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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Nov 27. 2021

이름 없는 이자카야

일본 도쿄

구글 지도에서 키치죠지를 찾았다. 검색되는 호텔이 단 두 군데뿐이었다. 그마저도, 기차역 코 앞에서 자기는 싫어서 제외시키니 더 고민할 것 없이 머무를 곳이 정해졌다. 4일 동안 지내기로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키치죠지라는 동네에서 잠시 머물러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Cherry Blossoms)>의 쓸쓸하고도 포근했던 이노카시라 공원에 가서, 찬란한 벚꽃 대신 한 여름날의 눈부신 초록을 엿보는 상상을 했더니, 햇볕이 잘 들지 않는 회색빛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일이 견딜만했다. 혼자서 "키치죠지" 하고 몇 번씩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보았다. 일본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울림이 좋았다. 







매일 아침, 검은색 편안한 반바지와 얇은 긴 팔 면 티셔츠를 입고, 커피도 마실 겸 산책을 나선다. 아직 습한 여름이 시작되기 전이라, 아침 산책에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고 몸에 닿는 면 티셔츠의 촉감이 좋다. 일단 숙소가 있는 근처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걸어본다. 묵직한 커피 향이 배어나는 카페에서 산 커피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시선을 끄는 카페나 빵집이 나타나면 이름과 위치를 확인하면서 "내일 커피 마실 곳"으로 점찍어 둔다. 겨우 나흘을 지낼 거면서도, 마치, 그런 "내일"이 오래오래 계속될 것처럼.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동네 구경은 키치죠지 역 근처의 큰 도로에 닿으며 끝난다. 다시 호텔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곧장 큰 도로를 건너, 기차역을 지나, 이노카시라 공원까지 걷는다. 옷이나 기념품을 파는 조그만 상점들 저마다의 개성과 정성이 발걸음을 자꾸 더디게 하고, 어느 카레 전문 식당의 조그마한 간판과 메뉴판이 예뻐서, 내일 아침은 카레다! 결심하기도 한다. 공원 앞 스타벅스에서 두 번째 커피를 산 뒤, 공원으로 들어간다. 


큰 호수를 가운데에 두고,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를 따라 걷는 동안 여러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되는 것이 좋아서, 바보처럼 두리번대며 천천히 걸어본다. 온통 천연한 초록 나무와 호수가 보이는 것이 전부인데도, 한 나절 책을 읽으며 쉬어 갈 벤치 하나를 고르는 데에도 한참이 걸릴 만큼, 마음에 드는 공간이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그래서 계속 걷는다.  


그렇게 커다란, 도시 속의 공원에 들어서면서 도무지 상상하지 못했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의외로, 그 경계에 있다, 고 생각한다. 공원 호수의 서쪽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조깅하는 사람들이 산책로에 연결된 계단을 따라 뛰어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올려다보면 그런 계단들은 주택가의 골목에 닿아 있다. 콘크리트 외벽의 주택들을 초록의 공원으로 끌어들인, 반대로 총 천연색의 자연을 회색빛 골목길로 끌어들인, 그렇게 무너뜨린 경계가 멋있어서 한참 동안 쳐다보게 된다. 흰색 셔츠를 입고 계단을 달려내려오는 아저씨가 하루키 같다, 고 생각하면서. 


키치죠지, 를 떠올리면 그 아침들의 상쾌한 공기와 이노카시라 공원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혹은 짧은 로드무비처럼 차라라 스쳐 지나간다. 






길어진 아침 산책에서 돌아온 뒤, 어떻게 오후 시간을 보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릇 가게 구경도 하고, 서점도 둘러보고, 어떤 영화에서 오다기리 죠가 사 먹던 꼬치구이에 맥주도 한 잔 하고, 뭐 그렇게 별 일 하지 않았어도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휘릭 지나가버렸으리라 생각한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키치죠지에 밤이 찾아오면, 완전히 다른 동네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종종 어리둥절해졌다는 것이다. 낮 동안에 태양을 피해 웅크리고 있다가 달이 차면 잠에서 깨어나는 야생동물처럼, 골목골목을 채우는 조명과 활기는 싱그러운 아침의 여유로운 산책과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어떻게 끌고 다니나 싶은 조그마한 이동식 어묵 바 bar가 골목 중간에 자리를 잡고서, 진한 국물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와 통통하게 익어가는 온갖 종류의 어묵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낮동안 거의 닫혀있던 하모니카 요코초의 좁디좁은 골목골목의 상점들도 불을 밝히고 손님을 맞이한다. 


