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을 싫어하던 미국인,
한국 영화에 빠지다

순두부 찌개

by TwoHearted


봉준호, 자막의 장벽을 없애다

2019년 5월,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은 뒤, 북미에 개봉하기까지 반년이 걸렸다. 10월 중 개봉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부터 내내 설레었다. 그 기다림은 칸느 수상작이라서도 아니고, 원래부터 봉 감독님의 팬이라서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할리우드 영화밖에 볼 수 없는 이 곳 미국의 대형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대되었다. 가끔 극장에 가서 영어로 된 영화를 보기도 하지만, 듣는다고 다 들리는 것도 아니고 안 들린다고 자막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서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을 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었는데, 그런 걱정 없이 애써 집중하지 않아도 모든 말을 죄다 알아들을 수 있을 테니,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아니, 상상도 잘 되지 않아서, 빨리 그 날이 왔으면 하고 손꼽아 기다렸다.


개봉 첫 주, 설레는 마음으로 상영 시간표를 검색했을 때, 검색된 극장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로스앤젤레스, 다른 하나는 뉴욕. 아...... 내가 한참 동안 한국 영화를 볼 수 있다고 설레발치던 것을 보아 왔던 그는 나의 아쉬움을 향해 "뉴욕 가서 보자!"라고 대담한 위로를 전했다. 한 순간 '정말 그럴까?'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말뿐이더라도 고마웠다. 그 며칠 뒤, 우리 지역에서도 어느 예술 극장에서 상영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뉴욕행 대신 옆 동네로의 주말 데이트 계획을 세웠다.


예술 극장이 있는 그 동네는 뭐랄까, 우리 동네보다 힙하다. 고작 20분 거리인데 뭔가 불공평하다 싶을 만큼 샌프란시스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카페도, 분위기 좋은 식당도 곳곳에 숨어 있고, 팻 매시니 같은 분들이 와서 저녁 공연도 하고 그런다. 미국 작은 동네가 풍기는 고즈넉한 분위기에 잘 어우러지는 오래된 예술 전용 극장에서 나는, 단풍이 곱게 물든 11월의 첫 주말, 자막 없이도 모든 말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영화 감상의 호사를 누렸다.


반대로, 그는 어딘지 모르게 긴장된 표정으로 영화관 좌석에 앉았다. 영화를 좋아하고 많이 보고 자주 보는 그 사람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외국어 영화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미국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취향껏 다양하게 골라 볼 수 있으니, 영어가 아닌 영화를 굳이 찾아서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어린 세대들은 국경의 구분 없이 전 세계의 문화를 공유하고 즐기는 것이 예전보다 쉬워졌지만, 영화든 음악이든 미국 시장이 곧 세계 시장인 환경에서 살아왔던 그와 그 시대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그 바깥을 궁금해하는 갈증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자막을 읽느라 배우의 표정을 놓치고, 장면을 놓치고, 그래서 영화의 느낌을 놓치게 될까 싶어서 조금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극장에 들어섰다.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아쉬운데, 자막 때문에 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속상할 것 같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괜찮을 거야"하고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었다.


빈자리 하나 없이 가득 찼던 그 극장에서, 한국 사람은 생각보다 많이 보이지 않았다. 대충 둘러봐도, 나처럼 자막이 필요 없는 사람보다 자막에 의존해야 할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 보였다. 그런데, 그를 포함해서 극장 전체가 동시에 웃고, 동시에 놀라고, 동시에 감동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그는, 자막을 읽는 것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막과 함께 충분히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코로나 격리 생활의 장점이자 단점은 영화나 드라마를 이전보다 많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즉흥적으로 채널을 뒤적이다가 끌리는 영화를 고르기도 하고, 누군가 추천해 준 것을 보기도 하고, 예전부터 미루던 것을 드디어 챙겨 보기도 하고, 혹은 좋아했던 영화를 다시 보기도 한다. 얼마 전, 뉴욕 타임스에서 뽑은 최고의 인스턴트 라면 순위에서 신라면 블랙이 1위를, 기생충의 짜파구리가 3위를 차지했던 날, 우리는 일부러 육질 좋은 소고기를 사다가 저녁으로 짜파구리를 끓여 먹었다. 그리고, 영화 <기생충>을 다시 보기로 했다. 내용을 다 알고 보는데도 마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몰입해서, 또 수많은 생각과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영화에 빠져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그가 말했다.


