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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n 16. 2020

K항공 승무원, 4개월만에 사표쓰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회사 다니지? 후회 할 텐데…”


퇴사 사유란에 한 줄로 쓰인 "뮤지컬 배우 준비"라는 문장을 보고, 우리 기수 교육을 담당해주시던 선배님이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포부도 당당하게 락커의 짐을 쌌다. ‘맞지 않는 신발에 발을 끼워넣는대신, 나만의 방식으로 꿈을 이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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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졸업한 학교는 대한항공을 계열사로 두고 있는 한진 재단에서 설립한 직업 훈련 대학이다. 항공사 공채 입사 조건은 매우 까다롭기로 알려져있지만, 이미 직업교육을 마친 항공운항과 졸업생들은 특채 전형이 따로 있어서 비교적 입사가 수월한 편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엔 졸업생 200명중 100~150명 정도가 대한항공으로 취업을 했다.


그래도, 내가 입사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은 과 친구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외국어를 제외한 내 평균 성적은 D학점이었다. 수업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과제도 늦게 제출하고, 숙취에 늘 시달리는 불성실의 아이콘인 A반 이연희가 합격이 됐다고? 하며 다들 어이없어 했다. 합격한 게 내 잘못은 아니지만, 동기들에게 괜히 미안했다.


면접관 중에 관상 전문가가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맞며느리같이 후덕한 내 인상이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우리과 애들은 다들 참 예뻤다. 이미 스튜어디스가 된 것 처럼 날씬하고 화장도 잘 했다. 나는 과에서 좀 겉도는 외모였다. 내가 활동하던 테니스 동아리의 남자 동기들은 신입 후배들에게 나를 '항공정비과'라고 소개하곤 했다. 그럼 다들 '아, 네.'하고 믿어버려,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뭐한 상황이 되고 만다.


나의 편안한 외모가 보수적인 회사의 면접관들에게는 가산점이 됐을 수 있다. 너무 예쁘거나 똑똑하면 탈락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예쁘면 금새 퇴사하고, 똑똑하면 데모 주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는거다. 실제로, 연예인처럼 예쁜 동기들 몇 명과 똑똑한 과대표가 입사 면접에서 떨어져 소문에 설득력이 더해졌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면접관 중 한 분이 나에게 80년대 소개팅에서나 할 법한 질문을 하셨다. "취미가 뭐예요?" 나는 학교에서 배운 기내방송용 목소리로 "사물놀이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틈날 때 마다 클럽에서 노느라 따로 취미랄게 없었지만, 그렇다고 음주가무라고 대답할 수는 없기에 중고등학교 시절 성당에서 배웠던 사물놀이를 떠올린 것이다. 나는 장구 파트를 맡았었다. 그러자 면접관이 앞에 놓인 서류에 뭔가를 적으시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반문하셨다. "그럼 북치면서 데모나 하는 거 아니야?"


풍물패 활동을 성당에서 하긴 했지만, 연세대학교에서 시위를 주도하던 주일학교 선생님들께 배운 것이기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이 분은 점쟁이인가? 하지만, 나는 '농담도 잘하셔'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승무원 처럼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르신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느라 성당에서 배웠습니다."


잠재적 데모 주동자 혐의를 벗고, 무사히 입사를 했다. 2개월간 교육원에서 체력 테스트를 포함한 이런저런 추가 시험을 통과하고, 정식 발령을 받은 지 4개월만에 사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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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에 몸부림치기까지 채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선배님의 말씀이 맞았다. 좀 더 참고 다녔어야했다. 통장에 잔고를 확인 할 때 마다 불안에 몸이 떨렸다. 구인 정보지를 뒤지며 ‘내가 미친년이지. 내가 미친년이야.’하고 가슴을 쳤다.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꿈이 거짓은 아니었다. 항공운항과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 꿈은 연극배우였다. 한국종합예술대학 연극원 수시모집에 응시해 2차까지 합격했다. 최종 실기 시험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은 날 다짐했었다. 빨리 졸업하고 돈을 모아 유학을 가리라. 보란 듯이 해외에서 연극배우로 성공해 나를 일찍 알아보지 못 한 교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리라. 그래서 나는 지원했던 4년제 대학을 모두 포기하고, 빨리 졸업해 승무원으로 취업할 수 있는 전문대 항공운항과를 선택한 것이었다.  

 

계획대로 취업을 했으니, 성실히 일해 적금을 부으며 유학 준비를 해야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을 참아내지 못했다. 소가 끌려가는 기분으로 출근을 하고, 불평을 하고 술을 마셨다. 아무 계획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불안하니 '내 꿈은 뮤지컬 배우야. 유학을 가지 않아도 꿈을 이룰 방법이 있을거야’ 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별안간에 노선을 수정했다. 사표를 내던지던 순간에도 내 영혼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미 꿈이 바래지고 있다는 걸. 유학을 가서 배우가 되겠다는 다짐은 막연한 계획이었을 뿐, 간절한 소망이 아니었다는 걸.


어쨌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뮤지컬 계로 뛰어든 친구에게 연락해 재즈댄스 레슨을 시작했다.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지루한 무한 반복이 계속 됐다. 클럽에서 춤을 추는 것을 라면 끓이기에 비유한다면, 재즈댄스는  궁중요리를 배우는 과정과도 같았다. 뮤지컬 배우가 되려면 궁중요리 뿐만 아니라, 한복도 만들고, 서예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종합엔터테이너가 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수년간 거칠 각오를 해야한다. 그런데 시작한지 3일만에 지긋지긋해졌다.


턴 연습 중 다리가 삐었다는 핑계로 레슨 약속을 안 지키기 시작했다. 클럽은 신나게 다니면서 연습은 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며, 가까이하면 안 될 인물이라 생각했는지 그 친구는 이후 나와 연락을 끊었다. 댄스, 판소리, 재즈 보컬 등 끊임없이 자기를 연마한 그녀는 2013년에 뮤지컬 대상 여우 조연상을 수상했고, 지금은 뮤지컬 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중견배우로 성장해 있다.


긴 방황의 나날이었다.


기내 땅콩을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은근히 딸이 승무원임을 과시하던 부모님은 실망이 대단했지만 늘 “우리 딸은 잘 될 거라 믿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의 따뜻한 응원과 믿음이 갈팡질팡하던 나를 늘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던 것 같다.


고마운 부모님이지만 생활비를 보태드리진 못 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클럽과 술집을 다니다 보면 땡전 한 푼 안 남았다. 하지만, 인생에 그냥 허비되는 시간은 없는 법. 방황의 기간 밤낮없이 쏘다니던 유흥의 경험이 훗날 커리어에 밑거름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6개월간 호주에서 노숙인으로 생활하다가 한국에 돌아오니, 건대 앞 비디오방 업계의 큰 손이던 작은 아버지가 연락을 주셨다. "너 나랑 같이 일 좀 해보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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