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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n 12. 2020

나는 왜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을까?

나는 일찍이 이성에 눈을 떠 연애를 많이 한 편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스치듯 만난 사람은 부지기 수고, 오랜 기간 교제하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도 서너 명 된다.  


연하남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있다지만, 나는 삶의 연륜과 여유가 묻어나는 연상남에게 더 끌렸다. 그래서인지, 사귀던 남자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탄탄한 직업과 능력으로 자수성가하여 30대에 자기 소유 빌딩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세상 로맨틱하게 하와이의 그림 같은 집 앞에서 청혼하던 미국남자도 있었다. 물려받은 재산은 없지만 사업 감각이 좋고, 부지런해서 이 남자라면 먹고 살 걱정은 없겠다 싶은 생활력 강한 남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다 떠나보내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파인 다이닝을 포기하고, 김밥천국을 택한 것이다.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도 연애는 꾸준히 했고, 인생을 한방에 역전시켜 줄 남자들과 결혼할 기회도 있었는데... 왜 나는 그들을 통해 내 인생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데 실패한 것 일까? '여자 팔자는 뒤웅박이다. 너무 나대면 팔자가 세진다. 좋은 남자 만나 가정을 잘 꾸리는 게 최고다.' 인생을 많이 사신 어르신들의 주옥같은 조언을 뒤로하고, 왜 나는 결국 나와 비슷한 처지의 남자를 선택하게 된 걸까? 


나에게는 반려자가 될 사람과 동일 선상에서 출발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 같다. 사회적 성취를 이루었거나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어 으쓱 한 맛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내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가 늘 초라하게 느껴지고,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맨날 얻어먹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똑같이 부담할 능력은 안 되니 마음이 편할리 없다. 사랑은 받았지만 곱게 자랐다고 할 수 없는 나로서는 많은 일을 겪으며 터득한 세상사의 진리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공짜는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연애를 많이 해보면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사랑은 한 때라는 것. 도파민의 환각에서 벗어나 제정신이 돌아오면 누구나 본전 생각을 한다. 상대방에게 베푼 만큼 보상받고 싶어진다. 치사해서가 아니라 그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남편의 능력에 기대어 살려면 늘 눈치를 살펴야 한다. 시댁의 도움을 받으려면 주말을 반납하고 며느리 노릇을 해야 한다. 친정에 어려운 일이 생겨도 내 맘대로 돕기 힘들고, 훌륭하신 남편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가사와 육아를 도맡아야 할 테니, 내 꿈은 한 켠으로 접어야 할 확률이 크다. 살다가 남편에게 치명적인 결함 (잦은 외도, 도박, 폭력 등)이 발견돼도, 내가 쉽게 자립하여 아이들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안되면 억지로 참고 사느라 한 평생이 허망해질 수 있다.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잘하는 것도 의미 있고 좋은 일이다. 누구나 잘할 수 있는 있는 쉬운 일도 아니다. 큰 굴곡 없이 곱게 사랑받으며 살 수 있다면 그 만한 축복도 없다. 단지 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뭐가 될지 모르지만 뭐든 내 이름으로 이루고 싶었고, 남편과 아이들의 들러리 역할로 세월을 흘려보내기 싫었다.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데 나도 1/2 만큼의 역할을 하고, 남편에게도 가사와 육아의 1/2 만큼의 역할을 요구하고 싶었다. 단칸방에서 시작하더라도 함께 출발하여 함께 발전해나가고 싶었다. 


J 는 나를 가장 나 답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의 믿음 덕분에 남들의 시선과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껏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Happily ever after (그 후로 쭈욱 행복하게 살았대요.)가 아니었다. 


살다 보면 불화가 끊이지 않는 시기가 있다. 특히, 아이가 어려 육아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할 때, 경제적으로 궁핍할 땐 사이좋게 지내기가 힘들다. 가정적인 남자를 남자답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 또한 넘기 힘든 산이었다. 


브런치 북 2권에서 소개할 나의 30대는 남편과 함께 살아 온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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