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새벽, 늦잠을 자는 아내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산책 삼아서 마을 길을 걸었다. 지독했던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공기도 이제 수그러져서 제법 선선해졌다. 어스름한 들녘에는 벼들이 노랗게 익어서 고개를 떨구고 이름 모를 철새들이 높고 낮게 날아다니며 맑은 소리로 노래했다. 지평선 너머 숨은 태양이 하늘에 걸린 구름들을 마치 노을빛처럼 붉게 물들였다. 어디선가 계수나무 단풍잎의 달콤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농로는 구불거리며 논과 밭 사이를 흘러서 앞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고 있었다. 저 고갯마루에 서면 곧 다호리 고분군이 한눈에 바라다보일 것이었다.
‘툭’하는 소리가 길옆에서 들려 고개를 돌리니 수십 년은 돼 보이는 둥치 큰 밤나무에 밤송이들이 가득했다. 조금 전 바닥에 떨어진 밤송이 틈새로 구릿빛 알밤이 수줍게 반짝였다. 맞은편으로는 감나무 과수원이 펼쳐져 있었는데 여름 극심한 더위와 작열하는 태양빛을 이겨내고 실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과수원 농막에서는 인기척을 느낀 잡종견이 목줄을 팽팽히 당기면서 쉰 목소리로 컹컹 짖어댔다. 그 소란에 꾸벅이며 졸고 있던 고즈넉한 산기슭이 기지개를 켜며 새벽안개를 하품처럼 내뱉었다.
언덕에 섰다. 눈앞이 확 트이면서 발아래로 넓게 펼쳐진 들판과 주남저수지가 보였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로에는 차량들이 간간이 지나다니고 불 켜진 삼거리 슈퍼에는 이른 아침 손님이 들었다. 슈퍼 너머로 다호리 고분군의 들녘이 보였다. 이발을 한 듯 제초작업으로 매끈해진 들판 중간중간에 꽃다발 마냥 일부러 남겨놓은 갈대들이 한창 갈대꽃을 올렸다. 오래전 그 옛날, 아마도 이곳은 온통 갈대로 뒤덮였을 것이다. 저수지, 새, 그리고 갈대. 다호리에는 아직도 쇠락한 소왕국이 갈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1988년 무렵만 해도 도굴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어떤 사람이 고미술품을 들고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내놓은 물건의 가치가 크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당시 정양모 학예실장은 어디서 났는지 캐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도굴꾼으로부터 구했다는 것과 10억 원에 물건을 구입하지 않으면 출처를 절대 알려줄 수 없다며 정색했다. 박물관장과 학예실장은 당시 빈약한 예산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큰 금액이라는 한계상황, 고고학적 중요성과 함께 출처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깊은 시름에 빠졌다. 이윽고 떠오른 한 사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찾아갔다. 가만히 사연을 듣고 있던 이 회장은 비서실장을 불렀다.
“두 분이 원하는 걸 해 드리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비서실장에게 지시한 그의 한마디였다.
유물의 출처를 알게 된 국립중앙박물관은 급히 현지에 학예연구사들을 파견했는데 그곳은 바로 경남 의창군(현재 창원특례시) 동읍 다호리였다. 현장을 방문해 보니 원삼국시대 고분 40~50기가 무참히 파헤쳐져 있었고 게다가 도굴꾼들의 ‘실습장’으로 불리고 있었다. 학예연구사들은 시급한 마음에 구덩이가 제일 큰 곳을 먼저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추운 겨울, 솟아오르는 물을 퍼내면서 아래로 파내려 가자 놀랍게도 통나무로 된 목관이 나왔다. 2000여 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썩지 않은 그 목관은 추후 우리나라 발굴사상 제일 오래된 목관으로 밝혀졌다. 아쉽게도 목관은 도굴된 뒤였다. 기중기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던 중 누군가 외쳤다. “어어... 목관 밑에 뭔가 있다!” 한국 고고학계 최대의 발굴 순간이었다.
