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라면 한 그릇 할까요?

라멘보다 라면

by TwoHearted


라면이 없던 삶

밥보다는 커피나 술을 좋아했고, 안주 없이 먹는 술이 불편하지 않았으며, 저녁 무렵에 술 약속이 있는 날이면 점심을 건너뛰기도 했다. 예전의 나는 그랬다. 미국으로 이사 오기 전 한국에서 나의 삶은 "365일 다이어트 중"이었다. 하루 종일 끼니를 챙기지 못해 뭐라도 먹어야지 싶은 마음에 근처 빵집에 들어가더라도,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는 칼로리 정보를 확인하고는 그냥 빵집을 나왔던 날도 많았다. 누가 나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지 않아도, 상처로 남을 모진 말을 던지지 않아도, 군살이 들러붙지 않도록 스스로 애쓰며 살았다. 더구나, 건강한 제철 재료로 맛깔스럽게 한식을 뚝딱 만들어 내시는 엄마의 집밥을 먹고 자라서, 웬만한 식당에서의 조미료 맛 강한 음식에 그다지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았다. 엄마의 밥상에 배달 음식과 인스턴트, 냉동 음식이 올라오는 일은 거의 연례행사와도 같았고, 우리 집 사람들은 "라면은 몸에 좋지 않아"라고 믿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라면 냄새, 치킨 냄새에 길들여지지 않았고, 밤 9시의 출출함과 라면 냄새의 유혹 사이에서 갈등할 일도 없었다.


때때로 새로운 라면이나 조리법이 유행할 때마다, 예를 들면 불닭볶음면이 얼마나 매운지, 짜파게티와 섞어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어지는지에 대한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라면, 좋아해요?"라고 누가 물어오면, "음, 라면은 잘 안 먹지만, 라멘은 좋아해요."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네 시골 식당에서 사골 곰탕을 하루 온종일 우려내는 것처럼, 돼지 육수 진하게 우려내어 두툼한 차슈와 함께 내어 주는 일본식 라멘은 정성 들인 "요리"로 여겨졌고, 그것은 우리의 인스턴트 라면과는 다른 종류의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의 나는 그렇게, 라면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고깃집 기름진 테이블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나누어 마시는 달콤함을 가르쳐준 미국인, 그 사람이 "한강 편의점에서 끓여 먹는 라면이 제일 맛있지"라고 말했을 때에도 나는 "...... (그게 뭐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강변 편의점, 플라스틱 야외 테이블이 놓여 있는 한편에 라면을 끓일 수 있는 기계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어느 일요일 오후, 그가 보내온 짧은 동영상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사각 은박 접시 안에서 라면이 끓고 있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우리 집에는 한강 편의점 라면 기계도 없는데
어떻게 봉지 라면을 끓여먹어?

사실, 비상식량으로 라면을 사두기 시작한 것은 그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 본인 나름대로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본 결과 신라면 블랙이 제일 맛있었다면서, 동네 마트에서 작은 사이즈 컵라면이 눈에 띄면 한 두 개씩 사다 놓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컵라면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어느 날 마트에서 내가 너구리 한 봉지를 집어 들었을 때, 그는 당황했다. "그거 어떻게 먹으려고? 우리, 라면 끓이는 기계도 없잖아." 순간 이게 무슨 말인가 나 역시 당황했다가, 이내 깨달았다. 그는 아직 냄비에 끓이는 라면을 본 적이 없어서, 봉지 라면은 한강 편의점에 있는 기계 전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으면서 나는 마법이라도 부릴 것처럼 "나만 믿어봐"라고 허세를 부리며 카트에 봉지 너구리를 담았고, 그는 '저 여자, 라면도 잘 모르면서 무슨 자신감이야?'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 날 이후로 그의 마음에서 신라면 블랙은 너구리 봉지 라면에 1등 자리를 빼앗겼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냄비에다 라면을 끓이는 과정을 넋 놓고 쳐다봤던 그가 이제는 나보다 더 맛깔나게 잘 끓인다. 한국 마트에 가면 그는 곧장 라면 선반 쪽으로 달려가 너구리 한 팩, 신라면 블랙 한 팩을 먼저 챙긴다. 가끔씩, 요리하기 귀찮거나 마땅한 재료가 없는 날이면 "오늘은 간단히 라면 끓여 먹자" 제안하기도 하고, 볶음밥이나 군만두 1인분에 라면 하나를 곁들여 먹기도 하면서, 우리는 "라면이 있는 삶"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라면이 있는 삶

