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매시 버거
햄버거의 나라, 미국에 살기 전에는 몰랐던 것, 두 가지.
맛있는 햄버거는 유명한 패스트푸드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인생 첫 햄버거는 롯데리아 치즈버거였다. 그 뒤로 KFC의 치킨을 더 사랑하는 학창 시절을 보냈고, 성인이 되고부터는 맥도널드나 버거킹 같은 패스트푸드 점에는 거의 갈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햄버거에 그다지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더 들어서는, 미 서부를 여행하면 인 앤 아웃을, 미 동부 여행에서는 파이브 가이즈나 쉑쉑 버거를 먹어야 한다는 상식도 갖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전에 몰랐던 신비로운 맛을 알게 되었다거나 그렇지는 않더라. 처음으로 햄버거가 맛있는 음식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제주 신라 수영장에서였고, 부산 오킴스의 프레지던트 버거가 그 뒤를 잇는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3만 원 치의 값어치를 하느냐고 물으면 사실은 글쎄다, 싶어지기도 한다.
아무튼 햄버거의 나라, 미국에 이사를 와서도 그다지 햄버거를 먹어봐야지! 생각은 들지 않았더랬다. 어느 주말 오후에, 다운타운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작은 시골 마을의 중심가에 처음으로 나갔던 날, 그는 Brighton Bar and Grill에서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이 동네 넘버원 버거를 소개해주고 싶다면서.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시골의 동네마다 동네 이름을 딴 Bar and Grill이 있는데, 이런 곳에서 먹는 기본 버거가, 인 앤 아웃 쉑쉑 파이브 가이즈 레드 로빈스 슈퍼 두퍼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맛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제주 신라처럼 사악한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제야, 아.. 이래서 미국이 햄버거의 나라이구나, 무릎을 쳤더랬다. 햄버거 안에 들어가는 소고기 패티를 "버거"라고 부른다. 즉, 버거 맛의 중심은 고기에 있다는 것. 그런 고기의 신선함과 퀄리티를 생각하면, 프랜차이즈에서 대량으로 다루는 것보다, 동네 레스토랑의 그것이 훨씬 맛있을 확률이 높은 것.
그때부터 식사 메뉴를 볼 때, 예전에는 그냥 건너 뛰곤 했던 햄버거 섹션도 눈여겨 본다. 그렇게 가끔씩 고기 맛 듬직한 동네 식당 버거를 즐기고 있다. 아직까지 맥도날드나 버거킹에는 가본 적이 없고, 동네에 레드 로빈스와 파이브 가이즈가 있긴 하지만 한 번 가본 뒤로는 있어도 없는 식당처럼 지나치게 되었다.
심플 이즈 베스트!
개취 존중의 나라,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음식을 커스터마이즈 할 수 있는데, 버거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입맛에 맞게 버거 속재료를 모두 고를 수 있다. 하나하나 선택하기 귀찮은, 그다지 까탈스럽게 굴 필요 없는 한국인들의 경우, 에브리띵! 을 외쳐라 조언하는 글도 종종 보았다.
하지만..
Simple is best, 원리가 버거에도 적용이 된다. 기가 막히게.
"생일날, 뭐 먹고 싶은지 슬슬 생각해둬."
코로나 셧다운이 두 달째 접어드는 즈음에 내 생일이 있었다. 생일상 희망사항이라면 프렌치 풀코스 부럽지 않게 차려줄 셰프라는 걸 알았지만, 안성맞춤이다 싶게 떠오른 메뉴는 "버거"였다. 그는 "니가 버거를 먹고 싶다고?" 하는 의외다 싶은 표정이었지만, 쥬시한 패티 꾹꾹 눌러 감자튀김과 먹고 싶다고 설득했더니, 금세 좋았어! 하고 외친다.
"그럼 조금 특별하게 주시 루시 Jucy Lucy 버거로 만들어줄게!" 라며 티브이에서 소개되었던 식당과 유튜브 영상을 찾아서 보여 주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시 루시 버거는 소고기 패티 가운데에 치즈를 잔뜩 넣어서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치즈가 주르륵- 흐르는, 사진만 보아도 입맛 다셔지는 그런 버거였다. 사실은 패티를 두 장 만들고 가운데 치즈를 가두어 만두피 여미듯 두 패티를 잘 이어주는 거라서, 양도 어마 무시하다. 다른 재료 필요 없이, 번+치즈 패티+마요네즈, 끝.
그렇게 심플한 기본 버거 만들기에 동의했지만, 그래도 생일날이니 원하는 재료가 있으면 넣어주겠다고 말해보라 한다. 그래서 추가하기로 한 것은, 양파와 피클. 브리오슈 번을 오븐에 살짝 토스트 하고, 마요네즈, 머스터드를 발라준다. 얇게 썬 딜 피클을 올리고, 공격적으로 거대한 치즈 가득 소고기 패티를 얹는다. 그 위에 볶은 양파를 얹고 뚜껑을 덮는다.
