트를 하는 동안에도 가장 힘겹게 참아야 하는 것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피자의 향기이고, 다이어트 중간중간의 단기 목표를 성취한 자신에 대한 보상도 어김없이 피자를 외치는 사람. 그와 반대로 나는 이탈리아식 화덕 피자도, 미국식 오븐 피자도 막 찾아다니며 먹을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뉴욕의 얇은 피자도, 시카고의 딥 디시 피자도, 디트로이트의 팬 피자도 다이어트 중에 떠오를 만큼 내 입맛을 사로잡지는 못했던 것 같다.
우리 동네 오브리는 웬만한 메뉴를 모두 갖추고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이지만, 우리는 주로 한쪽 구석의 바 코너에 앉는다. 처음에는 메뉴를 한참 씩 정독하면서 신중하게 골라 이것저것 시도해보곤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곳에서 제일 맛있는 것은 디트로이트 스타일 딥 디시 피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미트 러버 Meat Lover 라거나, 케이준 치킨 Cajun Chicken처럼 토핑의 조합이 정해져 있는 메뉴도 있지만, 피자 도우 스타일에서부터 토핑, 크러스트, 소스 모든 것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니 맘대로 피자 Build Your Own Pizza를 선택하면 당연히 만족도는 올라간다. 우리는 매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상세히 메모장에 기록을 남기고 평점을 매겼다. 10점 만점에 8.9 혹은 9.3 이런 식으로.
그렇게 이런저런 토핑의 조합을 직접 선택하고 맛을 보면서, 왕복 10km를 걸어 그 보상으로 맥주 한 잔과 함께 즐기게 되면서, 서서히 피자에 대한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동네 마트에 장을 보러 다녀오는 길목에 오브리 레스토랑이 있다. 얼마 전부터 다시 문을 열어 테이크 아웃과 배달을 시작한다고 크게 안내판을 세워둔 것이 보인다. "자택 대기 명령 Stay-at-Home Order 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느 식당에 제일 먼저 가고 싶어?"라고 둘 중에 한 명이 묻지만, 둘 다 대답은 알고 있다. "응, 오브리까지 걸어가서 피자 먹자."
레몬 피자
자택 대기명령이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면서, 언제 다시 동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을지, 오랜 셧다운으로 동네 작은 레스토랑들이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은 아닐지, 막막하고 쓸쓸할 때면, 우리는 집에서 니 맘대로 피자 Build Your Own Pizza 데이트를 즐기곤 한다. 잠들기 전, "내일 피자 만들까?" "그래 그러자." 하고 동의하면, 그는 아침에 일어나 피자 도우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둔다. 보통 얇게 펼친 피자를 3개 정도 만들 수 있는 양이라서, 우리는 세 종류의 피자 레시피를 준비한다. 토마토소스와 모차렐라 치즈를 베이스로 "페퍼로니+할라페뇨"와 "이탈리안 소시지+양파+버섯" 은 언제나 성공적인 단골 메뉴이다. 냉장고 사정에 따라, "삼겹살+김치+양파" 피자도 만들고, 먹고 남은 어니언 수프 베이스로 바질 잎과 치즈 얹은 피자도 만들고, "대파+마늘+고트 치즈" 피자도 만든다. 최근에 장을 보러 갔을 때는, 앤초비 anchovy를 사 왔다. 다음번에는 앤초비 피자도 만들기로 약속하면서.
대체로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새로운 조합을 궁리해내지만, 피자를 만들기로 한 날이면 일부러라도 장을 봐와서 만드는 것이 하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몬 피자.
처음 시작은, 그가 어느 요리 잡지에서 발견한 거라고 했다. 그의 낡은 요리 스크랩 북에서 찾아낸 잡지 사진 속에서 얇게 썬 레몬과 적 양파, 로즈메리가 얹힌 피자는 우아한 남프랑스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색감 좋은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런데, 이게 피자인가?' 생각도 들었지만, 그가 노릇노릇 구워 준 레몬 피자를 한 입 맛보았을 때, 단숨에 그것은 나의 최애 피자가 되었다. 도우 위에다 모차렐라 치즈를 먼저 올린다. 그 위에 양파, 케이퍼, 칼라마타 올리브를 흩뿌리고, 최대한 얇게 썬 레몬을 빈틈없이 올린다. 오븐에서 제대로 달구어진 피자 스톤 위에 바삭하게 구워 내면, 혼자서 한 판을 해치울 수도 있을 만큼 그 맛이 기가 막힌다.