"나, 봉준호 감독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예전에 나는 자막 읽는 거 귀찮아했잖아. 그래서 가능하면 영어로 된 영화만 봤지. 그런데 자막이 없으면 한국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이상하게 자막을 읽는 것이 거슬리지가 않아. 단어 하나하나 읽지 않고 대충 보더라도, 배우들의 표정과 말투와 목소리 톤을 같이 보면서 흐름을 따라가니까 내가 마치 한국말을 이해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거 있지. 내가 그동안 자막을 핑계로 한국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바보같이 느껴져. <기생충>을 보고 나서부터 다른 한국 영화도 보기 시작했잖아. 나는 한국 영화들이 그렇게 섬세하고 완성도가 높다는 것에 너무 놀랐어. 봉준호 감독이 나를 한국 영화의 세계로 인도해 준 거야."


그의 차분한 독백 같은 말을 듣는 동안, 내 심장이 왜 그렇게 뜨거워졌던지. 언젠가 골든 글로브 수상 소감에서 "1센티 자막의 장벽을 넘으면, 그 뒤에 더욱 다양한 영화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던 감독님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을 눈 앞에서 목격한 기분, 그야말로 짜릿했다. 그에게 감독님의 자막 관련 코멘트를 말해 주면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감독님이 들으면 정말 기뻐할 거라고 했다. 그는 "좋았어! 내가 직접 전해주겠어" 하며, 내가 감독님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내가 그 유명하신 감독님의 연락처를 어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한국 영화에 빠지다

<기생충> 이후로 그의 한국 영화에 대한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 봉준호 감독님의 다른 영화도 보고,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도 보면서 미국 시장에 들어와 있는 한국 영화를 모두 섭렵할 기세다. 그리고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버닝>을 보자마자 이창동 감독님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님으로 등극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이창동 감독님의 모든 영화를 찾아 나섰고, <초록 물고기>, <오아시스>, <밀양>, <박하사탕> 같은 오래전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듯 볼 수 있다기보다 영화 속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함께 겪어야 하는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를 나도 참 좋아했었기에, 그가 한국 영화를 보는 저녁이면 슬그머니 옆에 앉아 같이 보곤 한다.


<기생충>의 송강호 씨가 <살인의 추억>에도, <초록 물고기>와 <오아시스>에도 나온다는 것을 알아보고, 한국에 살 때 밀양에 가본 적이 있다면서 영화 <밀양>의 장면 속에서 추억의 거리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집중해서 배경을 살피기도 하고, <오아시스>에서 문소리 씨가 지하철역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감동하기도 하면서, 그의 한국 영화 사랑은 깊어간다. 물론,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놓치기 쉬운 함의적 장면이나 멘트들을 모두 소화할 수는 없어서 당황하는 순간도 생긴다. 그럴 때면, 미국 영화나 방송을 볼 때 반대로 내가 놓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그가 친절하게 설명해주곤 하는 것처럼, 나도 최대한 한국 문화의 배경 지식을 설명해 준다.






<오아시스>를 보던 날, 영화를 중간에 멈추어 놓고 그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영화 속에서 문소리 씨가 맡은 "공주"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다. 다른 영화 <초록 물고기>에서 한석규 씨의 형도 비슷한 장애를 보였던 것을 기억하는 그가 나에게 질문했다.


"음. 뭔가 이상한데. 한국에도 저렇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 영화라서 설정인 건가?"


응? 무슨 소리야. 당연히 많이 있지, 한국에도.


"정말? 어디에? 나는 한국에 사는 동안 한 명도 못 봤어. 말도 안 돼. 어떻게 길에서도 공원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할 수가 있어?"


