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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n 19. 2020

돌+아이도 사랑하라.

장사는 사람

클럽 배추가게의 오픈 당일. 50평 정도의 실내는 수 많은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일곱 대의 마이크를 설치한 드럼을 두드리며 샤우팅 창법을 구사하는 헤비메탈 밴드가 공연을 했지만 전혀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드락이나 헤비메탈이 소음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실력이 부족해서이지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실감했다. 쿵쿵 가슴을 울리는 밴드의 공연에 젊은이들의 함성과 열기가 더해지니, 홍대 어느 클럽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흥과 감동이 느껴졌다.


전단지 살포 때문에 주변 상가에서 민원이 빗발친다는 소식을 전하러 가게에 들른 작은 아버지마저도 헤비메탈 사운드에 맞춰 움찔움찔 몸을 흔드셨다. “야! 됐다. 됐어!" 하며 해맑게 함박웃음을 짓던 작은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대로 모든 것이 해피엔딩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라이프 고우즈 온 Life goes on~ 인생은 흐르며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오르막과 내리막의 사이클을  반복한다.


돌+아이도 사랑하라.


카페나 식당, 술집 등 낯선 사람을 무작위로 공간에 들여야 하는 업종을 운영하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세상에는 참 다양한 종류의 돌+아이가 있다. 그리고 그 수가 생각보다 많다.


클럽 배추가게에는 하루 평균 백 명 이상의 손님들이 찾아왔고, 그중 삼분의 일 정도가 주 3회 이상 방문하는 단골 고객이었다. 단골들 중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닌 분들이 네다섯 명 정도는 있었다. 통계로 따져보면 전체 고객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엄청난 비율이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모르는 사람과 절대 시비 붙지 말 것) 특히, 음악과 흥과 술이 있는 곳에선 내면에 잠자고 있던 돌+아이의 기질이 자유롭게 발현될 소지가 더 높다. 규모가 큰 클럽에 '기도(Bouncer)'가 있는 이유다.


배추가게는 규모가 크지 않아 '기도'를 둘 형편이 못 됐지만, 다행히 다섯 분의 고정 돌+아이 손님들이 폭력적인 성향은 없는 순한 캐릭터라서 우리는 그들을 내쫓는 대신 가게의 활력소로 삼으며 잘 어울리는 방향을 택했다.


알바생들끼리는 배추가게 돌+아이 Top 5 순위를 정하기도 했는데, 수개월째 1위를 달리고 있는 분은 '병만이 형'이라 불리는 성대모사 중독자였다. 당대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코미디언 이창훈이 '봉숭아 학당'에서 맹구로 활약하기 전, 유머 일번지 '맨손의 청춘'에서 연기했던 달용이를 아시는 분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달용이의 유행어 중 하나가 "병만이 형, 나, 칠성이 이렇게 셋이서..."라는 대사였는데, 그 넘버 1 손님은 매일 밤 10시쯤 되면 술을 한잔 먹고 나타나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그 성대모사를 해댔다. '병만이 형'과 대화를 나눠본 사람이라면 처음엔 당황스러움,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과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다가, 나중엔 그저 지긋지긋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왠지 궁금하고 허전했다.


넘버 2 역시 거의 매일 찾아오는 손님으로, 술은 거의 안 마시는데 늘 눈이 반쯤 풀려있었다. 노래를 소리 높여 따라 부르고, 히죽히죽 웃다가 화장실 옆 으슥한 뒷 문 쪽을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사람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대마초 등의 환각물질에 취해있지 않았나 싶다.  


그때는 왜 자꾸 이상한 사람들이 꼬일까? 가게 터가 안 좋은가? 싶었는데, 몇 년후에 다시 가게를 운영해보니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디나 마찬가지다. 특히 술집은 원래 또라이에 더해 멀쩡하던 사람이 알코올 기운에 정신줄을 놓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에 젊은 여성이 혼자 감당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다.