미국으로 이사 올 때, 나는 정말로 옷가지와 책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엄마의 김치나 밑반찬이 아쉬울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적응하면서 살 자신이 있었다. 한 달씩 여행을 다니던 시절, 한 달 정도 쌀밥 안 먹어도 아무렇지 않았고, 현지 음식을 최대한 경험하고 즐기느라 한식 비상식량이 필요하지 않았었다. 한국에서 늘 아쉬워했던 신선한 샐러드와 구수한 호밀빵으로 만든 샌드위치가 지천에 널린 미국인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뭐라도 싸주고 싶으셨던 엄마를 안심시키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하지만, 여행이 아닌 생활은, 아무리 여행 같은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부터 다르다는 것을 미리 생각했어야 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때가 되면 끼니를 거르지 않고 꼭 챙겨 먹으려 하는 식욕이, 타향살이에서 오는 마음의 허기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반년이 걸렸다. 정말로 지천에 널린 신선하고 건강한 맛의 샌드위치와 샐러드만 있으면 평생 행복하게 잘 살 것 같았던 내가, 마트에 가면 아시안 푸드 코너를 서성이고, 친구들과 밥 약속이 있으면 한국 식당에 가자고 외치며, 집에서 떡볶이를 만들어 먹고, 아마존에서 라면을 번들로 사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랬다. 미국 생활 반년만에 나는, 한국 음식이 몹시도 그리웠고, 동네 마트에서 한글로 적힌 과자나 라면 봉지를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마음이 쓸쓸할 때면 일부러 옆 동네 한국 마트에 달려가서 쇼핑 카트 가득 이것저것 담아 나온다. 새우깡 한 봉지를 아껴서 먹고, 저녁을 먹고 나서 후식으로 냉동실에서 초코 파이를 꺼내어 먹는 내가, 처음에는 낯설었다. 더 이상 머릿속으로 음식의 칼로리를 더하고 빼지 않으며, 스트레스로 당이 떨어진다 싶으면 달달한 초콜릿과 체리 파이에 손을 뻗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저녁 8시 이후에는 금식"과 같은 규칙은 이미 망각한 지 오래였다. 타국에 살면서 아프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잘 챙겨 먹는 일로 구체화된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누구도 살이 붙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이 곳 문화에 점점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는, 스타일이 좋다거나 옷이 예쁘다는 칭찬은 낯선 이에게도 스스럼없이 건네지만, 얼굴이 예쁘다 거나 몸매가 좋다거나 피부가 탱탱하다는 것으로 칭찬을 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는 종종 젊다는 것만으로 곱다는 칭찬을 주고받기도 하고, 몸매 관리나 피부 관리 비결, 운동과 다이어트, 맛집 정보만으로 몇 시간씩 수다 떠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이 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몸매나 피부나 얼굴 생김새처럼 타고난 것에 대해서 비교하거나 판단 judge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든지, 적어도 겉으로 표현되는 말과 대화에서는 그런 외적인 부분에 대한 좋은 쪽으로의 감탄이든 나쁜 쪽으로의 평가이든, 아예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서로의 자존감을 존중하는 하나의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웃으면서 나눈 대화 뒤에 집에 돌아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은근 신경 쓰이는 "요즘 마음이 편안한가 봐, 살이 좀 붙은 거 같은데? 보기 좋다"와 같은 말들이 사라진 삶은, 편안했다. 칼로리 숫자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고, 야밤의 식욕에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오히려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이해하게 해 주었다. 샤워 후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들여다보기 싫어서 시선을 피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마주하고 건강한 습관을 위한 건설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한국의 맛에 대한 그리움과 다이어트가 없어진 삶은 자연스럽게 찬장 한편에 라면 전용 공간을 마련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나에게 라면은 더 이상 "몸에 좋지 않은 인스턴트 음식"이 아니라,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위로의 음식"이 되어 있었다.




