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코를 먹으면
휴가 온 기분이 난다

화요일에는 타코

by TwoHearted
"저희도 루미큐브 한 세트 샀어요!"

짐 할아버지와 테리 할머니는 코로나가 미국에 퍼지기 직전에 다녀온 카리브해 크루즈에서 우연히 만난 커플이다. "어디까지 가봤니?" 테마로 전 세계의 도시와 역사에 관한 퀴즈 대회가 있던 크루즈 첫날 밤, 옆 자리에 앉아 있던 테리 할머니가 아주 폼나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세상 안 가 본 곳이 없어"라고. 크루즈에서 만난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가 당당히 말씀하시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장난기 발동한 그는 이곳저곳 이름을 대며 "설마 여기는 안가보셨죠?"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한바탕 유쾌하게 퀴즈를 즐긴 뒤에, 그 즐거움이면 충분하다 싶은 듯 아무도 우승과 경품에 집착하지 않는 쿨한 분위기를 뒤로 하고 이벤트홀을 나섰다. 그때, 할머니가 "나는 테리 Terrie라고 해, 여기는 짐 Jim이고" 악수를 청했다. 좋은 밤 보내세요! 인사하고 돌아설 때에는 몰랐다. 장장 300미터가 넘는 그 넓은 크루즈에서 매일 우연히 그들과 마주치게 될 줄은.


세 번째로 테리 할머니를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를 루미큐브 게임에 초대했다. 루미큐브를 처음 해보는 그를 위해 두 분은 간결하고 정확하게 규칙을 설명해주었고, 같이 게임을 하면서 전략도 공유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퇴직 후 시간이 잉여 로우니 일주일 짜리 크루즈를 연달아 한 달씩 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플로리다에서 출발해서 동카리브를 돌아보고 다시 플로리다에 돌아오면, 그 날 오후에 서카리브로 출발하는 크루즈를 타는 거다. 그리고 돌아오면 다시 남카리브로 떠나고. 그래서 그들은 기항지에 도착해도 이미 예전에 다 둘러본 곳들이라 배에서 내리지 않고 도서관 옆 라운지에서 루미큐브 게임을 즐긴다고 했다.

짐과 테리 두 사람은 부부가 아니라, 친구 같은 연인이었다. 각자의 파트너를 잃고, 그 쓸쓸함을 달래 준 새로운 파트너. 테리 할머니는 짐 할아버지가 같이 여행하기에 제일 꿍짝이 잘 맞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점잖은 분위기의 짐 할아버지는 미소로 할머니의 말에 동의했다. 어른들에게 애교스러운 그가 두 분을 내내 웃게 만들었고, 그들은 또다시 루미큐브 게임에 초대하겠다고,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했다.





크루즈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코로나가 미국 전역으로 퍼졌고, 내가 사는 주에서도 자택 대기 명령 Stay-at-Home Order이 떨어졌다. 처음 3주간의 명령이 내려졌을 때는, 느긋하게 괜찮을 거야 믿었다. 3주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 번 자택 대기명령이 2주씩, 3주씩 연장에 들어간다는 주지사의 발표가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지쳐갔다. 코로나 이 전에도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 있었지만, 해질 무렵 동네 펍이나 피자 집에 가서 한두 시간 먹고 마시며 잡담을 나누던 소소한 기분 전환을 할 수 없는 답답함이 쌓여갔다. "집에서 놀 거리를 찾아보자" 궁리하던 중에 문득 보드게임 루미큐브가 떠올랐다. 크루즈의 후미에서 대서양 먼바다를 앞에 두고 우리 둘이서 즐기기도 했고, 재즈바 근처의 안락한 라운지에서 짐과 테리를 만나 넷이서 즐기기도 했던. "그래, 루미큐브를 사자."


며칠 만에 배송되어 온 그것을 거실 바닥에 펼쳐 놓고, 진지하게 집중해서 게임을 하고 나면 두어 시간은 훌쩍 흘러버린다. 그는 수학 퀴즈에 있어서 만큼은 나를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여기기 때문에, 본인 차례가 되면 무슨 초인적인 집중력을 끌어모으는 것처럼 뚫어지게 게임 판을 쳐다보면서 골똘히 생각한다. 어차피 이기고 지는 것보다, 깊이 전략을 생각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게임이니 나는 느긋하게 티브이도 보고 음악도 들으며 그의 시간을 기다려준다. 다행히도, 우리 둘의 실력이 비슷해서 그가 이길 때도 있고 내가 이길 때도 있다. 그래서 게임이 시들해지지 않고, 따분한 저녁이면 "게임 한 판 할까?" 하고 자연스레 바닥에 판을 벌이곤 한다.


크루즈에서 즐기던 것과 똑같은 빨간 틴 상자의 루미큐브가 집으로 배달되어 온 날, 문득 테리 할머니와 짐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건강히 잘 계시겠지?"라고, "집에서 루미큐브 게임하고 계시지 않을까?"라고 궁금해하다가 우리는 그들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냈다. "저희도 루미큐브 한 세트 샀어요!"하고 자랑도 했다.


