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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l 02. 2020

너희가 음란을 아느냐?

인생은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 삶의 큰 방향을 결정짓는 선로는 한순간의 사건이나 인연으로 부지불식간에 찰칵하고 바뀌는 일이 많다.


술기운에 욱해서 한 대 쳤을 뿐인데, 하필 상대방이 계단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사망하여 교도소에 갇히는 일도 있고, 이웃집 여자를 따라 독서모임에 갔다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 집과 가정이 파탄 나기도 한다. 우연히 읽게 된 한 권의 책을 계기로 출가를 하고, 연세어학당 앞에서 얼쩡거리다 만난 여인과 사랑에 빠져 난데없이 룩셈부르크로 이민을 갈 수도 있는 게 바로, 인생이다.


나의 20대 절반과 30대 절반, 무려 10년이란 세월을 바치게 만든 성인사이트도 잠깐 한눈 판 것을 계기로 엉뚱하게 시작됐다. 2000년 중순, 뉴욕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작은 중소기업에 취직하여 해외영업 담당으로 근무하다가 사업 아이디어가 떠올라 막 퇴사를 한 무렵이었다. 해외 시장 진출을 꿈꾸지만 자체 무역 직원을 고용할 여력이 되지 않는 소규모 업체를 대상으로 무역 사무 대행 에이전시를 오픈한 것이다.


서초동에 월 40만 원짜리 소호 사무실을 임대하고 명함을 팠다. 야심 차게 시작한 사업인 만큼 본격적인 영업 전략을 구상하고 홍보에 박차를 가해야 했는데, 나는 초고속 인터넷의 풍요를 누리느라 하루의 반 이상을 딴지 일보를 읽는데 할애했다. 4대 일간지가 언론을 장악하던 시절, 당시 최초의 독립형 인터넷 신문이자, B급 좌익 언론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딴지일보는 내 영혼의 안식처였으며, 월세 40만 원을 빈둥거리며 낭비하게 만드는 악의 축이기도 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숙취에 시달리며, "아 본격적인 업무에 앞서서 머리를 좀 식혀볼까?" 하고 딴지일보를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기사의 제목은 [고발] 너희가 음란을 아느냐? 였다. 


기사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하루 아침에 폐쇄조치가 내려진 성인사이트 베드러브에 관한 것이었다. 음란물을 유통하는 사이트도 아니고, 성인들이 주축이 되어 섹스에 관한 담론을 나누는 공간인데 정확한 이유를 고지하지도 않고 폐쇄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음란의 기준은 무엇인가?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종류의 기사를 읽은 독자들 대부분이 그러리라 예상되듯, 나 역시 즉각 베드러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사이트 첫 화면에 까만 바탕에 흰 글씨로 '謹弔(근조)'라고 쓰여 있었고, 운영자는 정통위에 가처분 금지 신청까지 하며 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해 적극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야한 소설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교수가 강의 도중 체포되어 구속되고, 교수직을 박탈당하기까지 했던 엄중한 시절이었기에 (즐거운 사라를 썼던 마광수 연세대 교수는 1992년 체포되어 1995년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성인사이트 운영자의 반란과 이를 둘러싼 논쟁, 여론의 움직임은 꽤 흥미를 자아냈다.


딴지일보를 위시해 베드러브 회원들까지 가세해 표현의 자유 논란이 일자   당황한 정통위와 모종의 협의를 이끌어 냈는지, 베드러브는 '아름다운 부부의 성'을 부제목으로 한, <사랑의 침실 테크닉>으로 이름을 바꿔 사이트를 재 오픈했다.


정작 내용을 훑어보면 별 것도 없는데, 어쩌다 보니 이 곳은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투사로 언론에 소개되어 단기간에 엄청난 수의 회원을 확보했다. 출근 후 매일 머리를 식히고 있던 나 또한 그 회원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사이트 게시판에서 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30대에서 50대 사이의 아줌마, 아저씨들이었다. 19금 사이트인지라 야한 글도 있었지만, 그들은 표현의 자유보다 오프라인 만남을 꿈꾸며 이미지 관리에 힘쓴다는 인상을 줬다. 그렇지 않다면 성인사이트에 ‘추억의 선율과 함께 하는 시낭송’ 같은 것을 왜 올리냐 말이다. 


내 또래인 20대들이 많이 모여있는 방은 자칭 '작업의 귀재'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필명 '시티헌터'가 운영하는 게시판이었다. 내가 알기론 이 사람이 대한민국 픽업 아티스트계의 단군 할아버지다. 그곳에선 수많은 청년들이 길에서 여자 꼬시는 법, 채팅으로 외모 감별하는 법, 손가락으로 여자를 보내는 기술 등 다양한 작업 노하우를 시티헌터에게 전수받고,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며 끈끈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이 공유하는 노하우와 경험담을 읽어보자니, 시간이 많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나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내용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팍시러브>란 닉네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여자의 몸과 심리, 오선생을 만나는 매커니즘에 대한 잘못 된 상식과 오해를 정정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글을 썼다. 남자들의 과장된 무용담과 그 과정에서 유포되고 있는 왜곡된 사실을 지적하여 싸움을 걸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들이 깨달음을 얻고 사회로 나아가 좋은 애인이자 남편 역할을 해 주기 바랐다. 


나의 진심 어린 의도가 빛을 발했는지, 게시판 내에 나름의 팬층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여자들 또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게시판을 소리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세상에는 상상을 초월하게 개방적인 여자들도 많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시티헌터와 직접 만나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정말 그에게서 헤어날 수 없게 되는지' 테스트해 보고 싶다는 여성이 있었는데, 이들은 실제로 블라인드 데이트를 감행하여 하룻밤을 보낸 뒤 각자의 관점에서 상황을 글로 묘사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이들의 실험 정신에 경이를 표하긴 했지만, 남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보다 진중하게 글을 쓰고 싶어진 나는 시티헌터 게시판을 벗어나 '팍시러브'라는 이름으로 다음 카페를 만들었다.


회원은 1명. 아무도 읽지 않는 가운데 열심히 글을 썼다. 그것은 운명의 이끌림이었을 수도 있고, 무역사무대행업이 생각보다 나와 안 맞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정말 온종일 미친 듯이 글을 썼다. 그러자, 어디서 보고 들어왔는지 회원이 한 명 두 명 늘기 시작했다. 익명의 힘을 빌어 기탄없이 써 내려간 일기 같은 내 글을 보고, 그 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희한하게도 글을 쓰는 사람 대부분은 여자들이 었다. 남자들은 가끔 댓글이나 달며 구경을 하는 식이었다. 


회원이 점점 늘어 200명쯤 되어가던 어느 날, 카페 폐쇄를 알리는 메일 한 통이 날아들었다. 음란 카페로 분류되어 부득이하게 폐쇄 조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스포츠 신문 온라인 판만 봐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음경확대 펌프 광고가 번쩍번쩍하고, 야설이 판치는 주간 만화도 건재하게 가판대에서 팔려나가는 마당에, 야한 사진 한 장 없는 여자들의 일기 같은 글이 왜 음란물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진보는 억압을 통해 그 싹을 틔우는 법.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조치가 본의아니게 '사랑의 침실 테크닉'을 양성화 시켰듯, 다음의 카페 폐쇄 조치는 '대한 여성 오선생 찾기 운동본부, 팍시러브'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무역 사무 대행업은 단 한 군데의 거래처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그 와중에 라면 및 생필품 수출 업무를 위임해주신 가락시장 OO유통 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수중의 돈 200만 원을 털어 닷컴 회사(실제로는 닷넷)를 창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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