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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Dec 20. 2022

따로 또 같이, 여행

미국 시카고


그 해 12월, 나는 한참 동안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춤을 추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꽃 이외의 모든 것은 정물화처럼 고요했던 거실의 차분한 공기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누가 봤다면 그저 하릴없이 멍하게 앉아있는 모양새였겠지만, 내 마음속은 갈팡질팡 어수선했다.


학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연말 휴가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잉여로운 시간을 앞두고 있었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 파자마 입고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댈 거야."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으면서 이제 와서 삼일 만에 빈둥대는 것도 지루해져 버리다니. 다시없을 시간적 여유를 어쩐지 낭비하는 것만 같아서, 가까운 시카고에라도 나가서 기분 전환을 하고 올까 싶었다.


하지만 원래도 장거리 운전을 싫어하는데, 혼자서 힘들게 운전해서 갔다가 괜히 사서 고생한다며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도 미술관 둘러보고 오케스트라 공연 보는 건 어차피 개인적인 감상의 시간이니 상관없지 않을까. 하지만 구스 아일랜드 브루어리도 가보고 싶고 재즈 와인바도 가고 싶은데 혼자서 흥이 날까. 5분에 한 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 귀찮은데 집에서 쉬자. 아니야, 가깝다는 이유로 미루다가 영영 시카고에 못 가볼지도 몰라. 그래, 시내에서는 차도 막힐 텐데 운전하기 싫어. 아니지, 오케스트라 홀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면서 드라마틱했던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도 나름 의미 있지 않겠어?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오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스마트폰의 호텔 예약 앱에서 적당한 방을 하나 찾아 결제했다. 확인 메일을 받고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 취소 불가다. 벽난로의 타닥타닥 장작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던 착각은 어쩌면 콩닥콩닥 뛰는 내 심장 소리가 함께 들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도에서 운전 경로를 여러 번 확인하고, 간소하게 짐을 챙겼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눈부셔 선글라스를 꺼내어 쓰고 시카고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밤을 새울 기세로 고민하던 시간이 머쓱해질 만큼, 운전대를 잡은 그 순간의 나 자신이 멋있어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미시건 호숫가를 따라 한참 달리다가 이름도 모를 작은 비치에 들러 잠시 쉬기로 했다. 겨울이라고 하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햇볕이 강렬해서 코트는 차에 벗어 두고 나가, 바다 같은 호수를 향해 기지개를 켰다. 현기증이 일었다. 비행기를 타는 것도 아니고 차로 갈 수 있는 가까운 시카고에서 고작 세 밤을 자고 오는 여행이, 그토록 망설이며 고민할 일이었던가. 혼자인 여행이 처음인 것도 아니면서.


풋풋했던 이십 대 시절 첫 유럽 여행도 혼자 떠났고, '한 달 살기'라는 말이 없던 시절에도 방학 한 달을 꽉꽉 채워 어느 도시의 조그만 아파트를 빌려 지내곤 했던 여행들도 모두 혼자였다. 뿐만 아니라, 혼자 운전해서 다닌 국내 여행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 있음이 분명한, 목요일에 태어난 아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언제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던 예전의 나를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혼자인 여행이 아무렇지 않았을까, 아니면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강행했을까, 혼자서 떠나는 여행을 마음먹던 순간들의 기분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그와 함께 하는 여행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걸까. 오랜 기억 속의 나는 여전히 내가 아는 나지만, 너무 먼 기억인 듯 낯설기도 했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둘이 아닌 혼자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일이. 갑자기, 몸도 마음도 더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혼자 떠나는 시카고 여행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작지만 전망이 화려한 방이었다. 혼자서 잠만 잘 텐데 싶어서 60불짜리 저렴한 호텔을 골라 예약했는데, 정면으로 쳐다보기에 반가운 이름은 아니었어도 TRUMP 빌딩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자리라 여기저기 걸어 다니기에 더없이 좋은 위치였다. 심지어 오묘한 푸른빛의 강과 그 위로 빼곡한 다리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을 주다니, 인심도 좋군! 싶었다. 첫날 히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 같아 프런트 데스크에 내려가 확인하면서, 이런 일을 그에게 맡기지 않고 내가 스스로 해결하고 있음이 기특해서, 혼자인 외로움보다는 독립적 자유인이라는 기분에 도취되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고소한 라떼를 만들어주는 작은 카페를 세 군데나 발견했고, 그래서 마지막 아침의 마지막 커피를 마실 곳을 결정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오며 가며 백화점이나 쇼핑몰의 할인 코너를 뒤적이다가 심봤다! 수준으로 할인 중인 디자이너 브랜드 옷들을 발견하는 일도 소소한 기쁨이었다. 입어보고 사진도 찍어 보고 다른 스타일과 비교도 해보고, 대박 할인이라고 무조건 사지는 않을 거라며 짐짓 현명한 소비자인 척도 해봤다. 그래도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미국 3대 미술관 중의 하나라는 시카고 미술관에서 이전에 본 적 없는 고흐의 몇몇 작품들과 쇠라의 점묘화를 본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고 점심을 건너뛰어도 배가 불렀다. 현대미술관에 갔던 날에는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직원이 출근해 문을 열 때까지 하릴없이 계단에 앉아 있기도 했다. 시간이 비는데 어디 갈래? 뭐 할래? 물어보고 결정하고 움직이지 않아도 되어서, 아침 공기가 더 상쾌했다.


