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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l 07. 2020

사랑은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태국으로 신발 팔러 가자!" 

2002년. 2년만에 다시 만난 J에게 다짜고짜 제안했다. 

"동대문에서 만원이면 살 수 있는 패션 운동화를 태국에선 3만 원에 팔 수 있거든. 메이드 인 코리아면 무조건 통해. 태국을 오가면서 같이 신발 장사를 하자. 어때?" 


일전에 당한 일도 있고 하니 J가 그리 호락호락 넘어가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우려를 했지만, 그는 단번에 ‘콜!’을 외쳤다. 역시 쉬운 남자다. 


단, 때는 바야흐로 2002년 월드컵을 코 앞에 둔 시점이었기에 월드컵만 보고 떠나자고 했다. 나는 축구엔 그닥 관심이 없었고, 수중에 백만 원도 안 남은 상황이었다. 팍시러브는 유명세를 탔지만, 1200원 가입비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조금만 더 허송세월을 보냈다간 사이트를 접고 취직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나 혼자라도 먼저 갈까 하다가, 일단 함께 한국에서 축구를 보며 붉은 악마 티셔츠를 파는 걸로 합의를 봤다. 


거리 응원 장소에 몇 시간 전에 도착해 차에 물건을 싣고 붉은 악마 티셔츠를 팔았다.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이천 원에 사서 만원에 팔았으니 꽤 남는 장사였다. 100장을 후딱 팔고 나면 원가를 제하고 80만 원이 남는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장사를 끝내고 근처 호프집에 가서 치킨과 골뱅이를 시켜놓고 축구를 봤다.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 포르투갈 전에서 한국은 16강 진출을 이루어냈다. 48년 만의 기적이라고 했다.


심지어 이런 것도 유행이었다. (출처 : 농심블로그 https://blog.nongshim.com/448)




솔직히 나는 축구 문외한이었기에 16강 진출이 18년 만인지, 48년 만인지 그게 왜 그렇게 역사적인 일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불타오르는 월드컵 열기로 미루어 붉은 악마 티셔츠 추가 매입을 서둘러야 한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새벽 시장에 물건을 떼러 온 젊은이들이 몇 배는 더 많아졌다. 수요가 많아지니 티셔츠의 원가는 대락 3,000원 정도로 껑충 뛰어올랐다.


16강, 이탈리아전. 거리로 나선 사람들 수에 비례해 노점상이 늘어났다. 판매 경쟁이 심해지면서 티셔츠 가격도 8,000원 정도로 떨어졌다. 마진이 종전 8,000원에서 5,000원으로 줄어든 것이다. 문제는 그뿐 만이 아니었다. 장사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친구와 후배들이 도와주겠다며 하나 둘 몰려들었다. 덕분에 티셔츠를 후딱 팔아치울 수 있었지만, 축구를 보는 동안 그들 모두에게 맥주와 치킨을 사야 했다.


이탈리아 전이 끝나는 대로 떠날 계획이었다. 초기 자본금에 붉은 악마 티셔츠 판돈까지 합쳐 운동화를 좀 더 구입할 수 있겠군 하며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데, 설기현의 동점골에 이어 연장전에서 안정환이 헤딩골을 넣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탈리아를 2대 1로 꺾고, 8강 진출을 하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운동화 살 돈으로 붉은 악마 티셔츠를 구입했다.


2002년 시청앞 거리응원 (사진 출처 : https://www.unamwiki.org)


이 시점, 동대문 새벽시장에는 빨간색 염료의 품귀현상이 발생했다. 노점 소매상들은 웃돈을 줘서라도 물건을 확보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주식도 장사도 절정을 찍을 때 발을 뺄 줄 알아야 하는데, 그때 우린 멋 모르는 20대. 들뜬 분위기에 편승해 장당 4,500원이나 주고 티셔츠를 사놓고는 팔기도 전에 승리의 하이파이브를 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굳이 도와주겠다고 몰려들 후배들에게 알바비라도 나눠주려면 팔 물건을 좀 더 확보해야 했기에, 월드컵 모자, 악마 뿔 등의 응원용품을 추가로 구입했다. 


