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 라이스
문득, "다음 날 먹는 카레가 제일 맛있지" 라던 만화 한 컷이 떠오른 날이었다.
유통기한이 다가오고 있는 일본 고형 카레를 꺼냈다. "셰프님, 오늘은 치킨 커리로 하시지요."
회사 근처 줄 서서 들어가야 하는 일식집에서 점심을 먹을 때면 무조건 "커리우동+튜나롤"을 고집하는 그는, 정작 일본식 카레를 직접 만들어본 적은 없다고 했다.
처음 카레를 만들어보는 설렘으로, 그는 오전일을 하는 중간중간에, 대여섯 개의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카레 만들기의 기본 원리와 다양한 변형에 대해서 감을 잡았다. 만들어본 적 없는 요리를 영상으로 배울 때에도,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부분과 적당히 대체해도 되는 부분을 귀신같이 빨리 알아챈 뒤 자신의 스타일로 적절히 재해석하는 효율적 사고력은 뺏어오고 싶을 만큼 부럽다. 머릿속에서 요리 재료, 순서, 방법이 정리되면, 그때부터는 컴퓨터를 끄고 자신의 감각을 믿으며 요리를 시작한다. 알렉사 스피커로 좋아하는 음악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부르기도 하면서. 그렇게 난생처음 만들어보았다는 그의 치킨카레는, 신기하게도, 첫날부터 바로 "다음 날 먹는 카레"의 깊은 맛이 났다. 그리고 실제로 그다음 날에는 더욱 깊고 달콤한 맛이 났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어느 오후, 햇살 좋았던 독일에서의 산책을 회상하면서 슈니츨과 스패츨레를 같이 만들었다.
독일에 머무를 때면 꼭 찾아가는 식당이 있다. 슈니츨이 세숫대야만큼 커서 감자 샐러드나 스패츨레 사이드와 함께 둘이 나누어먹으면 배부른 곳. 파울라너 한 잔 마시면서 웃고 울던, 이런저런 추억이 많은 곳이다. 언제 다시 가 보려나 쓸쓸한 마음이 들어서, 그리움 담아 집에서 만들어보기로 한 거다. 수타 스패츨레를 만들 수 있는 도구가 없어서 어찌저찌 급조했지만 맛은 그럴듯했다.
해동시킨 돼지고기가 네 조각이라서, 일단 네 개의 커틀릿을 만들었더랬다. 나머지 두 개는 내일 데워서 먹자, 하고.
다음 날, 남은 슈니츨을 어떻게 먹을까 회의하던 중, 불쑥 돈카츠 카레가 떠올랐다. 지난주 카레 만들기가 생각보다 쉬웠고, 만족스러웠던 셰프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한 번 해봤으니 유튜브를 다시 볼 필요도 없이. 슈니츨을 얹어 먹을 테니, 다른 고기류를 넣지 않고 감자 당근 양파만 넣은 기본 카레를 뚝딱 만들어냈다. 그는 내일까지 먹어야지 하는 심산으로, 4인분의 카레를 만들었고, 더 먹고 싶은 나의 식욕을 다스려, 절반치 카레를 다음 날을 위해 고이 재워두었다.
그리고 다음 날, 걸쭉해진 카레를 들여다보며 셰프는 "근데 우리 이제 슈니츨이 없는데." 하고 시무룩해졌다.
냉동실을 뒤적여 슈니츨을 만들 때 따로 떼어두었던 돼지고기 목살 두 조각을 꺼내 놓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번엔 튀기지 말고 간장 베이스로 볶아보겠어- 라며, 센 불에 촤르르 휙휙 손목 스냅 화려하게 카레 고명용 돼지고기를 만들었다.
코로나 셧다운으로 집에서 매일의 끼니를 해결하게 되고부터, 이틀씩 같은 음식을 먹는 일이 많아졌다. 코로나 이전의 우리는 주중에는 간단하게, 주말에는 제대로 된 요리를 하곤 했다. 그때는, 아무리 꿀맛처럼 맛있게 먹은 음식이라도, 이틀을 연달아 먹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남은 음식은 내가 점심 도시락으로 적절히 변신시켜 챙겨가거나, 며칠 뒤에 데워서 나누어 먹거나 그랬다.
레스토랑의 테이크아웃 옵션도 걱정하려들면 코로나로부터 그다지 안전할 것 같지는 않아서, 매일 그 날의 식사를 집에서 스스로 챙겨야 하는 날들이 길어지다 보니, 서너 시간씩 주방에서 보내곤 하던 주말의 쿠킹 데이트를 매일 하는 것에 지치는 것도 당연한 일. 한 번 요리를 할 때, 다음 날까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데워서 먹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남은 음식을 어떻게 활용해서 새로운 한 끼를 만들어 낼까 고민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예를 들면,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남은 나물이 있었다. 나는 일 인분 정도 될 듯한 나물을 그대로 넣고 한 그릇의 점심 비빔밥을 만들어 나누어먹으면 되겠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오믈렛을 만들어볼까 봐,라고 했다. 한국 일본에서 친숙한 "오므라이스"를 알 리 없는 그는, 나물 오믈렛을 만들고 그 안에 간장에 비벼낸 남은 밥을 넣어 반으로 접겠다고 했다. 마땅한 이름도 족보도 없는 오믈렛도 아닌 오므라이스도 아닌 것에다, 시라차 소스 찌이익 뿌려서 나누어먹었다. 비빔밥 맛도 나고, 오므라이스 맛도 나고, 계란밥 맛도 나고, 태국식 오믈렛 맛도 나서 재밌었다.
오늘 저녁에 먹을 음식도 어제부터 정해져있었다. 어제 우리는 얇게 썬 소고기와 양파 버섯 페퍼 잔뜩 넣고 필리 치즈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으면서, 오늘을 위해 소고기 볶음을 절반쯤 따로 챙겨두었다. 오늘은 일찍부터 당면을 불려놓았으니, 곧 어제의 소고기 볶음은 오늘의 잡채밥으로 변신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