지상철을 타고서 설레는 마음으로 구스 아일랜드 브루어리에도 다녀왔다. 혼자서도 아무렇지 않게 바에 걸터앉아 맥주 두 잔쯤 마실 수 있는 분위기 있는 여자이고 싶었지만, 기념 맥주잔을 크기 별로 사고 코스터까지 챙기는 모습은 아마도 분위기 있는 사람보다는 호기심 많은 관광객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브루어리의 한쪽 벽에 장식된 “오늘의 일기 예보: 맥주 마실 확률 100%”이라는 글귀에 키득키득 공감하면서, 기분 탓이었을까, 그곳에서 마신 IPA는 집 근처 펍에서 종종 마시던 것에 비해 훨씬 풍부하고 상큼한 맛이 났다.


밤이 찾아오면, 미리 봐 둔 재즈바의 공연 시간보다 조금 일찍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가벼운 맥주를 주문했다. 어쩐지 찐한 시카고 블루스에는 레드 와인이나 싸구려 버번위스키가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혼자 있으니 기분에, 분위기에, 술에 너무 취하면 안 될 것만 같은 본능이었지 싶다. 밤이 깊어갈수록 점점 음악은 농밀해졌고, 보컬의 소울 충만한 기교에 스르륵 눈이 감겼고, 그 속에서 무방비 상태의 내 마음은 한참 동안 재즈 선율을 따라 휘청였다. 알콜의 취기가 더 필요하지 않을 만큼.


마지막 밤, 시카고 심포니홀에 들어서자 단아하고 아름다운 무대 곳곳에 크리스마스 리스가 장식되어 있었다. 밖에서 보는 건물 못지않게 실내도 아름다워서 아직 연주자들이 오르지 않은 무대를 한참이나 멍하게 쳐다봤다. 연주는 또 어떻고. 상상하지 못한 수준급의 소리에, 합창단의 화음까지, 눈물이 핑 돌게 멋진 공연이었다.


혼자서라도 오길, 잘했어, 하고 여러 번, 생각했던 것 같다.


"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이라는 나의 말에서 굉장한 행복과 활기가 느껴졌다고, 그가 나중에 말했다. 전화기 건너편으로부터 "조심하고 재밌게 놀다 와."라던 그의 말에는 분명히 아쉬움이 묻어났다고, 나는 기억한다. 본인의 출장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우린 함께 시카고 피자를 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겠지만, 만약 우리가 함께였다면 시카고보다 동네 피자집에서 저녁을 먹었을 확률이 더 높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어느 백화점의 지하 매장을 막 벗어나던 참이었고, 연말 분위기로 꾸며진 거리를 몇 블록 지나서 서점에 들어갈 때까지 통화를 하며 걸었더랬다. 그 거리의 따사로운 햇살의 감촉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하면, 그날의 들뜬 마음이 표현될까.