"하하. 마침 우리도 지금 게임하던 중이야"라고, 잘 지내고 있다는 답을 받고서 기분이 좋아졌다. 여행 궁합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는,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 안에 갇혀 있을 때에도 서로를 배려하면서 슬기로운 생활을 해낼 것만 같다. 그렇게 두 분이 쓸쓸하지 않은 격리 생활을 보내고 계셔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휴가 기분 내고 싶을 때, 멕시코 음식을

미국으로 오면서 기대했던 것 중의 하나는 "멕시칸 주인이 제대로 만들어 주는 타코 레스토랑이 동네마다 하나씩 있겠지!"였다. 한국에서는 타코가 먹고 싶을 때 연남동의 조그만 식당 베무쵸 B-mucho까지 가야 했다. 그 때마다, 미국에는 멕시코 사람들이 많이 살 테니 타코 트럭과 멕시칸 식당을 원 없이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내 마음대로 상상했더랬다. 하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모든 동네에 허름한 멕시칸 레스토랑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에는 평범한 맛의 프랜차이즈식당만 종류별로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옆 옆 동네까지 타코 트럭이나 진짜 멕시칸이 운영한다는 식당을 찾아다녀 봤지만 아직까지도 어느 한 곳, 연남동의 베무쵸보다 맛있는 집을 찾지 못했다.


자연스럽게도 미국 국내 여행을 다닐 때마다 그 지역의 멕시칸 식당을 제일 먼저 찾아보게 되었고, 그렇게 타코와 포졸레, 살사와 콘 퀘소, 과카몰레 등을 잔뜩 주문해서 신나게 먹고 마시는 것으로 휴가 첫 날을 보내곤 했다. 심지어, 멕시코와 가까이 있는 샌디에고에 갔을 때에는, 매일매일 하루 한 끼는 타코였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반대로 타코를 생각하면 휴가 기분이 난다. 그가 "내일은 타코 만들까?" 물어오면, 머릿속은 온통 (가본 적도 없는) 칸쿤의 카리브해, 진한 마가리타, 쏟아지는 햇살 같은 꿈같은 장면들로 가득 차고, 휴가 때마다 깔깔대며 신나게 웃던 우리 모습이 겹쳐 보이면서, 이내 기분이 들뜬다. "Yes, yes, yes!!!"




화요일에는 타코, 타코에는 모델로 니그로

코로나 격리 생활이 길어지면서 크고 작은 행사, 기념일 같은 것들은 모두 취소되고, 심지어 요일 감각도 무뎌질 만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매일매일이 월요일 같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매일매일이 주말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오늘 무슨 요일이야?"라고 확인할 일도 별로 없는 지루한 날들. 그래서 가끔 우리는 굳이 핑계를 만들어 "오늘은 화요일이니까, 타코 파티 하자"라고 우리에게 휴가 기분을 선물한다.


옛날 옛적, 어느 타코 체인 레스토랑이 프로모션으로 내 걸었던 "Taco Twosday"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아무튼 멕시칸 레스토랑이든 동네 펍이든 타코를 파는 곳이면 "Taco Tuesday" 할인 이벤트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화요일에는 타코"라는 연결 고리가 생긴 것 같다. 덕분에 핑곗거리를 찾은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돼지고기 어깻살을 무쇠 솥에 삶는다. 서너 시간 즈음 고기가 흐드러지도록 푹 삶고 각종 시즈닝으로 볶아낸 돼지고기 carnitas가 준비되면, 그때부터 화요일의 타코 파티가 시작된다.


할라페뇨, 양파, 아보카도, 실란트로, 라임을 먹기 좋게 잘라서 준비하고, 작은 팬에 콘 또띠야를 앞뒤로 구워낸다. 때때로, 블랙빈이나 멕시칸 라이스를 곁들여 만들기도 하고, 수제 살사 베르데 salsa verde를 만들기도 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식탁에 앉으면서 냉장고에서 멕시코 흑맥주인 모델로 니그로 Modelo Negra를 꺼내어 온다. 어쩐지 멕시코 음식을 먹을 때는 멕시코 코카 콜라나 멕시코 맥주를 마셔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타코를 먹기로 한 날이면 미리 냉장고에 준비해 두곤 한다.


정통 멕시코 스트리트 타코의 경우, 작은 콘 또띠야를 두 장 겹쳐서 타코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석이라고 한다. 그렇게 내어주는 레스토랑에 가면 "오오~"하고 감탄하며 좋아하긴 하지만, 사실 집에서 먹을 때는 두 겹씩 또띠아를 먹으면 너무 배가 불러서 한 장씩 만들어 먹는다. 양껏 푸짐하게 재료를 올려 타코 하나를 만들고, 모델로 니그로를 짠! 건배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격리 생활의 어느 오후가 특별하게 느껴진다. 샌디에고의 올드 타운이 느껴지고, 키웨스트의 바다가 느껴지고, 카리브 크루즈의 바람이 느껴져서, 으음~ 하고 눈을 감고 음미한다.




다음 여행을 언제 어디로 갈 수 있을지, 아무것도 미리 계획할 수 없는 것이 처음에는 답답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익숙해지고 있다. "코로나가 끝나면..."으로 시작되는 상상을 너무 남발해서 괜히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조금은 그 빈도수를 의식하면서, 우리는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코로나가 끝나고 편안한 여행을 다시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키웨스트에도 샌디에고에도 뉴올리언스에도 멕시코에도 꼭 다시 가보자고 약속한다. 그때까지는 이렇게 집에서, 화요일의 타코 파티로 마음을 달래자고 서로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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