한 입에 배어 물기조차 어려운 거대한 버거가 되고 말았지만, 토마토 양상추 할라페뇨 버섯 등등등의 부재료가 필요하지 않음을 경험했다. 심플 이즈 베스트!
쥬시 루시 버거를 만들기로 했던 생일날 오후, 그는 한참 동안 COOKING LAB 책을 들여다보며 버거에 대해 이것저것 공부를 했다. 소고기는 최대한 주물럭주물럭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포시 모양새를 잡아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쪽 면을 익히고 뒤집어 주는 타이밍에 따라 결과물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사진도 들여다보고, 패티를 꾹 눌러주는 타이밍에 대해서도 익혔다. 그렇게 책에서부터 영감을 받은 그는, 점심으로 먹은 쥬시 루시 버거가 소화된 늦은 밤, 야식을 만들기로 하였다. 더욱 간단한, 스매시 버거. 책에서는 동부의 유명 체인 셰이크 쉑도 스매시 공법으로 만드는 거라고 했다.
시험 삼아서 한 개를 만들어 반으로 나누어 먹은 뒤, 우리는 두 손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면서, 사실은 쥬시 루시보다 훨씬 맛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 뒤로 두어 번 더, 스매시 버거를 만들었다.
1. 양파를 채 썰어 반으로 나눈다. 반은 볶은 양파로, 반은 프레시한 그대로 버거에 넣을 예정.
2. 피클이나 베이컨을 얹고 싶으면 미리 준비한다.
3. 소고기 다짐육은 미리 모양을 만들지 않고, 최대한 힘을 빼고 살포시 들어 올려 예열된 팬에 올린다.
4. 스매시 버거의 포인트! 소고기를 팬에 올리자마자, 작은 무쇠 프라이팬 같은 묵직하고 평평한 것을 이용해서, 곧바로 잽싸게 꾹 눌러 준다. 과감하게, 있는 힘껏 꾸욱!
5. 소금과 후추로 살짝 간을 맞춘다.
6. 같은 팬의 한편에 양파를 익힌다.
7. 버거를 뒤집고 치즈를 올려 녹인다. 아메리칸 치즈 슬라이스 두 장씩!
8. 브리오슈 번에 버터를 발라 오븐에 살짝 구워내고, 한쪽에 머스터드 한쪽에 마요네즈를 바른다.
9. 조립: 번+머스터드+피클+생 양파+소고기 패티+치즈+볶은 양파+(베이컨)+마요네즈+번.
그렇다. 토마토 양상추,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없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러니까,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미국을 여행할 수 있는 때가 오면.. 패스트푸드 체인점에 줄 서는 대신, 호텔 근처 펍에서 토마토 양상추 빼고 두툼한 고기 맛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기본 버거를 꼭 경험해보시라는 이야기. 로컬들만 찾아가는 동네 숨은 맛집!이라고 어디다 자랑하고 싶어질, 그런 경험을 하게 될 확률.... 아주 높다..!
코로나로 식당은 물론 백화점과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았기에, 그는 내 생일이 다가오는 것이 영 불편해 보였다. "가게들이 모두 닫았으니, 당신 생일 선물 사는 건 완전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어"라고 미리 선전 포고를 해댔다. 그렇지 않아도 쇼핑을 싫어하는 사람이 좋은 핑곗거리 하나 생겼구나 싶어서 웃어넘겼다. 사실 특별히 기대하는 선물은 없었다. 우리는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것 또는 필요한 것"을 미리 알려 주는 대신, 서프라이즈처럼 선물하는 사람이 알아서 고르는 것이 더 로맨틱하다고 여기고 있기에, 모든 가게가 문을 닫은 이 시점에 별다른 기대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나의 여동생이 보내 준 생일 선물 택배가 도착한 날, 그는 "나는 이제 망했다" 비슷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그 날 오후 그는 혹시나 나에게 들킬까 싶어서 반경 10미터 이내 접근 금지 요청을 사뭇 진지하게 하면서, 인터넷 쇼핑을 뒤적대었다. "힌트 좀 줄까?" 하고 물어봤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래서 나는 굳이 그에게 설명해야 했다. 내 생일날, 생일 기념으로 같이 버거를 만들어 먹었으면 좋겠어. 뒷마당에 내어 둔 가스 그릴에 구워도 좋고, 프라이팬에 구워도 좋아. 같이 장을 봐서, 코로나 때문에 한참 동안 먹지 못한 감자튀김을 곁들인 버거를 만들어 먹으면, 그게 나에겐 최고의 생일 선물이 될 거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