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 지스팟
한자는 고상하게,
영어는 학술적으로 느껴지는데 반해
왜 순 우리말은 창피할까?
음모 陰毛
퓨빅 헤어 pubic hair
좆털
표준 국어 대사전은 '좆'이라는 표현을 비속어로 분류한다. 상스러운 표현이라는 뜻이다. 상스러운 표현을 피하기 위해 좆털 대신 쓸 수 있는 말을 찾아보니 '거웃'이라는 단어가 있다.
거웃 전시회
황석영 작가 특별전도 아니고, '사타구니' '거웃' 같이 토속적 향기가 느껴지는 표현은 홍대 클럽 에피소드를 묘사하는 용도로 사용하기엔 왠지 부적절하다. '좆털'이라는 단어쯤이야 20대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렸는데, 마흔다섯이 되어 글로 쓰자니 왜 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걸까? 읽는 이들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SNS 속 짧은 글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은 긴 글을 진중하게 읽지 못하고 특정 단어만 플래시처럼 휙휙 연결하며 글을 읽는다던데, 좆털이라는 단어가 강렬해서 글 전체가 천박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글을 쓰기 전 잠시 번민에 휩싸여보지만, 나는 17년 전의 패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좆털을 좆털이라 부르기로 결심한다.
여성을 위한 성인사이트를 표방하던 팍시러브는 가입비를 받기 시작하면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기자 한 명, IT 담당자 한 명, 기타 업무 한 명의 직원을 고용해 근근이 유지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돈 안되는 사이트 운영과는 별개로 시도해 볼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템이 없을까 머리를 맞대 보았지만, 경제와 경영에 무지하고 신문이라고는 딴지일보 밖에 안 보는 네 명의 20대가 할 수 있는 생각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 한계 내에서 얻은 최대치의 성과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빈둥빈둥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얻어냈다. 재미있는 글이나 사진을 공유하는 한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추억의 불량식품 쫀디기 몰.
어린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 먹던 다양한 불량식품 25종을 박스에 담아 9,900원에 배송해주는 쇼핑몰을 발견한 것이다.
와, 이거 대박이다! 우리는 당장 그들을 따라 쇼핑몰을 시작했다. 택배 상자를 주문하고, 경기도 곳곳에 위치한 물류창고를 돌며 각종 불량식품을 박스 단위로 구입해 사진을 찍어 불량식품 전문몰 '쫀드기닷컴'과 '아폴로닷컴'을 순식간에 오픈했다. 훗날 우리 사이트를 찾아주신 많은 분들이 '정말 재미있는 아이디어예요.'라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지만, 그건 전혀 내 아이디어가 아니었음을 이 자리를 빌어 분명히 밝힌다. 우리는 불량식품 온라인 쇼핑몰 업계의 2인자였다. 하지만, 절박한 상황에 힘입어 블루오션 단계에 재빨리 진입한 덕에 1인자 못지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직원은 물론 온 가족을 동원해 매일 500개 가량의 택배 상자 포장을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형편은 급속히 나아졌지만 주업인 팍시러브 운영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불량식품 쇼핑몰 사업을 남동생에게 넘기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글을 쓰고 사이트를 운영했다. 회원이 갈수록 늘어나고, 오프라인 모임을 원하는 사람들의 수요가 생겨났다. 그래서 팍시러브의 아지트 격이라 할 수 있는 작은 카페나 선술집이라도 마련해 볼까? 하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 운이 좋았다. 대체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방법을 찾기 시작하면, 크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내 앞에 그 방법이 선물처럼 슬며시 나타난다. 백수이던 남자 친구 J가 함께 오프라인 공간을 만들자며 부모님을 설득해 돈을 마련했다. 홍대 앞에 가게를 임대하고, J의 선배가 운영하던 회사에 인테리어를 맡기고, 어떤 컨셉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홍보할 것인지 계획을 짜, 상호를 정하고 간판을 붙이는데 걸리는데 두 달이 채 안 걸렸다.
지스팟이라는 가게 이름을 생각해 낸 것은 J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뜻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
홍대 정문을 바라보고 오른쪽은 클럽가, 왼쪽은 주로 미술학원들이 많은 학원가를 이루었는데 우리 가게는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학원가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건물 1층은 레코드점, 2층부터 4층까지는 미술학원으로 아주 깐깐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 건물이었다. 건물주의 아드님이 5층 사무실에 머물며 임대료와 공과금 미납 여부와 청소 상태 등을 관리했는데, 나는 그분이 지스팟의 뜻을 몰랐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신 건지 여부가 아직도 궁금하다.
늘 단정한 차림을 하고 조용조용 말하며, 웃지도 화내지도 않던 건물 관리인은 다소 선정적이다 생각되는 포스터가 외부에서 보일 정도로 붙어 있을 때에만 나타나 포스터를 떼어냈을 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았다. 덕분에 가게 내에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지만, 건물 내 학원을 출입하는 학생들이 볼 수 있는 지상의 세계에는 절대 드러나지 않도록 장사를 해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야한 가게 이름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중의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서 다들 알아도 모르는 척 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지스팟'이라는 이름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훌륭하다.