마치 우리네 광장 시장의 기다란 벤치에 엉덩이를 겨우 걸치고 앉아 분식을 나누어 먹는 북적임과 비슷하면서도, 가게마다 저마다의 특징이 있어서 한 곳을 골라 앉기까지는 꽤 신중한 결정이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기차역 바로 건너편이라서일까,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퇴근길에 들러 맥주 한 잔으로 그날 치의 고단함을 달래는 것 같다는 해석이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밤마다 들렀던 지하 재즈바, 썸타임 sometime의 연주 무대는 감상자들의 시선 아래에 있다. 한쪽 벽이나 구석 자리에 마련한 무대가 아니라, 마치 연주 무대가 그 장소의 정체성인 듯 마룻바닥 한가운데에 악기들이 자연스러운 원을 그려 무대를 구분 짓고, 칵테일과 술을 내어주는 바는 상대적으로 초라할만치 작은 구석에 위치한다. 무대를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은 연주자가 악기를 대하는 모습을 저마다의 위치에서, 조금 색다른 각도에서, 조금 더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다, 각자 자기의 방식으로. 


공연장이 아닌 재즈바에서는, 이처럼 무대와 관객석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럽다, 음악에 좀 더 몰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도 어쩌면 도시와 공원의 경계를 영리하게 흐려놓은 이노카시라 공원의 매력과 같은 이치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어떤, 이름 없는 이자카야. 


아마도, 어쩌면, 이름은 있었겠지만, 오로지 일본어로만 적힌 메뉴판에서조차 그곳의 이름을 유추하기는 어려웠다. 이후로 몇 번이나 구글 지도를 열어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그냥 "이름 없는 이자카야"로 기억하기로 했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기까지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 관광객이자, 여자 혼자 동네 술집에 들어가 술 한 잔 앞에 놓고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으며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내공은 아직 없던 때였다. 닫혀있는 출입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해도 묘하게 끌리는 가게였다. 그 골목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여러 번 걸었다. 곁눈질로 가게를 훔쳐보면서. 아니, 그 가게를 훔쳐보았다기보다, 내 마음의 소심함이 용기로 발전하는 과정을 응원하면서. 


다른 골목까지 빙빙 돌고 돌아서, 다시 그 가게 앞에 섰다. 키치죠지에 도착한 첫날 저녁이었고, 배가 무지하게 고팠고, 그리고, 그 가게는 들어가서 한 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아우라를 품고 있었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여는 소리가 그 너머에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천천히, 문을 열었다. 


다른 세계였다. 


이쪽이 다른지 저쪽이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르다,라고 느꼈다. 밤이 내려앉으면서 키치죠지의 거리는 화려한 조명과 음악, 가게를 홍보하며 손님을 끄는 사람들 특유의 발랄함, 그들 사이로 구경하는 사람들의 북적임으로 채워졌는데, 그 모든 소란스러움을 일순간에 다른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다. 문을 닫고 들어서는 순간, 그곳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기에 조금 높은 볼륨의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그냥 대충 틀어놓은 어쭙잖은 재즈풍의 배경음악이 아니라, 어쩐지 주인장이 신중하게 선곡했을 것만 같은, 오로지 음악을 듣기 위해서 찾아올 단골손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우아한 쿼텟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 자리에서, 생맥주 한 잔을 받아 시원하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것은 용기를 내어 이쪽 세상으로 들어온 나 자신을 향한 칭찬이었다. 