8강, 스페인 전. 


우리의 목표는 여의도 한강 고수부지.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고 응원도구를 파는 노점상도 10미터에 한 팀 꼴로 줄을 이었다. 노점상이 눈에 띄게 많아지니 경찰이 집중 단속을 시작했다. 경찰이 물건을 통째로 압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2인 1조로 그룹을 편성해 분산 판매를 시작했다. 쫓고 쫓기며 물건을 팔다 보니, 반도 못 팔았는데 경기 시간이 다가왔다. 한 팀은 경찰에 물건을 압수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고 천 원 이천 원에 남은 물건을 그냥 막 팔아치웠다.


'어차피 오늘로서 끝이다. 설마 스페인까지 이기겠어?'


출처 : 대한축구협회 (KFA)


나처럼 축구에 영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도, 2002년 월드컵 역사의 현장을 함께 했다면 우리 선수들의 골 장면 하나 하나와 온 국민의 환호성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때 경기 영상이나 사진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8강 스페인전, 승부차기에서 홍명보가 마지막 쐐기골을 넣었던 순간. 우리 모두는 얼싸안고 울었다. 버스도 승용차도, 심지어 경찰차마저도 "빵빵빵 빵 빵"하고 응원 구호에 맞춰 경적을 울렸고, 사방에 붉은 물결과 태극기가 나부꼈다. 장하다 대한의 아들들! 장하다 코리아! 온 국민이 하나 되어 마음을 모으는 이때에, 붉은 악마 티셔츠 판매업의 적자쯤이야 얼마나 하찮은 일인가.


제프 베조스는 300달러, 약 40만원의 자본금으로 아마존을 창업했다고 한다. 우리가 40만 원의 자본금을 들여 시작한 짝퉁 붉은 악마 티셔츠 사업은 원금을 제외하고 각종 비용을 정산하고 나니 J와 나 각각 9만 8천 원의 수익을 거둔 것으로 정리되었다. 새벽잠을 설치며 물건을 사입하고, 목이 쉬어라 소리치며 티셔츠를 팔고, 경찰에 쫓고 쫓기며 장사를 한 댓가치고는 허무한 결과였다.


J와 나는 뭐든 편할대로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는 면에서 마음이 잘 통했다. 16강에서 멈췄으면 큰 수익이 났을텐데, 8강에서 얼마를 말아먹어 이런 결과가 빚어졌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 따윈 없었다. 친구, 후배들과 치킨과 술을 실컷 먹고 마시고, 거리 응원도 하며 9만8천원을 벌었으니 아무튼 성공이라며 희희낙락했다.


연인도 친구도 아닌 애매했던 J와의 관계는 월드컵의 상승 기류와 함께 급속도로 무르익어갔다. 급기야 4강 터키전 때는 응원 열기로 가득한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강원도 산골의 한 민박집에서 둘이 TV 앞에 베개를 깔고 누워 경기를 관람하기에 이르렀다.


한마디 말도 없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TV 화면만 응시하던 J를 보며, 갑자기 왜 이리 쑥스러움을 타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정말 기도하는 마음으로 축구를 보는 것이었다. 18년을 함께 살면서 J의 축구 사랑이 일반적인 팬심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정환이나 홍명보가 축구하는 모습은 참 멋있는데, 남편이 축구한다고 나가면 왜 그렇게 분통이 터질까? 


한국은 터키전에서 패배하고 4위에 머물렀지만, 아쉬울 것이 하나 없는 경기였다. 한국 선수들이 이루어낸 성과 못지않게 그 날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획기적인 변화와 진전이 있었다. 나는 이 날 처음으로 J와 결혼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만, 명백히 19금인 관계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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