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지 등갈비찜
"그런데, 고춧가루 어느 브랜드인지 기억해?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곧 다시 사야 할 것 같은데.."
한국 마트에서 샀던 태양초 고운 고춧가루를 스타벅스 커피통에 보관해두었고, 파스타 소스 유리병에는 엄마가 싸주신 귀한 고춧가루를 담아두었는데, 그는 그것이 엄마표인 것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기억하지, 우리 엄마가 주신 거.라고 대답해주었을 때 그의 표정은 한 대 얻어맞은 벙벙한 표정이었다.
몇 시간 후, 티브이를 보다가 문득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말한다.
"지금 심각해. 이멀전시 상태야. 엄마한테 구원 요청하자. 우리 이제 고춧가루도 떨어져 가고 김치도 없고, 어떡하냐고ㅠㅠ"
도대체 당신은, 무슨 피를 타고났길래, 한국인들도 그 맛이 그 맛인가 보다 하고 먹을 고추장, 고춧가루에까지 입이 까져있는 건가요.
하긴.. 국적이 의심스러운 그 섬세한(?) 입맛 덕분에, 엄마한테 얻어와서 꽁꽁 아껴두었던 마지막 묵은지 한 포기로 만든 김치찜에 밥을 말아먹으면서, 이게 정녕 마지막이란 말입니까!! 하며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김치 냉장고가 없으니, 냉장실 한편에 넣어두고 혹시나 쉬어 버리지 않을까 조바심이 나면서도 선뜻 마지막 엄마표 김치를 꺼내 먹을 용기가 나지는 않았었다. 그동안 나는 김치전을 종종 만들었고, 그는 우주 최강 김치찌개를 만들곤 했는데, 뭔가 새로운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어딘가에서, 등갈비 김치 찜이라는 게 세상 쉬운 요리라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여기는 질 좋은 등갈비 정도는 파운드에 5불이면 살 수 있는 고기 천국 미쿡 아니던가. 그래 그래, 최고급 묵은지의 화려한 피날레로 등갈비 김치찜을 해보자!! 마음을 먹고 마트에 갔을 때, 돼지고기 진열대 앞을 서성이며 나는 도무지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쭈뼛거리고 있었다.
둘 다 평소에 바비큐 소스 진득한 립을 전혀 즐기지 않지만, 그가 대뜸 "우으. 난 립 별론데. 사려고?" 말하는 순간, 확 서러워졌다. 내가 분명 며칠 전에 이러저러하여 이리저리 하게 등갈비를 사서 도전해보겠다 선언도 했건만. 이 남자는 내 말이 우습나.
이상하게 기분이 상해버린 나는 "됐어."하고 다음 섹션으로 카트를 옮겨 갔고, 그는 수북이 쌓여있는 등갈비 중에 적당한 것 하나를 골라왔다. 마침 세일도 하는데 사보자, 하면서.
나의 야심 찬 계획을 까맣게 잊은 듯한 그의 태도에 기분이 확 상하고 나니, 망설여졌다. 저렇게 등갈비 따위 취향이 아닌 사람에게, 내 마지막 묵은지를 헌정하여 만든 김치찜을 나누어먹자 권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하고. 시큰둥하게 대충 한 끼 먹고 나서, 냄비 가득 남은 것을 못 본 척한다면 너무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그건 마지막 묵은지에 대한 예의가 아닌데, 하며 혼자 끝없이 예민한 생각에 잠겼다. 별 거 아닌 것에 불쑥 울컥하기도 하는 걸 보니, 나에게도 코로나 블루가 왔다 갔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립을 올려놓고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시크한 척 어깨를 으쓱하고 주방에서 나왔다. 혼자 남겨진 그는 한참 동안 유튜브에서 김치찜 만들기와 백립 만들기를 들여다보는 것 같더니, 늦은 밤 양념에 고기 재워두기를 시작하였다. 김치찜에 도전해보자,라고.
다음 날 점심 식탁에서, 눈물겨운 마지막 묵은지 김치찜을 앞에 두고, 지금도 믿기지 않는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우리네 밥상머리 교육에 해당하는, 밥그릇에 밥풀 남기지 말고 야무지고 깨끗하게 먹기의 예절을 어린 시절부터 배웠을 리 만무한 그는, 언제나 적당히 숟가락 젓가락질로 먹을 수 있는 만큼 먹고 남는 건 그냥 남는 대로 식사를 끝내곤 했다. 밥상머리 교육 운운하며 잔소리하기는 싫어서 아무 말하지 않지만, 매번 테이블 건너편의 밥풀이 덕지덕지 붙은 그릇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쌀알 하나에도 농부의 땀이 배어 있다고, 복 나간다고 하시던 어른들의 말씀이 내 안에도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런 그가, 처음으로, 정말로 처음으로, 야무지게 국그릇을 한 손에 쥐고 마지막 한 톨의 쌀알까지 싹싹 끌어서 먹더니 마지막엔 그릇에 입을 대고 숟가락으로 쓸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삼켰다. 캬! 하고 그릇을 내려놓을 때의 그 만족스러운 표정은, "엄마표 마지막 묵은지"에 대한 아쉬움을 충분히 달래어줄 만큼 확실했다.
당신 도대체, 무슨 피를 타고난 거니.
생강을 넣은 것이 신의 한 수라며,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그는 "내일 먹으면 더 맛있겠다, 그치?" 라며 벌써 내일 점심이 기다려진단다. 내일은 육개장 국밥처럼 먹자고, 등갈비 뼈를 발라냈다.
밥그릇 싹싹 긁어먹는 광경은 다음 날에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었다. 행복함과 만족감이 먼저 찾아오고, 아쉬움과 두려움이 뒤에 찾아왔다.
감사하게도 한 달에 한 번씩 부모님이 마스크를 보내주신다. 우체국 택배로 2주 정도가 걸린다. 마스크 업무 만으로도 우체국이 마비 상태였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마스크 상자에 다른 물건은 연필 한 자루도 넣을 수 없다고 했단다.
김치, 깻잎 장아찌, 명이나물, 고추장, 고춧가루 먹고 싶어요, 보내주세요- 한 마디면 내가 묻지 않은 것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한 꾸러미 보내주실 우리 엄마다. 멀리에 살면, 그저 잘 챙겨 먹는 것만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부모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 한식을 만들어 먹은 날에는 일부러 예쁘게 사진도 찍어서 보내드리곤 한다. 엄마가 해주시던 맛 기억을 더듬어서 만들었다고, 엄마표만큼 맛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은 고추장 고춧가루 김치 덕분에 흉내는 낼 수 있다고, 전해드리면 우리 엄마는 오히려, 잘 챙겨 먹고 잘 지내주어 고맙다, 고 말씀하신다.
한국에 가는 것도, 미국에 오는 것도, 택배를 주고받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지금, 조만간 고추장과 고춧가루까지 바닥나면, 더욱 한국이 그리워질 것 같다. 엄마 밥이 그리워질 것 같다. 최근에 마트에서 사 온 김치가, 배추는 너무 짜고 양념은 건성으로 버무려져 있어서, 그래서 괜히 더 서러운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