미국 라면 vs. 한국 라면

느지막한 오후에 점심을 먹고 저녁을 건너뛴 날이면, 밤 9시의 출출함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괜히 주방을 서성대다가 누군가 "라면?"이라고 운을 떼면, 순식간에 냄비에 물이 준비된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라면 한 봉지를 끓인다. 너무 귀찮은 날에는 계란만 풀어서 넣고, 어떤 날은 부산 어묵을 썰어서 넣기도 하고, 조금 더 정성을 들이고 싶은 날은 냉동실의 소시지를 따로 구워서 넣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다른 재료를 추가해서 넣더라도, 두 사람이 라면 한 봉지를 끓여서 나누어 먹고 배가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에도 라면을 즐기지 않았으니 한국 라면에 대해 뭐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라면 한 봉지가 1인분이라는 것은 안다. 그래서 처음에 미국에서 산 라면 봉지 뒷면의 영양 정보 란에서 "1인분 260 칼로리, 한 봉지당 2인분"이라고 적힌 문구를 봤을 때 "장난해?!"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라면 한 봉지를 둘이서 나누어 먹는다. 배가 많이 고픈 날이면 만두 몇 개를 굽거나, 볶음밥 한 그릇을 만들어 같이 먹기도 하지만, 라면 두 개를 한꺼번에 끓여본 적은 아직 없다.


정확히 비교하거나 분석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곳 미국에서 봉지라면을 살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 봉지의 부피가 꽤나 두툼하다는 것이다. 혼자서 끼니를 때우기 위해 라면 한 봉지를 끓여 먹는 날이면 먹다 지치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흔히 밀가루 음식이 주는 더부룩한 느낌이 없다. 직수입이 아니라 "made in USA"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미국 밀가루를 사용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면발의 쫄깃함은 한국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색다른 느낌을 준다.


그냥 나의 착각인가 싶기도 해서, 다음 한국 방문 때에 꼭, 미국 라면 몇 종류를 사서 가기로 했다. 미국 라면, 한국 라면 나란히 끓여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만약에 정말로, 그 양과 질에 차이가 난다면, 조금 속상할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한국에서 800원이면 살 수 있는 라면 한 봉지가 여기서는 2천 원 정도이니 어떤 식으로든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한가 싶기도 하지만, 만약에 한국 라면과 사랑에 빠진 미국 사람이 라면의 본고장 한국에 도착해서 설렘 가득한 첫 식사로 라면을 선택했다면 "미국에서 맛볼 수 없는 오리지널 한국 라면 맛"에 감동받았으면 좋겠다.


최근 뉴욕 타임즈의 한 실험에서 "신라면 블랙"이 최고의 인스턴트 라면으로 뽑혔다. 그리고, 영화 "기생충" 열풍으로 "짜파구리"는 3위에 올랐다. 라면 먹으러 한국으로 날아가는 미국인이 몇이나 되겠냐만, 누군가 서로 다른 라면의 맛을 굳이 비교한다면 "한국에서 먹는 라면이 훨씬 맛있어!"라며 한국 사람들을 부러워 했으면 좋겠다.




라멘 말고 라면이 좋아요

예전의 내가 "라면은 잘 안 먹지만 라멘은 좋아해요"라고 말하곤 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다. 그렇다고 그때의 내가 라면과 라멘 사이에서 어떤 비교와 평가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라면과 라멘은 그 종류가 다른 음식이라고 생각했었다. 얼마 전, 몇 시간씩 천천히 끓이고 익히는 요리에 익숙한 그가 12시간을 바쳐 일본식 돈코츠 라멘 육수를 만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 수고로움에서 비롯되는 깊은 맛을 충분히 즐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한국의 라면은, 쉽고 빠르게, 하지만 깊게, 우리의 그리움을 달래주기 때문에, 일본 라멘집을 굳이 찾아가는 것보다 집에서 그와 함께 라면을 끓여 먹으며 추억에 잠기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


나에게 라면은 더 이상, 몸에 나쁜 음식이 아니다. 한국의 맛이 그리운 날에, 한강에서의 데이트가 그리운 날에, 타임머신을 타듯 휘익- 하고 그때 그 추억의 시간으로 날아갈 수 있는 감동의 음식이다. 이제는 누가 굳이 물어본다면, "라멘보다 라면을 더 자주 먹어요"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곧바로 입안에 침이 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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