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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n 17. 2020

월급 200만원 vs 매출의 20%

비디오방 업계의 큰 손

작은 아버지는 아빠 쪽 삼 형제 중 유일하게 사업 수완이 좋은 분이셨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어린 시절 가족이 다 함께 피난을 내려와 판자촌에 사셨다고 한다. 생활력 강한 할머니가 행상을 해서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두면 집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할아버지가 어디선가 나타나 모아둔 돈을 훔쳐 달아나는 패턴이 반복돼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어릴 적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늘 멋쟁이셨다. 날이 선 정장 차림에 흰색 구두를 신고 기타를 들고 다니는 분이었다. 피부도 하얗고 귀티 나게 생기신 분이 왜 할머니처럼 까맣고 쭈글쭈글한 여자랑 결혼을 했을까? 늘 의아했다. 아빠에게 듣기로는 할아버지의 꿈이 가수였다고 한다. 할머니가 집 사려고 모아둔 돈을 슬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에 가서 데뷔 앨범을 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데뷔는 못 하시고 노래자랑에서 받은 커다란 괘종시계 하나만 유품으로 남기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늘 원수 놈의 자식이라고 불렀지만 괘종시계만큼은 버리지 않고 잘 간직하셨다.


가정을 등한시하는 딴따라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큰 아버지와 우리 아빠는 허무주의자가 되셨고, 작은 아버지는 집안을 어떻게든 일으켜보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갖게 되었다. 새벽에 생선을 떼다 리어카로 팔고, 야간에 제본소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망해가는 정육점을 싸게 인수한 것이 사업의 시작이었다고한다. 당시 30대였던 작은 아버지 내외는 정육점에 딸린 한평 남짓한 쪽방에서 생활하며 어린 내가 봐도 남다르게 장사를 하셨다.


매일 새벽 마장동에 나가 좋은 고기를 골라오고, 나간 김에 청과물 도매시장에 들러 과일과 야채도 떼다 가게 앞에 놓고 파셨다. 작은 아버지가 그날 팔 물건을 떼러 간 사이 작은 어머니는 전날 팔다 남은 고기로 돈가스, 양념 불고기 등을 만드셨다. 지금은 반조리 식품이 흔하지만, 당시 정육점으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망해가던 정육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바쁠 때는 울 엄마까지 일을 도와야 했다. 덕분에 나는 쪽방에 앉아 가게 돌아가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장사가 잘 되자, 시장통 안에 있는 더 큰 정육점으로 확장 이전을 하셨다. 정육점 대여섯 개가 모여 있는 일명 정육점 골목이었는데 엄마 말로는 사람들이 염치도 없이 작은 아버지의 돈가스 아이디어를 금세 카피했다. 차별화가 필요했던 작은아버지는 가게 앞에 '수입육 전문'이라고 크게 써 붙이고, 저렴하면서도 때깔이 좋은 수입육만 파는 전문화 전략을 취했다. 다들 '한우 전문'이라고 써 붙이고 가짜 한우를 비싸게 속여 팔던 시절에, 작은 아버지의 정공법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싸고 맛있기만 하다면 사람들은 한우든 호주산이든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는 '뭘 해도 남보다 한 걸음씩 앞서 나가는 양반'이라며 작은 아버지의 수완과 부지런함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다. 이야기의 마무리는 늘 '니 아빠랑은 어떻게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냐'는 거였다.


허무주의자인 아빠는 뭘 해도 "그게 되겠냐?" 하는 식이었는데, 작은아버지가 세 번째 정육점을 정육점 식당으로 성공시키고 아빠에게 "형이 좀 해보시겠냐?"라고 제안하자 마지못한 척하며 가게를 인수하셨다.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작은 아버지의 의지는 둘째 형님 딸인 나에게도 손을 뻗쳤다. 건대 앞에 좋은 가게 자리가 있어서 경양식 집을 해 볼까 하고 인테리어까지 다 해 놨는데 마땅한 운영자가 없으니 네가 한 번 해보면 어떻겠냐는 거다.


당시 작은 아버지는 장안동 정육점계에서 벗어나 건국대 앞 비디오방 업계의 신화적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참이었다. 고기를 납품하던 업자가 '건국대 앞에 비디오방이라는 게 생겼는데 그게 요즘 뜬대'라고 한 마디 한 것을 놓치지 않고 기회로 삼은 것이다.


작은 아버지의 프런티어 정신은 비디오방 업계에서도 빛을 발휘했다. 당시 커튼으로만 되어 있던 비디오방 칸막이를 정식 나무 칸막이로 교체한 시초가 (내가 알기론) 우리 작은 아버지다. 덕분에 비디오방은 젊은이들이 영화를 보며 몰래 뽀뽀나 한 번씩 할 수 있는 곳에서, 보다 적극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혁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칸막이를 아예 방으로 바꾸고, TV대신 벽면을 가득 메운 영사식 초 대형 스크린을 설치했다. 돌비 서라운드 입체음향에 거의 침대나 다름없는 대형 소파를 최초로 설치한 것도 내가 알기론 우리 작은 아버지다.