다행히, 배추가게에는 평균 서너 명의 아르바이트생 이외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밴드 멤버들이 항상 진을 치고 있었기에 나는 천군만마를 거느린 기분으로 일할 수 있었다. 밴드 청년들은 멋진 연주를 들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연이 없는 중간중간 음악을 트는 DJ, 말썽쟁이 손님을 문 밖으로 모시고 나가는 경호원, 친구들을 우르르 몰고 오는 홍보요원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그들 중 가장 열심히 출근 도장을 찍은 것은 남자 대학생 네 명으로 구성된 아류 밴드(R U Band) 다.


클럽 배추가게에는 늘 오디션을 보고 싶어 하는 밴드가 줄을 이었다. 훌륭한 장비와 무대를 갖춘 것에 더해, (당시 밴드로 활동하다가 내 남편이 된 J의 증언에 의하면) 20대 여자 사장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특이성도 한몫을 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영업을 시작하기 전에 따로 시간을 빼서 오디션을 봐야 했다.


오디션을 보러 온 아류 밴드 네 명의 청년이 가게 문을 벌컥 열었을 때 내 눈에는 한 사람밖에 안 보였다.


연예인인가?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 미소년의 분위기를 풍기는 갸름한 얼굴에 반항아 같은 눈 빛. 하마터면 나는 오디션도 보지 않고, 합격을 외칠 뻔했다. 막상 연주를 들어보니 쓸만한 주자는 베이시스트뿐이었지만 나는 보컬에게 정신이 팔려 발을 구르고 푸쳐 핸즈업을 외치며 신명 나게 관객 역할을 해 주었다.


본 조비의 It's my life와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등 장르를 넘나드는 신나는 무대 매너로, 여학생 단골을 확보하는데 한몫 톡톡히 했던 아류 밴드는 드러머가 군대를 가는 바람에 아쉽게도 해체되었다. 베이시스트와 기타리스트, 보컬은 어쩔 수 없이 서빙 알바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새벽 두 시까지 함께 일을 하고 퇴근 후 포장마차에서 오돌뼈 볶음을 먹으며 끝말잇기를 하고 놀던 우리는 지금도 친한 친구다. 그중 잘 생긴 보컬은 내 남편이 됐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장사의 핵심은 사람 이라는 것.


클럽 배추가게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늘 활기찼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나의 비전문성 덕분이었다. 내가 뮤지션이 아니라는 것이 처음엔 핸디캡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하드락 그룹부터, 비틀스 커버 밴드, 어쿠스틱 통기타 가수, 드럼 단독 솔로 공연, 바이올린과 첼로 주자가 있는 7인조 재즈 그룹, 대중과 호흡하는 것을 최우선에 두고 장르를 넘나들며 외모로 승부하는 아류 밴드까지.


손님들은 각자 알아서 돈통에 입장료를 넣고 들어가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우리는 제대로 돈 안 내고 들어가는 놈 없나 철저히 감시를 하기보다 친구처럼 친근하려고 노력했다.


라이브 클럽의 단점은 공연이 끝나면 손님들이 싸악 빠진다는 것인데, 배추가게 손님들은 떠나지 않았다. 나가봤자 더 저렴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없고, 눌러있다 보면 정기적인 공연 외에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특히, 신나는 곡이 나오면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가게는 점차 클럽의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몇 달만에 배추가게의 매출은 당초 목표의 두 배를 웃돌았다. 건대 학생들은 홍대 학생들보다 확실히 술을 많이 마셨다. 맥주만 마시는 홍대 손님 층과는 달리 안주도 엄청 먹었다. 술은 편의점 가격이었지만 안주는 적당한 가격을 받았기에 마진이 꽤 높은 편이었다. 특히 우리 가게는 (지금은 건국대 병원으로 바뀐) 민중 병원 바로 건너편에 위치해 있어서 술 많이 마시기로 유명한 의사 손님들이 많이 왔다. 그들은 학생들만큼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을 미안해하며, 밴드 청년들에게 곧잘 맥주를 쏘기도 했다.


