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여학생이 들을 수 있는 최대의 욕은 IBM이었다. '이미 버린 몸'이라는 뜻이다. 비슷하게 쓰이는 말로 '아다'와 '후다'라는 것도 있다. 아다는 성경험이 없는, 후다는 성경험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은어로 일본어 '아타라시이(새롭다)'와 '후루이(낡다)'가 그 어원이라고 한다.
이 나이에 입에 올리기엔 다소 유치하기도, 상스럽기도 한 속어를 굳이 들먹이는 건 이 것이 당시 학생들 사이에 꽤 흔한 용어였으며 (나는 결단코 불량한 학생들과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 유구한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청소년들 사이에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IBM, '이미 버린 몸'이란 꼬리표를 달게 된 여학생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메시지는 두 가지다. '나는 내 몸을 잘 간수하지 못해서, 순결을 잃었다.', '어차피 이번 생은 글렀다. 막 살자."
성기 삽입은 하지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신체 접촉으로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것을 성추행이라 정의한다면 여자아이들은 자라는 과정에서 부지기수로 성추행을 겪는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성추행은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인 예닐곱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 근처 학교 운동장에서 초등학생들이 텐트를 치고 캠프를 했다. 나와 남동생은 가장 무도회와 캠프 파이어 등의 행사를 보기 위해 운동장 한 켠 그네에 앉아 놀고 있었다. 엄마가 잠깐 슈퍼마켓에 간 사이, 그네에 앉아있는 나를 누군가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평소 동네에서 자주 보던 아저씨였다.
그네를 밀어주며 친절히 놀아주던 아저씨가 뭘로 나를 꼬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동생의 손을 잡고 학교 건물 뒤 으슥한 곳으로 아저씨를 따라갔다. 아저씨는 (어떤 맥락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몸무게를 재보겠다며 나를 번쩍 들어 안았고 자신의 배 근처에 내 몸을 밀착시킨 후 위아래로 들었다 놨다 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아저씨가 내 몸을 내려놓으면서 황급히 바지 앞 섶을 추스리던 장면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바닥에 내려진 나는 흥건하게 젖은 원피스를 내려다보며 "나한테 오줌 쌌죠?"라고 소리를 치며 울음을 터트렸다. 영문을 모르고 서 있던 동생도 함께 악을 쓰며 울었고 아저씨는 어디론가 달아났다.
엄마는 분노하고 당황하며, 아이들만 두고 자리를 비운 자신을 두고두고 탓했다. 하지만, 나에게 벌어진 일이 얼마나 추잡한 것이었는지, 단서를 주진 않았다. 엄마가 그 동네 남자를 찾아 어떤 응징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때의 일을 (다른 각도로 회상할 나이가 되기 전까지) "동네 미친놈이 내 치마에 오줌을 싸고 달아난 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성추행으로 이름 붙일 만한 일은 초등학생 시절에도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에도 내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6학년 오빠가 화장실로 데리고 가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한 일도 있고, 대낮에 길을 걷는데 뒤에서 누군가 가슴을 만지고 달아난 일도 있다. 성적 수치심을 느낄 나이쯤 되면 어린 아이처럼 크게 울지도 못 한다. 몹쓸 짓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창피해서 혼자서 끙끙 앓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그때 그 개자식!” 하며 욕이라도 할 수 있게 된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그윽하게 바라보며 "내 첫사랑과 꼭 닮았단 말이야..." 하며 머리를 쓰다듬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감성이 풍부한 양반인 줄 알았다. 하지만, 교무실에 나를 세워놓고 체육 선생님과 낄낄대며 "너 공부 열심히 해야 된다. 술집 같은데 나가고 그러면 안돼. 너 같은 애들은 까딱 잘 못 하면 그런 쪽으로 풀릴 수도 있어."라고 말하는 통에 몇 날 며칠 복잡한 심경이 되기도 했다. 물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 했다.
