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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래너하다 Jan 07. 2021

나인틴, 글과 첫사랑에 빠진 시간

서른 넘어 찾은 나의 일,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도 될까요?

나의 첫사랑은 열아홉 살이었다. 첫사랑 이야기에 김이 샐지도 모르지만 주인공은 이성이 아닌 책과 글이었다. 그리고 첫사랑을 만나게 해준건 지금까지도 미련을 붙들고 있는 여행이었다.



교과서를 제외하고 책이라곤 지지리도 안 읽던 아이였다. 시험공부가 하기 싫어 몰래 만화책을 책 사이에 숨겨놓고 보았던 게 다였다. 그러던 내가 책을 만났고,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때 나는 열아홉이었다. 






졸업까지 1년도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벌써 내 룸메이트 언니와 앞 방에 살던 친구는 학과까지 결정했다고 했다. 명확한 꿈이 있는 그들을 여전히 난 부러워만 하고 있었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는 데 어떻게 하지? 시간이 지나갈수록 막막해졌다. 



방학이 되면 기숙사를 나가야 해서 미국의 다른 지역들로 여행을 다녔다. 보통은 숙소를 제공해줄 사람들을 구해서 다행히 숙박비와 식비를 아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여행을 다니며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느꼈다. 어느 곳을 가던 자유로웠기에 행복했다. 



한 번은 한국에 나갔다 올 기회가 생겨서 서점에 들렀다. 책을 읽지 않았던 나인데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는 건 왜 이렇게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서점에 가면 주로 패션잡지 섹션을 기웃거렸지만 이번에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바로 여행 섹션이었다. 



그중에서도 여행정보들이 소개된 책이 아니라 여행 에세이를 골랐다. 한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과거의 사건들이나 특별한 기억 혹은 감정들이 머릿속에 팝업창처럼 떠올랐다.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허공에 떠돌아다녔고, 나는 그것을 글자로 꺼내어 적고 싶어 졌다. 



다리가 저려오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서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서도 계속 보고 싶은 책들을 몇 권 골라 나왔다. 



그 이후 나는 적적할 때마다 책을 펼쳐보았다. 덕분에 혼자 카페에 가는 일이 많아졌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구석자리에 앉아 책을 보았다.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거슬려 이어폰을 끼곤 했지만 글을 읽고 쓰는 순간에는 음악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면 순식간에 2~3시간이 흘러있었다. 커피잔엔 얼음만 남아 뒹굴었고 빨대에선 커피 대신 쪽쪽 소리만 들렸다. 책 여백에는 알 수 없는 문장들을 잔뜩 적었다. 보기엔 참 지저분했지만 그것도 내 사랑에 일부였다.






처음엔 호기심이었고, 책 표지를 봤을 땐 설렜고, 자꾸 보니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고, 내 서재에 담아두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커졌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한참을 봤는데도 또 보고 싶었다. 그때 하고 싶은 것이 하나 생겼다. 나도 이 사람들처럼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는 여행작가가 되고 싶다.



여행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찾아봤지만 쉽게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돈을 내고 다닐 수는 없으니 (난 돈이 없는 학생일 뿐.) 출판사에서 경비를 제공해줘야 하는데 누가, 나에게, 왜 해주겠나 싶었다.



그럼 글을 쓸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라디오 작가? 뉴스 기자? 잡지 기자? 시나리오 작가? 한참 생각하다가 내가 잡지를 좋아하니까 잡지 기자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글이 좋아서,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어서 저널리즘이라는 학과를 선택했다. (문제는 그것이 영어라는 게 굉장한 애로사항이 됐지만.)



부모님에게는 '그냥' 기자가 될 거라고 했다. 이번엔 반대하지 않았다. 여전히 교사나 공무원 쪽을 권하긴 했지만 기자라는 직업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아마 뉴스에 나오는 기자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차피 반대해도 나는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만 18세, 성인이 된 나는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보단 어떻게 하든 설득하는 방향을 택했을 테니까.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 여전히 나는 글과 만나는 시간을 사랑한다. 그 사랑이 먼길을 돌고 돌아 브런치로 나를 이끌어준 것이 아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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