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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n 16. 2020

방황과 열정사이, 홍대 클럽 1세대

미국 이민자들 사이엔 이런 말이 있다. “처음 미국땅에 발을 디뎠을 때 누가 마중을 나오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직업이 결정되지. 세탁소 하는 사람이 마중나오면 세탁소를 하게 될 확률이 높고, 리쿼샵하는 사람이 마중나오면 리쿼샵을 하게 된다니까.” 


공교롭게도 나는 술집에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뗐다. 1993년 말 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한창 원서를 쓰기 시작할 무렵. 신촌 연세대학교 앞에 있는 작은 라이브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허풍이 좀 있는 사장님은 봄여름가을겨울, 이소라, 김건모 등 걸출한 뮤지션을 배출한 곳이라며 ‘이런 아르바이트 자리도 쉽지 않다.’라는 것을 재차 강조했지만, 사실 배출했다기보다 음악인들이 돈 안 받고 자기들끼리 기타와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노는 곳이었다.  


나의 주요 업무는 오프닝 청소와 서빙, 안주 만들기. 그리고 몇 달이 흘러 사장님께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밤 12시 이후 1층 입구에서 망을 보는 일도 가끔 주어졌다. 1층 계단 앞에 무심하게 서 있다가, 심야영업 단속이 뜨면 벽에 부착된 버튼을 몰래 누르고 딴 청을 부리는 나름 연기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손님이 오면 반갑게 웃으며 지하로 가는 문을 살짝 열어줘야 하기 때문에, 단골손님을 어느 정도 파악한 고참들만 그 일을 소화할 수 있었다.


새벽 2시에 영업이 끝나면 청소를 하고, 청소가 끝날 때까지 괜히 남아서 얼쩡거리는 뮤지션 오빠 언니들을 따라 홍대 우동집에 가서 밤새 어울렸다. 난 그때 술도 못 마셨지만, 어른들의 (그것도 뮤지션들의) 세계에 끼어 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거의 매일 동틀 무렵이 돼서야 집에 들어갔다.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 3교대 간호사도 아닌데 늘 새벽에 집에 들어오는 열아홉 살짜리 딸을 보는 부모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야간 아르바이트를 허락한 것은 순전히 집에서 백발자국 거리라는 사실 때문이었지만, 나는 일이 끝나기 무섭게 동네를 벗어났다.


처음엔 엄마가 가게 앞에 지키고 서 있다가 집에 데려가기도 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기다리시기도 했다. 집에 들어서면 총채를 휘두르며 "나가, 이 년아!" 하고 소리를 지르셨지만, 오늘도 무사히 귀가한 딸년을 보며 속으로는 큰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엄마는 윽박과 협박으로는 다 큰 자녀를 교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점점 마음을 비우셨다. 성당에 다니며 기도를 열심히 하시더니 어느 날엔가는 "나는 내 딸을 믿어" 라며 머리가 떡지도록 놀고 온 딸을 꼭 껴안아 주시기도 했다. 얼굴에 걸레를 집어던지며 소리치던 그분은 어디 가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기도가 통했는지 나는 대학 입학 후 술집 알바 생활을 정리했다. 


술집은 알바가 아닌 고객의 입장으로 가고 싶었기에.



홍대 클럽을 떠돌다.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중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신촌 연세대학교 앞에 살았다. 재학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시위가 극에 달한 80년대 후반, 당시 6학년이던 나는 전경을 피해 주변 민가로 도망쳐 온 학생들을 숨겨주고 코 밑에 치약을 발라 마스크처럼 크린랩을 씌워주던 엄마의 활약상을 또렷이 기억한다. 


엄마가 학생들과 살을 부대끼며, 수 년간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건만, 나는 문 열면 바로 닿을 수 있는 연세대학교를 두고 1호선 인천 주안역에서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20분을 더 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인하공업전문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홍대 클럽 '죽순이'가 된 것이 학교가 너무 멀어서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아예 영향이 없었다고 볼 수도 없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특히, 1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신도림 역에서) 꼭 한잔하러 가자고 꼬시는 친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항공운항과 학생들은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주제에 벌써 승무원이라도 된 양) 풀 메이크업을 하고 학교에 다녔다. 한마디로 언제나 제대로 놀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뜻. 


신촌에 우드스탁이라는 술집이 있다. 2022년인 올해 31주년을 맞는 맥주집 계의 노포다. 신촌에서 좀 놀아본 70, 80년대 생이라면 아실 수도 있겠다. 바 한 면에 LP판이 가득 꽂혀 있고, 나무 의자와 테이블, 벽면이 온통 낙서로 뒤덮여 있는 곳.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김어준 닮은 사장님이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신청곡을 받기는 하지만 대부분 자기가 틀고 싶은) 올드락을 고막이 터지도록 크게 틀어주던 곳. 


나는 1994년부터 우드스탁의 단골이다. 돈 없는 대학생 시절, 이 곳에선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7,000원짜리 맥주 피처(2000cc) 하나를 시켜놓고 하염없이 놀 수 있었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맥주를 2,000cc만 마시고 일어난 일은 거의 없다. 밤 9시쯤 되면 30평 남짓한 가게가 사람으로 꽉 차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옆 테이블 사람들과 자연히 말을 섞게 된다. 음악을 대화 불가 수준으로 크게 트는 곳이라, 서로의 귀에 입을 바싹대고 꼭 안 해도 될 얘기를 굳이 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된다. 물론, 여자끼리 가면 옆 자리의 남자들과 더 신속하게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남자 친구와 가도 결국은 주변에 앉은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부킹과는 다른 우드스탁만의 문화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테이블에 보이는 아무 술이나 따라 마셔도 서로 개의치 않게 된다. 보통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접대라도 하듯 술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 피처 하나 더요!" 하고 주문을 하는데, 이런 호기로운 분들은 왼쪽 테이블에도 있고 오른쪽 테이블에도 있어서 우리는 가끔 일어나 춤을 추며 신나게 마셔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거의 밤 12시까지 목마르는 일 없이 신나게 놀 수 있다. 실로 오병이어의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드스탁에서 맥주로 배를 채우고, 바람을 맞으며 30분 정도를 걸어 홍대로 간다. 클럽을 향해! 


나는 음주가무를 좋아했지만 나이트클럽은 싫어했다. 마지못해 억지로 끌려가는 척 하는 여자들과 후궁을 간택하는 의자왕이라도 된 듯 거들먹거리지만 사실상 호구짓을 하고 있는 남자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었다. 그에 반해 홍대 클럽은 신선했다. 정말이지 태초의 클럽은 대놓고 부비부비를 하는 노골적인 곳이 아니었다. 각자 벽을 보며 혼자 춤을 추고, 땅바닥만 보고 가만히 서 있거나, 고양이처럼 폴짝폴짝 뛰거나,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춤이고 아트이고, 퍼포먼스로 인정해주는, 그야말로 해방과 자유 그 자체였다. 


클럽을 가장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건 학교를 졸업하고 항공사 승무원 생활을 시작했을 때였을 것이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직해 놓고도 나는 하루하루가 지겨웠다. 매일 손톱 검사를 받고, 머리를 스프레이로 고정시키는 것. 불편한 선배와 한방을 쓰며 마음에 없는 미소를 짓는 것. 새벽에 출근하는 것. 비닐로 만든 기내화가 너무 작아 매일 발이 퉁퉁 부었던 것. 여자들만 모여있는 집단 특유의 싸한 공기. 눈치보기. 


무엇보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건 그 곳이 대기업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렵게 들어간 만큼 그만 두기 쉽지 않은 직장. 이 곳에서 5년쯤 일하고 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내 꿈은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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