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동에 식당을 여는 상상

쉬림프 앤 그릿츠

by TwoHearted
정자동의 타임캡슐

특히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는 날에는 한국에서 함께 보낸 시간들을 회상하면서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 이를테면, 오늘 같은 날은 그 집 가서 마사지받고 싶다, 그치? 태국말 잘하는 친절한 한국인 사장님네 타이 마사지샵에서 마사지받고 나오는 길에는 나른하게 졸려도 꼭 들리곤 했던 조그마한 우리 동네 이자카야 기억나지? 테이블이 4개뿐이고 사장님 혼자서 요리도 하고 서빙도 하느라 시간은 좀 걸렸지만 꼬치구이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는데. 그때에는 더없이 일상적인, 특별할 거 하나 없는 평범한 날들이었는데, 이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생생하게 그 풍경이 떠오르고 그 대화가 떠오르고 그 기분이 떠오르는 건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운 한국 음식과 좋아했던 식당들을 떠올리면서, 그가 "우리 한국에 다시 가면, 어느 집을 제일 먼저 가고 싶어?"라고 물어왔을 때 나는 음...하고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려 했으나,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나는 있잖아, 정자동"이라고 미리 정해져 있는 답을 말했다.


우리에게 정자동은, 가끔 데이트 기분을 내고 싶은 금요일 저녁에 찾아가곤 하던 옆 동네였다. 다른 동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자주 다니던 건 아니라서 갈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들기도 했고, 빵집도 찻집도 밥집도 술집도 많아서 좋았다. 그런 정자동에도 추억의 장소들이 몇몇 있지만, 그가 "나는 있잖아, 정자동"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바로 알아 들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정자동의 어느 이자카야, 2층의 구석자리 테이블이라는 것을.


이상하게 그 이자카야에만 가면 우리는 기분이 들떠서, 신나게 웃고 떠드느라 평소보다 술도 안주도 더 많이 먹게 되었다. 옆 테이블의 소개팅 남녀를 몰래몰래 관찰하기도 하고, 건너편 테이블에서 누나를 붙들고 연애 상담을 하는 청년의 이야기도 듣고, 팀 회식에서 월급 한탄하는 샐러리맨의 한숨도 들으면서, 우리도 그들 틈에 섞여 주말의 생맥주 몇 잔으로 고단했던 일주일 치의 스트레스를 털어 내다 보면 어느새 초긍정 낙관주의자들이 되어 깔깔대고 있었다.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이 정해진 뒤, 우리는 한국에서 남은 날 동안 꼭 다시 가고 싶은 장소들을 골라서 목록을 만들고 차례차례 방문했었다. 당분간은 한참 올 수 없겠지만 그동안 좋은 추억 만들어 준 그 "공간"들에게 고마웠다고 마음으로 인사를 전하는 우리끼리의 의식이었다. 유난히 신나게 먹고 마셨던 이자카야의 2층 구석 자리가 마침 그 날도 비어 있어서 우리는 들어설 때부터 기분이 좋았다. 미국으로의 이사와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한국에 대한 그리움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습관처럼 테이블 위의 냅킨에 낙서를 했다. 내용도 맥락도 없이, 글씨 연습을 하듯 그와 나의 이름을 나란히 써보는, 뻔한 낙서. 둘 중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냅킨을 가게 한 구석에 숨기기로 했다.


그렇게, 별 내용도 없는 냅킨 한 장이 우리의 타임캡슐이 되었다. 가끔씩 "그 냅킨, 누군가 발견했을까?" 궁금해하기도 하고, "아니야, 아직 그대로 있을 거야" 긍정하기도 하면서, 정자동의 이자카야 2층 구석 테이블은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에 꼭 다시 찾아야 할 곳이 되어 있었다.