그는 시골집 문간방에 살았다. 말을 할 때면 이야기가 목에 걸린 듯 빼내는 일이 힘겨웠다. 한쪽 팔과 다리가 불편해서 걸을 때면 기우뚱거렸다. 유전 탓인지 아니면 후천적인 질병 때문인지는 잘 몰랐다. 그의 부모는 우리 할아버지의 사촌이었는데 지독히 가난했다. 그나마 형편이 나았고 사람 좋았던 사촌, 즉 우리 할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겨놓고 떠나야 했다. 그렇게 그는 사실상 우리 집 머슴이 되었다. 몸이 불편해서 보통의 장정처럼 능숙하게 일을 해낼 수는 없었지만 집안일에 꽤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내 기억 속에 그는 맘씨 좋은 아재였다. 어린 나를 위해 연과 팽이, 그리고 썰매를 만들어 주었던 스무 살 그 청년은 겨울날 문간방 온돌바닥에 드러누워서 이것저것 그리기를 좋아했다. 사람과 물고기, 새, 나비 등을 즐겨 그렸다. 내가 토끼를 그려달라고 하면 그는 연신 끙끙 소리와 함께 고개를 갸우뚱이며 온 힘을 들였다.
아재는 새벽에 소죽을 끓이고 저녁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 짊어지고 내려오곤 했다. 간혹 늦잠을 자는 바람에 할머니의 호통을 듣곤 하였다. 그에게 업혀 물이 차오른 개울을 건널 때면 등에서 소여물 같은 냄새가 은근하게 올라왔다. 겨울밤이면 방 안에서 새끼를 꼬면서 호롱불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무더운 장마철 비 내리는 처마 밑에서 담배 연기가 사라진 먼 곳을 가만히 응시하곤 했다. 마치 불편한 허물을 벗어 버리고 훨훨 어디론가로 떠나버리고 싶은 나방 애벌레처럼.
어느 날 이른 아침, 어른들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달려가 보니 쌀가마니를 보관하던 광의 바깥쪽 흙담 벽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쌀 도둑이었다. 곡식 냄새, 막걸리 냄새, 생선 냄새, 달금한 식혜 냄새로 기억되는 광에는 가을에 추수한 쌀가마니가 쌓여 있었고 명절이나 잔칫날에는 지짐이나 과일, 강정 등 먹을거리들이 대소쿠리에 잔뜩 담겨 있어서 나는 쥐새끼처럼 그곳을 자주 드나들었었다. 그런데 그 광의 담벼락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리고 쌀가마니들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저런 부탁에 귀찮은 내색 없이 뚝딱 뭔가를 잘도 만들어 주던 말 없고 자상하던 나의 문간방 아재도 그 이후 보이지 않았다.
들어 올려진 목관의 아래를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흥분했다. 요갱의 대바구니에서 청동검, 청동거울, 한나라 화폐 오수전, 철부, 철기류, 겁마(저울용 추) 그리고 붓과 삭도 등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곳에 안장된 사람은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철기를 생산하여 한(漢)나라, 왜(倭) 등에 수출하던 우두머리였다. 대나무로 된 죽간에 붓으로 교역용 영수증을 기록하고 때로 오기된 것은 지우개 역할을 하는 삭도로 지웠으리라. 당시 낙동강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을 주남저수지 갈대숲을 헤치고 철기를 가득 실은 교역선들이 넘나들었을 것이다. 다호리 고분군의 가장 큰 의미는 기원전ㆍ후 무렵 한반도에서 문자를 사용하였다는 강력한 증거인 붓과 삭도를 발견하였다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눈길을 끈 것은 다른 것에 있었다. 눈부신 보물들 이외에 목관 밑에서 발견된 옻칠 제기, 그 위에 올려진 감 세 개, 그리고 스물여덟 개의 밤이었다. 발굴된 제기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제기와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것, 제수용품으로 쓰이는 밤과 감이 그 당시에도 쓰였다는 사실이다. 신기함과 함께 묘한 전율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을 건너 고스란히 이어져온 전통과 핏줄의 끈적한 기운이 마치 지루하던 습한 여름날을 지나 어느새 성큼 다가오는 가을바람처럼 서늘하게 그러나 분명히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천 년 전 주남저수지에서 활발하게 해상 교역을 하며 번성하던 소왕국이 불과 수십 년 전 새끼 꼬며 농사짓고 제사 지내던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세월의 격절을 떠나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이 땅과 그 위에 살아온 인간들의 삶과 문화는 마치 초 위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둘로 나뉠 수 없는 물리적 실존이란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왕국의 우두머리가 죽자 사람들은 인근 야산에서 가장 큰 참나무를 도끼로 잘라 넘어뜨리고 2.4미터 크기로 자른 후 세로로 절반을 쪼개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그 속을 팠을 것이다. 수레가 없던 시절, 엄청난 무게 때문에 통나무 끄트머리 양쪽에는 끈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을 뚫고 여러 사람이 함께 줄을 당겨서 끌고 갔으리라. 제대로 된 길이 어디 있었겠는가. 돌부리에 걸리거나 넘어지기도 하면서 어렵고도 힘들게 옮겼을 것이다. 이제 막 기기 시작하는 아이가 배밀이를 하듯.
