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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Dec 02. 2020

눈 오는 날의 모순

지나치게 야심 찬 것을 알면서도 새벽 여섯 시 반에 울리도록 알람을 맞추어 놓고, 그것이 울리면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다는 듯이 취소 버튼을 누르며 이불속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해가 뜨기 직전의, 반쯤 꿈속을 헤매며 반쯤 현실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나른하고 달달한 선잠을 방해하는 기분이 들어서 알람 소리가 얄미우면서도, 굳이 매일 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지 다짐하는 모순이 아직 나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도 상반신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가, 다시 그대로 베개 위로 고꾸라지며 머리 위로 포근한 이불을 끌어올려 나른함을 조금 더 즐기기로 했다. 매번 그런 식이다. 먼저 일어난 그가 올려놓은 모카 팟에 커피가 끓어오를 때까지만 이러고 있자,라고 혼자서 다짐한다. 그러면 5분 정도의 달콤한 시간을 번 것 같은 합리화에 기분이 좋아진다. 더 자라고 그가 방 문을 닫아주려고 하면 굳이 마다하면서, 딱 5분만, 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한 시간이 된 적도, 두 시간이 된 적도 많지만, 어쨌든 의도는, 커피가 끓어오를 때까지만, 이다.   


"어제보다 눈이 많이 왔구나, 길이 하얗게 덮였네."


커피를 준비하면서 창밖을 내다본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이 침대 위의 내 귀에까지 날아왔고, 나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앉아 침대 발치에 놓인 두터운 수면 양말에 두 발을 집어넣었다. 눈이 오는 것이, 이렇게 가슴 설레며 기쁜 일이었던가. 새삼 내 마음이 낯설다.





조금 과장해서 일 년의 절반이 겨울이라는 미국 북부로 이사를 오게 되었을 때, 이 곳의 여름과 가을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지에 대해서는 미처 듣지도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사를 준비하던 한국에서부터 유일한 걱정은 눈이었다. 눈이 그렇게 많이 오면 운전은 어떻게 하나, 밖에 나갈 수는 있나, 학교는 어떻게 가나.


한국에서는 눈이 오는 아침이면 집에 차를 두고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이용했다. 눈이 내렸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을 것 같은 도로에서, 내 차가 좌우로 휘청이며 핸들로 통제가 되지 않았던 단 몇 초의 경험이 나를 겁먹게 했었다. 그래서 화사한 봄날에 미국으로 이사를 와서, 생각지도 못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름과 가을을 겪으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줄곧 곧 다가올 겨울과 눈에 대한 걱정이 가시지 않았더랬다.


밤새 내린 하얀 눈이 반사되어 창문에 드리워진 블라인드가 유난히 환하게 빛나는 아침이면, 설렘보다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밖을 확인하곤 했다. 지금쯤 큰 도로는 눈이 다 치워져 있을까, 도로에 사고가 나 있지는 않을까, 평소보다 일찍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가는 길에 카페에 잠시 들를 시간이 될까, 이런 계산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운전하는 내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정작 학교에 도착해서는 진이 다 빠지곤 했다.


긴긴 겨울 동안 나는, 겨울 왕국처럼 온 세상이 눈부시게 하얀 풍경을 아름답다고 감탄하기보다, 낯설고 두렵다는 생각에 더 깊이 빠져 있었다. 사륜구동 자동차의 그립감 확실한 타이어에 의지하며,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새벽 내내 기가 막히게 제설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조금씩 눈 오는 날의 운전에 익숙해져 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눈 내리는 아침이면, 우와! 하는 탄성보다 휴우~ 하고 한숨이 먼저 터져 나오곤 했다.





오전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두를 필요가 없어진,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대체된 요즘, 11월부터 슬그머니 언제쯤 눈이 오려나 궁금해졌다. 유독 가을이 천천히 물들어갔던 올 해는 겨울도 천천히 오는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어리둥절하게 영하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씩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는 기분이 들만큼 천천히. 계절의 밀당이 참으로 로맨틱하다, 고 생각하면서 기꺼이 밀당에 마음을 내어주리라 생각한다.


11월의 마지막 날과 12월의 첫날, 흩뿌리듯 옅은 눈이 하루 온종일 내린다. 온 집안의 블라인드를 모두 걷어 올려 창밖의 세상을 감상한다. 커피도 마시고, 재즈도 듣고, 한글로 쓰인 소설과 에세이도 읽고, 군것질도 하고, 눈 내리는 바깥 풍경과 레이블이 잘 어울린다는 이유만으로 로컬 양조장의 겨울 한정 밀맥주 한 병을 따기도 하고, 더치 오븐 한 가득 버섯과 브리 치즈를 넣어 크리미 한 머시룸 수프를 끓여 바게트 빵을 곁들여 먹기도 하고, 브런치의 글도 읽으면서, 온종일 눈이 내리는 바깥세상을 바라본다.


눈이 내리면 자동 반사적으로 운전을 걱정하던 지난겨울들의 내 마음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눈이 내리면 자동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튀어나와 우와! 하고 눈부신 풍경을 감상하면서, 여름 가을 못지않게 겨울도 아름다운 곳이었어, 생각하고 만다. 하루 종일 파자마를 입고서.





지난겨울들의 나는, 눈 오는 것을 정말 싫어했던 걸까. 코로나의 위험이 모두 사라져서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로 출근을 해야 했다면, 여전히 눈 오는 날을 두려워하고 있을까. 창문 너머의 세계로 나갈 때와, 창문 안쪽의 세계에 머무를 때의 마음이, 이렇게 모순적이다.


변태 같지만, 그런 모순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 오늘 밤에도 알람을 맞추며 "내일은 일찍 일어날 수 있을 거야" 기대하고, 내일 아침이면 해가 뜨기 전에 알람이 울릴 것이고, "5분만 더" 합리화하면서 이불속을 서성일 테고, 그러다 오늘도 눈이 오려나 궁금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 볼 것이다. 군고구마에 김치를 얹어 먹으면서, 계절의 밀당에 마음을 모두 내어 주고서, 눈길에 운전하던 식은땀 따위, 애초에 모르는 일인 것처럼, 눈 오는 날을 만끽할 것이다. 하루 종일 파자마를 입고서.




코로나가 가져온 정말 몇 안 되는 좋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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