맥주를 내어온 아가씨는 아주 아주 어려 보였는데, hungry나 picture 같은 단어조차 알아듣기를 거부했다. 길에서 만난 몇몇 일본인들이 그러했듯, 영어에 대한 반사적 거부 반응. 그녀가 아는 영어는 오직, 땡큐와 쏘리뿐이었다. 그래서 일본어를 모르는 내가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영어도, 그림도 없는 메뉴판을 멍하게 들여다보며 요깃거리를 찾는 나와,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으나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은 본인도 마찬가지라는 눈빛과 표정의 그녀는 그렇게 메뉴판을 마주 잡고 한참만에 무슨 샐러드를 골라냈다. 뭐라도 먹을 수 있어 안도했던 나 만큼이나 그녀 역시 뭐라도 내어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의미의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어 메뉴가 없다는 것과 그녀가 일본어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 민폐인가 싶어서 다른 곳으로 나갈까, 잠시 망설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 눈빛과 표정이 나를 잡았고, 그 배경으로 멋들어진 재즈 음악이 나를 주저앉혔다. 나는 "혼자 술집에 들어온 여자"라는 자각을 잃어버렸고, 어쩌면 그곳이 일본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그 시간에 녹아내렸다. 도쿄, 키치죠지의 이름 없는 조그만 이자카야, 작고 작은 바 테이블의 한 사람치의 공간, 그 안에서 나는 깊고도 넓은 시간 여행을 했던 것 같다. 너덜하게 지쳐버린 일상에서 도망쳐온 짧은 여행의 첫날밤, 이보다 더 충만한 위로가 있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고작 나흘을 머물렀던 도시에 대한 감상,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송구할 정도로, 그 기억이 주는 울림은 크다. 이를테면, 그 이름 모를 가게는 나에게 이자카야의 정석이 되어버렸고, 그 후로 이자카야를 찾을 때면, 나도 모르게 그곳에서 느꼈던 깊이를 기대하게 되었고, 일본어를 쓸 일이 딱히 없더라도 이자카야 메뉴 정도는 일본말로 연습하게 되었고, 그리고, 묵직한 재즈를 틀어주는 이자카야 (흔치는 않다)를 좋아하게 되었다. 





미국의 시골 생활 중에는, 낡고 허름하면서도 내공 있는 일식 이자카야의 부재가 가끔 그렇게 아쉽다. 식성 까다로운 미국 시골에서 (고집스러운 식성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새로운 것과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일식당도 한식당도 회초밥이나 한식보다 미국 화된 롤 메뉴가 훨씬 많다.) 나에게 익숙한 "제대로 된" 이자카야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이다. 


이름 없는 이자카야에서의 한 잔 술과 재즈 음악, 그 안에 녹아내리던 그만한 깊이의 위로가 필요한 날에도, 여기서는 마땅히 갈 곳이 없다. 그래서 매번 아쉽다는 이야기만 하다가, 너무 아쉬웠던 탓일까, 그런 공간을 집에서 만들어보자 작당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이자카야 나이트. 


인터넷을 뒤적거려 타레 소스를 만들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네기마 꼬치를 재현하기 위해 닭다리살과 대파를 번갈아 꼬치에 끼웠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떡꼬치를 재현하기 위해 가래떡에 베이컨을 둘둘 감아냈다. 일본 식재료 마트에서 고급져 보이는 사케 한 병과 도쿠리 잔도 사뒀다. 아무리 노력해 봤자, 직화로 구워내는 이자카야의 야키토리에 비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그 일련의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이미, 일본으로 날아가 빼곡히 늘어서 있는 야키토리 골목에 서있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서 가성비 제로라고 생각하는 사케를 주거니 받거니 건배를 외치면서, 함께했던 도쿄 긴자의 야키토리 노점상들과 이자카야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슬그머니, 어김없이, 키치죠지를 떠올린다. 내가 아무리 구구절절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합리화로, 나는 그 이름 없는 이자카야를 나만의 장소로 간직하기로 한다. 


대신, 우리 재즈 들을까?라고 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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