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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Oct 19. 2022

기억나지 않는 청혼

‘어? 이름이 같네. 전화번호도… 많이 본 번호인데?’  신규 회원들의 리스트를 살펴보던 내 눈에 낯익은 이름이 포착됐다. 배추가게를 떠나 미국에 갔다가 돌아 온 후,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J 였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가 맞다. 

“네. 여기는 팍시러브라는 사이트입니다. 나는, 누규우~~~~게?” 

“와하하하하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는 작은 웹 에이전시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경쟁사의 포트폴리오를 보다가 팍시러브를 발견했다고 한다. ‘대한여성 오선생 찾기 운동본부’란 슬로건 밑에 적힌 대표자명을 보고 ‘이 이연희는 내가 아는 그 이연희가 맞다.’라는 확신이 들었단다. 내가 어딜봐서 그런 일을 할 여자로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운 마음에 당장 만나자고 했다. 


때 마침. 2000년 12월 31일 밤이었다. 제야의 종이 울려퍼질 광화문에서 2년 만에 J를 만났다. 남자 친구도 남자 사람 친구도 아닌 그와 밀레니엄을 함께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환하게 웃는 J 와 얼싸안고 반가운 마음을 나눈 후 나는 제안했다. “우리 일단 방을 먼저 잡는게 어때?” “어? 방이라고?” 그는 당황하며 자기가 잘 못 들은 건 아닌지 재차 확인했다. "솔직히 우리 카운트다운하고 집에 갈거 아니잖아? 술도 한 잔 해야하고. 그러다보면 집에 못 들어가지 않을까? 오늘 같은 날은 서둘러서 방을 잡아놓지 않으면, 길에서 밤 새야 돼. 괜히 고생하지 말고 먼저 방을 잡자.'


보통 남자들 같으면 나를 천하의 화냥년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J는 나를 솔직하고 합리적이며 멋지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여자가 이 정도 막 나가면, 남자들은 그 여자를 매우 쉽게 생각하게 마련이다. 내가 J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함부로 군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더 과감하게 행동하고 말하게 됐다.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도 다 좋게 생각하고 받아줄 것 같았달까? 


남들이 모르는 나의 진가를 알아봐주고, 개차반 같이 행동해도 늘 멋지다고 말해주는 유일한 사람. 지금 생각하니 그런데, 그때는 몰랐었다. 그의 넓은 아량에 감사하지 않고, 함부로 대했다. 친구처럼 편하게 만났다가, 연인처럼도 굴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 멋대로 연락을 끊었다. 


바로 다음 해였던가? 내가 J에게 청혼을 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그를 따로 불러내 담벼락에 세우고, 직접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선물로 건네며, "오빠 우리 결혼하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너무 기뻐 친구들에게 돌아가 우리의 결혼 소식을 발표했다고 한다. 


내가 청혼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전해 들은 이야기 화법'을 쓰는 것은 그날도 여지없이.... 필름이 끊겼기 때문이다. 


다음날 숙취에 시달리며, 전화를 받았다. 설마 하는 목소리로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일 기억나지?"

"어?..."

"우리 결혼하기로 한 거. 기억나?"

"아... 정말? 미안해. 그냥 취소하면 안 될까?"


J가 먼저 연락을 끊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정말 많은 상처를 받은 듯했고, 나는 면목이 없어서 또 다시 몇년 간 그를 만나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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