고등학교 때는 세 살던 집의 주인집 오빠가 아무도 없는 사이에 내 방에 들어와, "와, 공부도 열심히 하네. 정말 착하고 이쁘다." 하며 어깨에 손을 두르고 귀에 바람을 불어 댄 일이 있었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서 겪는 성추행은 단순히 미친놈의 소행으로 치부하거나, 놀라는 데서 끝나지 않고 착각과 혼동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걸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은 대개 누가 봐도 모범적이고 착실해 보이는 남자가 정교한 방식으로 성추행을 시도할 때 발생한다. 옆 집 대학생 오빠는 예의 바르고, 성당에 열심히 다닌다는 이유로 엄마가 늘 칭찬하는 바른 청년이었기에 (허락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와 몸을 껴안고 귀에 징그러운 감촉을 선사하는 확실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성추행범 일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난생처음 카페란 곳을 따라가 그에게 파르페라는 것을 얻어먹으며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까지 했던 이유가 그것이다. 만약 그가 좀 더 과감한 시도를 했다면, 나는 큰 저항 없이 IBM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사랑이 아닌, 파르페 한 잔으로 입막음을 시도할 만큼의 고의적인 실수라는 걸 눈치챈 후, 소중한 순결을 어이없이 잃게 된 것에 대해 분노하고, 남자는 믿을 족속이 못 된다고 마음을 굳히고, 이미 난 끝났어라고 스스로를 질책하며 좀 더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됐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미 버린 몸' 이란 말은 위험하다. 그저 아이들 사이의 농담으로 가볍게 흘려서는 안 된다.
살다 보면 실수를 한다. 섹스 자체가 실수라는 게 아니라, 그 행위에 깔린 상대방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거나, 너무 어렸거나, 술에 취하는 등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해 어쩌다 보니 섹스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특히 삶의 경험이 짧은 어린 여자 아이들은 섹스와 사랑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강간이나 강압적인 성폭력은 그저 폭력일 뿐이니 열외로 하자.) 단순히 아는 오빠나 삼촌 뻘 되는 남자들의 접촉에, 여자 아이들이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발랑 까지고 알 건 다 아는 요즘 애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상대방의 의도가 뭔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과 혼돈에 휩싸여 강하게 저항할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 결국 함께 동조한 꼴이 되어버려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평생의 비밀로 간직한다. 그것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른다.
무지한 가운데 어쩌다 보니 섹스를 해 버리는 아이들 (또는 성인들)이 너무나 많은 것에 비해 "괜찮아.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어. 앞으로는 좀 더 잘 판단할 수 있도록 공부하자. 내가 도와줄게" 하는 어른들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유튜브도 없던 우리 세대는 정말 무지했다.
학교에서 나름 성교육을 하니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는 대충 알았지만, 인간의 성욕이나 쾌락적 측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고, '섹스'와 '사랑'이 늘 세트로 움직이는 것이라 착각했다.
인간은 사랑의 표현으로 섹스를 하기도 하지만, 그저 성욕의 충족을 위해, 무료한 삶을 달래기 위한 오락의 방편으로, 때로는 자아를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혹은 그 모든 것들이 적절하게 버무려진 복잡한 이유로 섹스를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섹스가 늘 정서적 교감을 동반하지는 않고, 콘돔을 쓰는 것과 그 남자를 믿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며, 성적 쾌감은 누가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
포르노를 통해 섹스를 배운 사람과 로맨스 소설로 섹스를 배운 사람이 만나면 오해와 충돌이 난무한다. 심심풀이로 야동을 좀 봤을 뿐인데 바람피는 것과 뭐가 다르냐며 변태 취급하는 배우자, 하룻밤 마음이 맞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변심, 농락 운운하며 불같이 화를 내는 여자 (또는 남자)를 겪어 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내가 결혼도 안 한 20대 중반의 나이에 '대한 여성 오선생 찾기 운동본부'란 슬로건을 내 걸고, 이른바 <여성을 위한 성인 사이트>를 10년 넘게 운영한 이력의 밑바탕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깔려 있었다. 나와 한 시대를 살았던 여자들의 성과 사랑에 대한 무지,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오해, 그것을 해결하지 않은 가운데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며 겪는 말 못 할 갈등을 목격하며, '꼭 아름답지 만은 않은 성담론의 장'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쁜데 공부도 잘해서 늘 반장을 하다가 임신 중절 수술을 했다고 소문이 나 전학 간 은영이(가명), 이미 버린 몸이니 돈이라도 벌겠다고 원조 교제에 나선 아이들, 남자 친구와 섹스를 하는 것이 좋은 줄 모르겠는데 그런 자기 자신이 속물처럼 느껴진다는 희경이(가명), 유부남인 남자 친구의 이혼을 3년째 기다리는 정희(가명), 자신의 특이한 성적 취향 때문에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선경이(가명) 등등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간 꽁꽁 숨겨오던 우리 자신의 불경스럽고 내밀한 부분에 빛을 비추고 싶었다.
아주 가볍고 유쾌한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