우리의 주방이 그대로 조그만 식당이 된다면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 파티 스토어 주차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씨푸드 트럭이 다시 돌아온 날,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양 손 가득 포장된 생선과 챠우더 수프를 사다가 냉동실에 차곡차곡 쟁여 두었다. 생선이 종류대로 있으니 어떤 요리든 해 먹을 수 있다는 든든함 비슷한 것을 느끼면서. 그리고 눈치 빠른 그는, 기운이 쭉 빠져있는 나를 단번에 춤추게 만드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오늘 저녁에는 쉬림프 앤 그릿츠 Shrimp and Grits 만들자." 그러면 나는 단순하게도, 코난 오브라이언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박진영에게 배운 춤사위를 흉내 내면서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쉬림프 앤 그릿츠는 미국 남부 음식이다. 나는 고작 일주일을 보낸 것이 전부이기는 하지만, 처음 미국 여행을 하던 때에 호기롭게 혼자서 다녀온 뉴올리언스에서의 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기에 남부 음식에 대한 나만의 애착이 있다. 사실 뉴올리언스는 재즈의 고향으로만 알고 있었다. 수많은 크레올, 케이준 요리들이 그토록 매력적이더라는 것은 그곳에 여행을 가서야 알았다. 대낮부터 밤까지 재즈바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행복한 시간들 틈새로 검보, 포보이, 레드빈 라이스 등등 그들의 집밥 같은 소박한 음식을 먹으면서 남부식 소울 푸드가 주는 따뜻함을 맛보았다. 아쉽게도 그 이후로 한국에 돌아와서도, 미국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입에 착 감기는 미국 남부 음식을 내어주는 식당을 만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가 치킨 검보 한 솥을 끓이는 날이나 쉬림프 앤 그릿츠를 만드는 날이면 더더욱 기대감과 설렘이 커지는 게 아닐까 싶다.


노릇노릇 잘 익은 관자까지 올린 쉬림프 앤 그릿츠 접시를 앞에 두고 앉은 날이면, 우리는 근거 없이 자신감만 넘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한다. 대체로 시작은 "아아. 정말 진심으로 맛있어. 여태 먹어 본 그릿츠 중에 단연코 1등이야"라고 내가 감상을 말한다. 본인이 만들고도 만족스럽게 그 맛을 음미하던 그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내심 기뻐한다. "한국에도 쉬림프 앤 그릿츠 맛있게 만들어 주는 식당 하나쯤 있으면 좋겠어"하고 아쉬운 마음이 "이 정도로 깊은 맛이면 누가 먹어도 맛있다고 할 거야"라는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또다시 "우리 정자동에 조그마한 컨셉 식당 하나 열자고 했었잖아"로 귀결된다. 아시안, 멕시칸, 이탈리안, 아메리칸 할 거 없이 웬만큼은 맛깔나게 뚝딱 만들어내는 사람이지만, 유독 미국식 집밥을 만들 때면 더욱 정성을 더하기에 그와 함께 검보나 칠리 수프, 쉬림프 앤 그릿츠를 먹는 날이면 으레 "이렇게 소울 찐하게 만들어 주는 식당이 있으면 대박일 텐데" 하면서, 정자동의 작은 가게에 식당을 차리는 구체적인 사업 구상으로 뭉실뭉실 꿈을 키우곤 한다.


나는 그 작은 컨셉 식당의 손님이 되는 상상을 해 본다. 누군가는 나처럼, 미국 남부 요리에 자신만의 추억이 배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리를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시작부터 끝까지 옳은 재료로 제대로 만들어 주는 음식을 기다리고, 맛보는 일이란 그저 단순하지만 담백한 행복이지 않을까. 지금 이 주방에서 오후 햇살을 받으며, 크게 틀어 놓은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즐겁고 신나게 요리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손님이 본다면 덩달아 기분이 가벼워지겠지. 그러면 그 음식을 기다리는 설렘도 배가 되겠지. 그런 기다림 뒤에 이렇게 깊고 담백한 쉬림프 앤 그릿츠를 맛보면, "아아~"하고 마음이 단번에 녹아내리겠지. 수입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주인도 손님도 모두 행복한 그림 같은 식당의 풍경을 상상하다 보면, 정말로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달콤한 자신감이 생겨난다.