집과 가게 밖에 모르고 교회를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양반이 어디서 그런 영감을 얻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지만, 암튼 업계에 발을 들인 지 몇 년 만에 건대 앞과 신천에 총 11개의 업장을 거느리며 비디오방 계의 미다스의 손이란 칭송을 들었다.


하지만, 정작 작은 아버지 본인은 그런 칭송이 쑥스러우셨나 보다. 누가 "무슨 사업 하세요?"하고 물으면 당당히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해야 하는 것이, 더구나 딸자식이 점점 시집갈 나이가 되어 가는 것이 못내 신경 쓰이셨던 것 같다. 난데없이 경양식 집을 하겠다고 가게를 얻으신 것은 순전히 '경양식 집 사장이 되겠다.'는 이유 때문이었기에, 당시 나이가 스물둘에 지나지 않고 장사 경험도 없는 조카에게 덜컥 일을 맡길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해본다.  


작은 아버지는 월급 200만 원과 매출의 20%를 가져가는 조건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장사 경험 없고 한없이 낙천적인 20대들이 그렇듯 나는 '하루 30만 원 팔면 월 180. 40만 원 팔면 240, 50만 원이면? 아싸 300만 원이네?'이렇게 세상 단순한 논리로 후자를 택했다.


경양식 집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는 인테리어에 5,000만 원을 들였고, 돈가스 고기도 최상급인데 뭐가 문제냐며 짜증을 좀 내시다가 마음을 비우고 경양식집 사장이라는 타이틀에만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으셨는지 언젠가부터는 잘 나타나지도 않으셨다.


첫 사업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다가 끝낼 수는 없었기에, 고심 끝에 내가 잘 아는 분야로 업종을 바꾸겠다고 통보했다. 작은 아버지는 나이트 사장이 되려고 가게를 얻은 건 아니라며 결사반대하셨지만, '클럽'은 나이트와 다르며 홍대 앞 예술가들과 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새로운 문화 공간이라고 설파했다. 1997년 당시, 홍대 학생들이 테크노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자유로운 외국문화를 경험하고 삶의 지평을 넓히고 있을 때, 건대 학생들은 닭갈비집에서 '지화자'를 외치며 막걸리를 마시는 것 밖에는 다른 스트레스를 풀 장소가 없다는 점도 어필했다. 뭐든 새로운 것을 시도하길 좋아하는 작은아버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한 번 해보자' 하셨고, 애꾿은 주방 이모는 돈가스 한 장을 못 튀겨보고 해고되었다.


클럽에서 많이 놀아 본 것과 클럽을 직접 운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홀서빙과 주방을 넘나들며 멀티태스크를 소화해 봤다고 해서 가게 사장 역할을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몇 달간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실전의 경험이 쓸모없지는 않다. 남대문 어딜 가면 미군부대에서 빼돌린 B자 맥주와 양주를 살 수 있는지, 안주 재료를 납품하는 업자들과 어떻게 거래를 해야 하는지, 심야영업 단속에 걸려 경찰서에 끌려가면 어떻게 조서를 안 쓰고 버틸 수 있는지 등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당시에는 통했던 다양한 술집 사장들의 스킬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준비해 둔 술과 안주를 사 먹으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지나치게 패기가 넘쳤고, 클럽에 관해서는 내가 잘 안다는 자만심까지 겹쳐 대학가마다 문화가 다르고, 그 지역의 수요와 시장조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새로운 것을 전파할 때는 파격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 게다가 단지 캐나다인이라는 이유로 DJ를 맡긴 데이빗의 취향을 거르지 않고 반영하면서 - 테크노 + 고스 뮤직(Goth music)을 틀고, 지나치게 전위적이고 음산하고 무서운 분위기가 감도는 공간을 만들어버렸다.



고딕 뮤직이란? 주로 죽음과 어둠을 소재로 하며, 앨범 재킷에 해골이나 피 묻은 십자가 등이 주로 등장하는 음악이라 생각하시면 간단하다.
출처 : pixabay / 인터넷에서 찾은 데이빗 닮은 사람


테이블과 의자는 최대한 한쪽으로 치웠지만, 아직 경양식집 분위기가 남아있는 실내 벽에 데이빗과 나는 락카를 사다가 온 천지에 낙서를 했다. 디제이 부스를 만들어 철창을 씌우고, 해골 인형을 데롱데롱 매달아놨다.


개업식도 못 했으니 기도라도 해 준다며 작은 아버지 내외가 교회 목사님과 집사님, 권사님들을 모시고 가게를 방문하신 날이었다. 당황한 목사님의 우렁찬 기도 와중에, 빨간 글씨로 벽에 쓰인 "God is dead"를 발견한 작은 아버지는 나를 주방으로 불러 불같이 화를 내셨다. 클럽이 이런 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비디오방 사장으로 남는 게 날 뻔했다는 듯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그 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건대 앞 고딕 클럽은 대 참패를 거두었다. 월간 매출이 50만원도 안 됐다. 매출의 20%인 10만원을 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도회 이후로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가게에 발을 끊으셨던 작은 아버지는 한 달 만에 나타나 말씀하셨다. "이대로는 안 돼. 클럽은 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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