클럽 지스팟은 '공식 음란바'를 캐치프레이즈로 걸고 오픈했지만, 퇴폐업소를 기대하고 오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진정한 퇴폐업소들은 '물망초' '오션블루' '스카이' '음악과 대화가 흐르는 곳' 등 서정적인 상호와 광고 문구를 주로 사용하지, 대놓고 퇴폐나 음란 따위의 단어를 사용할 리가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란바를 표방한 것 치고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게 곳곳에 소소한 장치를 두었다. 이럴 테면, 메뉴판 왼쪽 면에 김홍도와 신윤복의 춘화를 부착해 제공한다던지, 마네킹에 SM 의상을 입혀 세워둔다던지, 소시지의 둥그런 앞부분을 귀두 모양으로 정교하게 조각해 튀기고, 매시드 포테이토를 아이스크림 스쿱으로 떠서 소시지 양쪽에 평행하게 배치한 후 그 밑에 샐러리를 장식하고, 화룡정점으로 귀두 모양의 소시지 앞부분에 허니 머스터드를 길게 뿌리는 안주를 제공하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공식 음란바라는 홍보에 호기심과 용기를 갖고 가게를 찾은 손님들은 대부분 처음엔 뭐 별거 없네하고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지 못 한 곳에서 음란함을 암시하는 각종 꺼리들을 만나면 화들짝 놀라고 키득키득 웃으며 그것을 매개로 한 대화를 시작한다.
클럽 지스팟이 오픈 직후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당시 팍시러브에서 기자로 일하던 조** 언니의 이상한 취미 덕분이다. 100명의 남성에게 각 세 가닥씩의 좆털을 기증받아 모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그녀에게 도대체 왜?라고 묻자, 그녀는 '그냥 재미있잖아.'라고 대답했다.
이런 취미를 가진 여성이 있다고 하면 대부분 그 여성이 털의 주인과 하룻밤을 보냈을 것이라 예상하기 마련이다. 그럼 100명의 남자들과 자겠다는 소리인가?라는 오해를 받기 쉽다. 하지만 그녀의 수집 방식은 간단명료했다. 친한 후배나 선배, 친구에게 "좆털 세 가닥만 뽑아줘 봐."라고 요구해서 주면 받고 안 주면 마는 식이었다. 소장 가치가 있는 털의 기준을 가르는 나름 엄격한 기준도 있었다. '반드시 흰색 모근이 포함되어 있을 것. 적어도 세 가닥 이상일 것'
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미친거 아니냐고 까르르 웃던 그날 밤, 우리는 '100인의 좆털 모으기 기획전'을 구상했다. 다음 날 아침 을지로에 가서 작은 나무 액자 100개를 구입하고, 일단 조 기자님이 모아 둔 10인의 털 - 각 세 가닥씩을 흰 종이에 핀셋으로 곱게 펴 붙여 액자에 담았다. 털이 움직이지 않게 고정할 방법을 찾느라 머리카락을 사용해 테스트를 하고, 고군분투하며 한땀한땀 전시물을 만들다보니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 없구나 싶었다. 대체 왜 우리는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건가?
100인의 좆털 모으기 기획전은 사실 우리가 언론에 인터뷰 한대로 대의명분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농담처럼 일을 벌여 놓고, 그에 맞는 합당한 명분을 찾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때마침 음란물을 가르는 영상물 심의 등급위원회의 판단 기준이 '음모의 노출 여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획일적이고 섬세하지 못 한 규제 기준 탓에 예술 작품이 음란물이 되고, 정작 누가 봐도 음란하기 짝이 없는 에로영화가 배우의 음모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피해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털을 모아 둔 액자 위에 '좆털은 과연 음란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벽 한 면에 10개의 액자와 기증자 이름을 붙이고, 빈 공간을 채워 줄 기증자를 모집했다. 많은 남자 손님들이 깔깔깔 웃으며 또는 의미있는 일에 대한 진지한 연대를 표하며 기꺼이 동참해주었다.
쓸데없는 미친 짓으로 취급되던 조 기자 언니의 유쾌한 수집행위 덕분에, 클럽 지스팟은 오픈 후 한 달 만에 도약의 시기를 맞았다. 각종 매스컴 인터뷰가 줄을 이었고, 팍시러브 회원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언론인과 여성계 인사, 흥미로운 꺼리를 찾아 헤매는 도시의 사냥꾼, 자유분방한 여대생들, 성 소수자, 지스팟이라는 간판이 재미있어 들어온 외국인들....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가게를 찾았다.
사업을 하면서 깨닫은 사실 중 하나는 '기회는 늘 즐거운 가운데 찾아온다.'는 것이다. 근심 걱정에 쌓여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 좋은 아이디어나 우연, 인연이 찾아오지 않는다. 걱정은 걱정을 부를 뿐,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원하는 그림을 상상하되, 그것에 이르는 길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오늘 하루에 충실하고, 즐겁게 웃으며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 한 기회와 인연으로 마법처럼 길이 열린다.
반대로, 사업이 좀 잘 된다고 해서 자만한 마음을 가지고 겉멋을 부리다 보면 망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모든 사업은 작던 크던 화초처럼 정성을 다해 키우고 관리해야 한다. 또한 나는 사업을 반짝이는 아이디어로만 해서도 안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이디어와 실행력은 빠른 성장의 계기가 될 뿐, 결국 본질에 충실하지 못하면 그 사업은 오래갈 수 없다.
수 많은 실패를 겪으며 지금은 알게 된 사실들을 그 당시에는 몰랐었다. 남편도 나도 한참 배울 게 많은 사업 초년생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