그때에도 내가 즐겁게 요리할 수 있을까?

작은 구멍가게 하나 조차 맡아서 꾸려본 적 없이, 장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무식하고 용감하게 달콤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식당의 컨셉을 정하고, 인테리어 스타일을 정하고, 메뉴를 정하고, 가격까지 매기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늘어놓는다. 매번 쏟아내는 아이디어들이 너무 참신해서, 당장이라도 오픈하면 대박을 칠 것만 같아 심장이 쿵쾅댄다. 어차피 한국에서 요식업은 유행을 타서 오래가지 못한다고 짐짓 아는 체도 하면서, 주력 컨셉을 2년 주기로 바꾸기로 한다. 저녁 장사만 하자고 했다가, 주말 장사만 하자고 했다가, 우리 동네 로컬 맥주를 직수입해서 독점 판매하자고 했다가, 낮술 애호가를 위해 낮에도 열자고 했다가, 점점 사업 계획은 현실적인 문제에 가 닿는다.


여기서는 한 바구니에 500원이면 살 수 있는 싱싱한 실란트로나 1개에 10원쯤 하려나 싶은 할라페뇨뿐만 아니라 폴렌타 polenta나 심지어 밀가루까지 한국으로 수입하는 것이 아마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 몸이 너무 피곤하거나 힘든 일이 생겨도 갑작스럽게 가게를 하루 쉬는 일은 어렵겠지. 그렇다고 일주일에 3일만 문을 열고 저녁 장사만 하면서 낮에는 재료 준비를 한다면, 과연 적자를 내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다.


거기다, 그의 염려는 또 조금 달랐다.


"지금 나는 요리하는 시간, 주방에서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 좋거든. 내가 원래 요리에 취미가 있는 사람인 것도 맞지만, 내가 좋은 건, 우리가 같이 요리한다는 거야. 우리는 아무 말 안 해도, 서로에게 필요한 거 딱딱 알아채고 도와주면서 엄청난 팀워크로 같이 요리하잖아. 이렇게 같이 앉아서 맛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런데 손님들이 밖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고, 매번 날카롭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식당의 주방에서 요리하는 일이 지금처럼 계속 재미있을 수 있을까?"


그랬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만큼이나 사랑하는 것은 주방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었다. 파스타 면이 얼마나 익었나 먹어 보고, 국의 간을 보고, 음식에 어울릴 그릇을 고르고, 오븐의 온도와 고기의 익힘 정도를 확인하는 모든 과정을 우리는 함께 상의하고 결정해 왔다. 배달 음식에 의존하지 않고, 둘 중의 한 명이 "주부" 역할을 도맡아 하지도 않고, 우리는 코로나 격리 생활 내내 매일의 식사를 함께 챙겼다. 그렇게 주방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집 밖을 나설 일 없는 원격 업무 환경에서 적지 않은 휴식과 위로를 받았다. 잘은 모르지만, 그 순수한 즐거움을 "서비스"라는 이름 아래 손님이 지불하는 돈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일은 아마도 마냥 신나고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껏 부풀어 오르던 "정자동에 작은 식당 열기" 상상은 설거지를 할 때쯤 시들해진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우리끼리 요리하는 게 좋아"라는 그의 말이 수줍은 고백 같아서, 당분간은 누구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고 나 혼자 누리기로 욕심내 본다. 그리고 또 언젠가 쉬림프 앤 그릿츠를 만드는 날이면, 둘이 머리 맞대고 앉아서 가게 이름을 정하느라 열을 올릴 것이다. 이렇게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을 다른 사람들도 먹어 봐야 한다고! 싶은 사명감 비슷한 그런 마음으로. 언젠가 다시 한국에 돌아가 몇 년쯤 지내게 되는 날, 소박하게 작은 가게 하나 열 수 있는 사업 계획 하나쯤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싶은 마음으로.


정자동에는 우리의 타임캡슐이 숨어 있고, 작은 식당을 열고 싶은 우리의 꿈같은 꿈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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