지나치게 포근했던 어느 겨울의 시카고를 떠올리면, 고작 나흘이었다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장면들과 그에 얽힌 내 감정들이 소환된다. 그것은 마치, 나와 시카고, 둘만 아는 비밀 이야기를 간직하는 기분이다. 낯선 도시를 서성이는 시간은 오롯이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게 하고, 길목을 돌아 마주치는 장면들이나 지나치는 사람들과 주고받은 눈빛들도 나만의 시선이기에, 그것은 오직 나와 그 도시 사이의 은밀한 이야기이다. 꼭 혼자여야만 했던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종종 그와 함께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했지만, 혼자였어도 충분히 매력적인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시카고 사이의 이런 비밀스러운 추억이 내심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생전 시카고에 관심도 없던 그는 나와 함께 하는 시카고 기차 여행에 벌써 세 번이나 참여했다. 하루에 한 번 아침 9시에 떠나는 기차를 타고 네 시간이면 시카고 역에 도착한다. 교통 체증이 심각한 데다 주차료가 상상을 초월하는 시카고 다운타운으로 놀러 가기에 더없이 좋은 옵션인 데다, 기차여행이라는 은근한 낭만은 덤이다. 백팩에 갈아입을 옷과 꼭 필요한 물건들만 간단하게 챙겨 하룻밤을 시카고에서 보내고, 다음 날 오후 4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여행을 몇 번 했더니, 우리는 이제 자동화 수준으로 최적의 동선과 타임라인을 숙지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와 함께하는 시카고 여행은 또 다른 색감으로 기억된다. 미술관에 가지 않고, 쇼핑몰을 구경하지 않아도 시간이 잘 간다. 강변을 따라 걷다가 분위기 좋은 바에서 맥주 한 잔씩 마시며 쉬다가, 또 한참을 걸어 평소에 즐길 수 없는 고급 식당에서 짐짓 미식가인 척도 해보고, 흥겨운 타파스 바에서 둠칫 둠칫 리듬을 타며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하루가 휙, 하고 지나가버린다. 혼자일 때는 시간이 차곡차곡 성실히 흘렀는데, 함께일 때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생일이라서 시카고 놀러 왔어요."라는 말 한마디에, 체크인을 도와주던 호텔 지배인은 점잖은 말투로 "그럼 제가 축하를 해드려야지요." 라면서 우리를 분위기 좋은 호텔 라운지바로 안내했다. 노련하게 칵테일을 만들고 있던 바텐더에게 우리가 원하는 음료를 두 잔씩이나 내어주라고, 놀라운 혜택을 주면서도 마치 별 일 아니라는 듯, 해피 버쓰데이! 한 마디만 남기고 지배인은 사라졌다. 얼떨결에, 분위기는 좋지만 가격은 부담스러웠던 호텔 바에서 와인과 칵테일을 앞에 두고 하염없는 잡담을 나누었다.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연히 선물받은 호텔 라운지에서의 와인 한 잔이 얼마나 달콤 쌉쌀하게 입에 착 달라붙었는지, 그 와인을 내어주던 바텐더의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몸짓과 말투가 얼마나 근사했었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감상들이 어느 날 문득 떠오르겠지. 그러면, 그 때 그 와인 기억나? 하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아서, 마치 우리만 아는 비밀을 나눠가진 것처럼 들뜬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나 혼자서만 알고 있던 조그마한 카페에 그를 데려갔다. 그동안은 홀로 여행의 추억이 있는 곳에 또 다른 기억을 덧입히기 싫은 욕심에 나만의 비밀로 간직했지만, 어쩐지 그 아침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코로나 팬데믹에서 살아남은 작은 독립 카페에 감사하는 마음과 응원하는 마음이 섞여서, 그런 곳에서의 아침을 그와 함께 오래오래 추억하고 싶어졌다. 예상한 대로 그는 고소하고 담백한 숏 라떼 cortado 한 잔에 최고 점수를 주었고 우리는 한참 동안 그 카페에서 아침 시간을 보냈다.






그와 함께 시카고를 걷다 보면, 몇 년 전의 내가 혼자서 지냈던 호텔도 보이고, 혼자서 자주 걷던 익숙한 길들도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혼자였던 그때의 내 모습과 내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때 참 좋았었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어김없이.


아주 오래전, 비엔나에서 혼자 5주를 보냈던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덜컥 두려워졌던 마음을 기억한다. 독립적 자유인으로 세상을 탐닉하는 일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이제 그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이 귀찮아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그때보다 조금 더 자란 지금의 나는, 혼자인 여행이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동행과 함께 하는 여행이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둘이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따로 또 같이, 그 절묘한 균형을 실감하고 싶을 때면 혼자인 여행과 함께인 여행을 생각한다. 나에게 시카고는 혼자일 때의 나를, 함께일 때의 우리를 반겨준 따뜻한 도시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시카고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 어쩐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눈 위를 뒹굴던 먼 옛날의 철없던 어느 여행을 슬그머니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여행이 끝나고 나면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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