하루 평균 매출이 꾸준히 200만 원을 넘어서자, 매일 40만 원씩 입금만 시키면 가게 경영에 신경 쓰지 않겠다던 작은 아버지가 좀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내셨다. 내가 손님들과 노느라 카운터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안주를 너무 많이 준비해놔서 남는 것을 알바생과 밴드 청년들에게 퍼 주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가게 영업이 끝나면 후딱 청소를 하고 집에 갈 것이지, 전기세도 비싼데 불을 다 켜고 가게에서 놀아야겠냐고 화를 내셨다.


지금 생각하면 다 맞는 얘기다. 나는 너무 철이 없고 희희낙락했다. 작고 기본적인 것들을 소홀히 하면 결국 큰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나의 잘 못은 달리 변명할 여지도 없는 것들이었기에 입을 꾹 다물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조용히 불러 어렵게 꺼내놓으신 말 때문에, 나는 그 훈계들이 순수히 조카를 바로잡기 위한 의도였는지 한동안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돈을 만지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으니, 다시 월급제로 일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냥 거기까지만 말씀하셨으면 '집안 어른의 입장에서 나의 흥청망청함이 걱정되셨을 수도 있겠다'라고 애써 좋게 받아들이려 했을 텐데, "작은 엄마 생각이 그렇더라."라는 한 마디가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스스로 떳떳하지 않으시구나.


섭섭하지만, 고생하면서 배운 것도 많고 작은 성공의 경험도 했으니 아쉬울 것은 없었다. 인수인계할 사람을 구해달라고 했을 때 작은 아버지는 '네가 나를 이렇게 배신하고 떠날 수 있냐?'라고 하시며 진심으로 크게 실망하셨다. 내가 가게에서 맨날 재미있게 노니까, 월급제든 뭐든 계속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더 큰 실수는 나를 대신해 가게를 운영할 후계자로 반듯한 교회 청년을 영입했다는 것이다. 무대가 있으니 밴드는 꾸준히 올 것이고, 안주를 내 가고 테이블을 치울 서빙 아르바이트는 대학가 앞이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 사장을 대신 해 성실하고 정직하게 돈 관리만 잘하면 가게가 굴러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인수인계를 하는 동안, 새로운 매니저가 어디서 시디를 가져왔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트는 것을 보고 나는 가게가 머지않아 망할 것을, 적어도 우리가 사랑하던 배추가게는 곧 사라질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작은 아버지께 '술을 파는 곳의 운영자는 너무 반듯하면 곤란하다. 성격은 바꾸기 힘드니, 머리라도 노랗게 염색을 시키시라.'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마지막 조언을 드렸지만, 사람보다 시스템을 중시하는 작은 아버지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매니저는 청소를 열심히 하고, 전단지를 만들어 열심히 돌리고, (알바들은 금전 출납기에 손을 못 대게 하라는 사장님의 지시를 지키느라) 카운터를 철통같이 지켰지만 그 덕분에 점점 사람들이 떠나갔다고 한다. 알바생들이 가장 먼저 떠났고, 그 알바생들과 친하게 지내던 단골손님들이 떠났다. 관객이 없는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싶지 않은 밴드들도 점점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나보다 좀 더 오래 배추가게를 지킨 미소년 보컬 알바생 J 의 증언이다.


나는 한동안 작은 아버지를 책망했지만, 마흔일곱이 된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작은 아버지는 자기답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다. 많은 가게를 관리해야 하니 시스템으로 경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인사에 실패했고, 시스템 경영 방식이 소규모 클럽 운영에 안 맞았을 뿐이다. 작은 아버지는 당시 까마득한 어른처럼 느껴졌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도 좌충우돌하며 사업과 인생을 배우는 중이었다.


사랑하는 작은 아버지는 60대 중반에, 작은 어머니는 그보다 훨씬 일찍 50대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두 분 모두 고생고생하다 좀 살만하니 병들어 세상을 떠나셨다, 작은 아버지의 꿈은 번듯한 호텔을 짓는 것이었다. 호텔은 아니지만 훗날 제주도에 타운하우스를 40채나 지은 조카를 보셨다면 아주 많이 자랑스러워하셨을 텐데, 살아계실 때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그게 가장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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