레몬 피자를 포함하여 세 가지의 토핑 메뉴가 정해지고, 필요한 모든 재료를 주방 한가운데의 아일랜드에 늘어놓으면, 그날의 스탠딩 피자 파티가 시작된다. 한편에서 첫 번째 피자 도우를 평평하게 밀고, 소스를 바르고 토핑을 얹고, 치즈를 뿌려 오븐에 넣을 준비를 마친다. 최고 온도로 예열된 오븐의 피자 스톤 위에 쉬익- 하고 던져 넣은 뒤, 첫 번째 이탈리안 소시지 피자가 구워지는 동안, 두 번째 레몬 피자를 준비한다. 도우를 밀고, 치즈를 뿌리고, 양파 케이퍼 올리브 삼총사 위로 가지런히 레몬을 얹는다. 맥주잔을 건배하면서 기다렸다가 첫 번 째 피자가 보기 좋게 익었을 때, 잽싸게 꺼내어 아일랜드 위에 그대로 던져 한 김 식도록 기다린다. 그 사이에 레몬 피자는 오븐 속으로 들어간다. 레몬 피자가 익어가는 동안에, 이탈리안 소시지 피자를 한 조각 씩 맛보고, 그러면서 세 번째 피자를 준비한다. 도우를 밀고, 치즈를 뿌리고, 할라페뇨와 페퍼로니를 골고루 배열한다. 다시 맥주잔을 건배하면서 레몬 피자를 꺼내어 아일랜드 위에 던지고, 페퍼로니 피자를 오븐에 넣는다. 레몬 피자의 상큼한 향과 맛을 즐기면서, 남은 피자 조각들을 한쪽에 정리해 두고, 빈 그릇들을 모아 세척기에 집어넣는다.
콜드 플레이나 존 메이어 같은 음악을 틀어 놓고 주방의 한가운데에 서서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그 날의 일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사람이 도우를 밀어 내면, 다른 사람이 토마토소스를 발라 주고, 그러면 도우를 민 사람은 모차렐라 치즈를 들고 있다가 토마토소스 위에 흩뿌려 주고, 각자 하나씩 토핑을 맡아서 가지런히 치즈 위에 놓아주고, 머리를 맞대고 오븐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언제 꺼낼까? 지금? 1분 뒤?" 하며 피자가 갈색 빛으로 익어 가는 것을 구경하고, 한 사람이 커터를 들고 피자를 자르기 시작하면 한 사람은 빈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뒷정리를 하고, 마시던 맥주가 떨어지면 바로 옆 냉장고에서 한 캔을 꺼내어 서로의 잔을 채워 주기도 하고, 그렇게 죽이 잘 들어맞는 게임을 즐긴 듯 세 판의 피자를 구워 내면서 신나게 먹고 마시고 나면, 남은 피자를 냉동실에 얼려 두었다가 언젠가 비상식량으로 먹을 수 있다는 든든함과 함께 찾아오는 것은, 감정적 상쾌함이었다.
말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어쩐지 기운이 빠지고 지치는 날들은 코로나와 무관하게, 코로나가 찾아오기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다. 나는 이틀을 꼬박 투자하여 혼자서 사전 조사와 브레인스토밍을 한 뒤에 미팅에 참여하고서도 자신 있게 나서서 한 마디 못했는데, 미팅 자리에서 처음 안건을 접한 다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바로 술술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가 선택되어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볼 때의 자괴감이 무겁게 내려앉는 그런 날은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럴 때마다 Imposter Syndrom을 떠올리며 "나는 신드롬이 아니라 팩트야 팩트" 하고 스스로를 비관하는 대신, 스탠딩 피자 데이트를 제안한다. 한바탕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밀가루를 만지고, 피자와 맥주를 먹는 일이, 그렇게 바닥으로 가라앉는 날의 나를 끌어올려 준다. 특히 레몬 피자의 상큼한 한 입은, 미팅에서 벙어리처럼 입도 뻥끗하지 못했던 소심한 나를 잊게 해 준다.
그런 날은 또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여긴 내가 속할 곳이 아닌가, 싶은 그런 날. 혼자 방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와인을 마시며 한탄을 해본 적도 있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통화를 하면서 구구 절절 속상함을 늘어놓았던 적도 있고, 온갖 장르의 영화를 골라서 잊어보려 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위안을 받고 고비를 넘기기도 하지만, 나에게 가장 자연스럽고 유쾌한 기분의 전환은 스탠딩 피자 데이트인 것 같다. 첫 하프 마라톤의 성공과, 왕복 10km를 걸어서 쟁취하곤 했던 오브리의 피맥과, 첫 레몬 피자를 만들어 먹던 풋풋한 연애 초기의 기분이 켜켜이 소환되어서, 별다른 말 없이도, 스르륵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