그건, 그분들이 밖에 잘 안 나오니까.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 우리 두 사람 모두 멍 하게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랬다. 미국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심지어 대형 백화점 매장의 직원으로도 마주하면서 살아간다. 본인들도,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도 장애로 인한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적절한 배려를 주고받지만, 대체로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휠체어를 타고 공공시설이나 대중교통 등을 이용하는 데에 물리적인 불편함이 없고, 눈살 찌푸리는 사람들의 시선과 같은 심리적인 불편함도 없다. 배려와 존중이 깊이 뿌리내려 있는 사회적 분위기에 어느새 나는 익숙해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집 밖을 나설 수 있었던가. 영화 속 "공주"처럼 집안에 머무르는 것이 오히려 편한 걸까. 그래서 길에서 마주치는 일이 좀처럼 없는 걸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꺼끌 해진 마음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는 힘겹게 "미안해, 코리안"이라고 말했다.




순두부찌개에 도전하다

한국 영화를 보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 진다. 그 날 그는 냉장고를 살피다가 내가 사다 놓은 뚱뚱한 순두부 팩을 꺼냈다. 한식당에서 그가 가장 즐겨 먹곤 했던 순두부찌개의 맛을 더듬어 도전해보겠노라 했다.


나는 콩과 두부를 좋아하면서도 순두부찌개는 어쩐지 경주 여행을 갈 때만 챙겨 먹는 정도의 음식이었고, 그래서 집에서 만들어 본 적도 없었다. 반대로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회사 근처의 한국 식당에서 순두부찌개를 점심으로 먹었다. 작은 일인용 돌솥에서 아직도 보글보글 맛깔나게 끓어오르는 소리를 동영상에 담아 보내주기도 했고, 새로 생긴 식당의 맛을 비교 평가하고 싶을 때 주문하는 첫 메뉴이기도 했다.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그는 회사 근처의 단골 한국 식당들과 순두부찌개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인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문득 순두부가 내 눈에 띄었고,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비슷하게 맛을 내겠지 싶은 마음에 한 팩을 샀다. 그리고 그에게 선물처럼 쨔잔! 하고 내밀었을 때, 그의 눈은 반짝, 빛났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뚱뚱한 한국산 순두부 한 팩이 있을 뿐, 바지락도 조개도 새우도 없었고, 무엇보다 뚝배기가 없었다.


다시 시무룩하게 실망하는 그에게 나는 해산물 대신 삼겹살을 넣어도 괜찮다고 위로했지만, 뚝배기의 부재에 대해서는 딱히 대안이 없었다. 둘이서 멍하게 주방에 서서, "아마존으로 주문하면 내일 배달이 될까?" 싶어 뒤졌지만 배송 예정일을 확인하고 한숨이 났다. 폼이 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고 타협하면서 우리는 어니언 수프 전용 도자기 그릇을 꺼냈다. 우선 뚝배기 대신 냄비에다 순두부찌개를 끓인 뒤, 도자기 수프 그릇에 나누어 담고 그릇 째 예열된 오븐에 넣어 뜨겁게 데우자는 것이 계획이었다. 오븐에서 뚝배기처럼 뜨겁게 보글보글 끓어오르기를 기다렸다가, 꺼내자마자 날 계란을 터트려 올렸다. 잔열로 계란이 익어가는 동안 밥상을 차렸다.


역시, 많이 먹어 본 사람이 요리도 잘한다고 했던가. 난생처음 끓여본다는 그의 순두부찌개는 지금껏 내가 먹어 본 중에 가장 감칠맛이 돌고 담백해서 숟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당신보다 순두부찌개 맛은 더 잘 알잖아" 하면서 뿌듯해하던 그도, 그리웠던 순두부찌개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오븐에서 한참 동안 데웠지만, 도자기 그릇은 우리의 뚝배기처럼 그 열을 오래 품고 있지 못했다. 한인 마트에 뚝배기 쇼핑을 가기로 했다.




즉흥적으로 만든 순두부찌개로 밥 한 그릇을 든든히 먹고서, 우리는 그날 밤 오랜만에 노래방 타임을 가졌다. 나는 티브이 리모콘을 마이크 삼아 영화 <오아시스>에서 공주가 불렀던 "내가 만일"을 불렀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둥실둥실 춤을 추었다. 영화 속에서 공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유롭게, 마치 날아갈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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