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올라가는 길이 있으면 내려가는 길이 있다

환상자전거길 종주 둘째 날 분투기

제주도 환상자전거길 종주 둘째날이 밝았다. 아침 6시부터 강렬한 빛을 드러내면서 떠오른 태양은 '용기있으면 드루와, 드루와'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침 7시가 좀 넘어 출전 준비를 하고 체크 아웃을 했다. 그런데 자전거 한대 뒷바퀴가 펑크가 나 있었다. 아뿔싸, 둘째날 시작이다!


가지고 있는 페치로 빵구를 떼우려고 했지만 오래된 페치는 접착력이 없었고 본드는 말라있었다. 결국 수소문 끝에 송악산 자전거점에서 출장 서비스를 받기로 했다.


인생이란 이렇듯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번 꼬이면 계속 꼬이는 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머피의 법칙'이다.


한 시간 늦게 출발했다. 바람은 여전한데 새로운 도전이 나타났다. 언덕이다. 송악산 언덕을 오르고 산방산을 우회해서 돌고 나니 또 다른 언덕들이 나타났다. 평소 같으면 힘은 들지만 어떻게든 올랐을텐데 뜨거워져 가는 태양의 열기, 그리고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로 한증막 속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 같았다.


대부분 라이더들은 제주도를 한바퀴 도는 종주를 할 때 제주공항을 중심으로 시계반대 방향으로 돌며 첫날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둘째 날이 훨씬 힘들었다. 날씨는 제쳐두고서라도 계속 나타나는 언덕 오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둘째날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송악산에서 바라본 윤슬


환상자전거종주길은 라이더들을 위해 도로 바닥에 파란색 선이 계속해서 그어져 있다. 그리고 보통 1-2킬로미터 단위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어 남은 거리가 얼마쯤인지 잘 보여준다. 따로 네비를 켜지 않고도 파란선만 잘 따라가면 종주에 문제는 없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단순해서 시시하지 않을까.


여행의 묘미는 길을 잃는 것이다. 때론 가보고 싶은 곳을 위해 경로를 이탈할 때 여행의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착실하게 송악산과 산방산을 경유한 뒤 안덕면을 지나면서 안덕계곡쪽으로 경로를 이탈했다. 파란선이 바닥에서 없어졌고 네비에서는 빨간색 '경로이탈' 문구가 계속 떴지만 대평포구를 꼭 가보고 싶었다. 비록 또 다른 언덕오르기가 이어졌지만 산 위에서 바라보는 대평포구와 내려가는 길은 환상적이었다.


대평리로 일탈을 감행한 일행은 박수기정이 보이는 카페 루시아에서 애플망고 스무디와 에그 타르트로 잔치를 벌였다. 이른 시간이라 그 유명한 카페에 우리밖에 없었다.


박수기정을 배경으로 한 바프


법환바당으로 가는 길은 이제 동물적 본능으로 예래해안길을 따라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표지도 길도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올레길 표지가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끊어진 도로와 이어진 벌떡 선 길 때문에 끌바를 해야했지만 일탈은 짧고 굵은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예래해안로


길은 언젠가 만나게 되어 있다. 다시 궤도로 돌아온 우리는 중문으로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내려갔다. 하지만 점심을 먹으러 어느 식당에 들렀을 때 언덕과 지열 때문에 이미 에너지의 80%를 다 써버린 것 같았다. 오전내내 겨우 40킬로미터를 왔을 뿐인데 더 나갈 힘이 없었다.


일단 다음 목적지인 쇠소깍까지 가기로 했다. 몇 번의 휴식과 엄청난 물을 소비한 뒤에 쇠소깍 벤치에 도착해 대책없는 대책회의를 했다. 쉴려고 해도 숙소를 찾아야 했으니 다음 큰 도시 남원까지 가야했고 남원에서 숙소를 찾지 못해 태흥포구까지 더 달렸다.


거의 무아지경으로 계속 쉴 곳을 찾아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좀비처럼 정신줄을 놓고 자전거를 타다 보니 결국 오후 6시를 넘겨 표선까지 왔다.


폭염주의보가 발효 중인 오늘 하루 90킬로미터 이상을 탄 것이다. 오는 길에 셋이서 게토레이 2리터 한병을 그 자리에서 비웠으며, 소금과 단백질, 당이 부족하면 쓰러진다하여 먹은 과한 점심, 에너지바, 꿀스틱 등 이루 많은 음식을 에너지로 태웠다.


표선에 오니 파김치가 되어 저녁도 술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지만 가장 치열한 하루를 산 까닭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내일은 가볍게 떠날 수 있다. 올라가는 길이 있으면 내려가는 길이 있고, 힘듬이 있으면 보람이 있다.

이전 27화 애쓰지 말고 남쪽으로 튀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