부지런히 나뭇잎을 먹고 살찌워서 이윽고 새로운 삶을 기약하며 고치 속으로 들어가는 누에처럼 옛사람들은 또 다른 생의 번영을 기원하며 죽은 자를 나무로 된 꼬투리에 넣고 이별 의식을 행했으리라. 한 발 뒤로 갔다가 두 발 앞으로 딛는 상여꾼의 걸음걸이처럼 그들은 여러 차례 제를 지내면서 그렇게 헤어짐의 시간을 길게 가져갔을 것이다.
아재는 나무나 쇠꼴을 지게에 한가득 매고 굼실대며 산을 내려오곤 했다. 소를 먹이고 불을 때며 또 한 해를 보냈던 것이다. 이천 년 전 다호리 소왕국의 사람들과 아재는 같았다. 자연과 공존하는 삶, 무리를 이루고 관계를 맺는 생, 졌다가 또 피는 꽃과 같이 몸이라는 굴레에 얽힌 존재였다는 점에서 그들은 같았다. 민달팽이같이 온몸으로 흙 위를 문질러 살다 간 이 땅 위 수많은 민초들처럼 우리도 똑같다.
잊고 지내던 아재의 소식을 들은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마산으로 이사 오고 나서 그 옛집은 오래 비어 있었다. 어느 날 고향 친척에게서 연락이 왔다. 누가 간밤에 우리 시골집 대문 앞에 뭔가를 두고 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고향집에 가서 택시에 실어 온 것은 쌀 한 자루와 편지였다. 아버지가 말없이 할머니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아지매, 은해를 배신하모 천벌을 반는다카는데 내가 잘몬해심이더. 마음이 영 안조아서 차자와심이더. 용서해 주이소.” 지렁이가 기어간 듯 흘려 써 내려간 글씨에는 고통의 세월을 기어가는 자의 간절함과 후회가 묻어 있었다. 어쩌면 머릿속에 각인된 부끄러움의 기억을 죽기 전에 깨끗이 씻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끙끙대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힘들여 편지를 썼을 아재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그는 이제 불편하고 서러운 껍질을 훌훌 벗어버리고 저 멀리 자유롭게 날고 있을까?
가을을 맞은 다호리 벌판에는 이천 년 전 가뭇없이 사라진 소왕국 사람들이 된장처럼 붉고 구숨한 땅 위에 한없이 갈대로 서서, 갈대로 홀홀이 서서 대산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저마다 외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서걱이는 갈대의 노랫소리를 듣던 나의 가슴에는 정처 없는 서러움이 주남저수지의 파란처럼 먹먹하게 밀려와 끝없이 부딪혔다.
* 다호리 고분군 관련해서는 아래의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2009. 『갈대밭 속의 나라 다호리’ - 그 발굴과 기록』
- 동아일보, 2016.03.16. 2000년 전 붓과 삭도... 한반도 문자문명 시대를 알리다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11.30. 가야 발굴조사 자료편 Ⅱ
- 신동아. 2021.06.10. 이건희 회장, 10억 쾌척해 기념비적 고대유물 발굴 도운 사연
- 경남연구원. 2022.05.27. 창원 다호리 고분군 재조명을 위한 학술대회 자료집
- 경향신문, 이기환. 2022.06.14. 목관 및 보물상자에 담긴 2100년 전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