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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가 삭았다, 떠나야겠다

제주도 사람과 말

어제 저녁 식사 때 김치를 꺼내 먹었는데 딱 맞게 삭아 있었다. 7월 초 제주도에 왔을 때 소피아 자매님께서 나를 위해 담근 설익은 김치가 잘 삭았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그러고나니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영실 오르는 길에 멀리 서귀포시와 섬들이 보인다고 하자 함께 갔던 베드로 형제님이 한 말씀하셨다.


"제주 인심은 참 좋아요. 돈을 빌려서 가파도 되고, 마라도 되고."


제주도 인심은 참 좋다.


살아생전 처음으로 진짜 제주도 사람들을 만나 함께 살았다. 그분들 곁에서 제주도에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제주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따듯하게 배려하는 마음,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마음이 고마웠다. 조용하면서도 부드럽고,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강한 한라산 같은 마음을 느꼈다.



제주도 말도 이분들처럼 다채롭고 생기있다.


'요망스럽다'는 말은 작고 예쁘고 똑똑하다는 뜻으로 나이 어린 여자에게 하는 말이라고 한다.


'난드르'는 바다로 뻗은 들판, '진드르'는 긴 들판을 뜻한다.


'지슬'은 제주도의 한이 담긴 감자,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감저'라고 한다.


대평포구에 가서 '박수기정'을 바라볼 때는 깍여진 거대한 절벽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박수가 '샘물'이고 기정이 '절벽'이어서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는 절벽'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절대 잊지 못할 말이다.


박수기정에서 햇볕에 반짝이는 바닷물을 보는데 그것을 '윤슬'이라고 해서 혼자서 윤슬, 윤슬하며 되내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제주도 말이다.


박수기정과 윤슬


오랫동안 제주도에서 마음 아픈 사람들을 상담해 온 분에게 물었다. 제주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무엇이냐고.


그분은 가장 먼저 와 닿은 제주도 말이 '닐모리 동동'이라고 했다. 닐모리는 '내일 모레'이며 동동은 '기다리는 모습'이어서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나는 무엇을 닐모리 동동하는가?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와 닿은 말로는 '살암시민 살아진다'라는 말이라고 하셨다. 제주4.3 혹은 모든 고난의 순간에 이 말을 주문처럼 외면서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딸에게 입버릇처럼 '살암시민 살아진다'하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 살암시민 살아진다.


제주도의 꽃, 동백


마지막으로 제주도 담을 보며 제주도 사람들을 본다. 제주도 담은 현무암을 쌓아 놓은 담이다. 아무렇게나 쌓은 것 같지만 제주도 그 쎈 바람에도 끄떡거림없는 허술해 보이지만 견고한 담이다.


제주도 담을 보고 있으면 제주도의 '괸당 문화'를 생각하게 된다. 예전에 밭과 밭을 가르는 담, 서로의 영역을 표시하는 담을 '괸담'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괸당', 곧 '돌보는 무리'의 뜻이 되었다고 한다.


가까운 친인척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공동체가 하나의 무리가 되어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 괸당 문화라고 한다. 외지인이 보기에는 자기들만의 이기주의로 볼 수 있지만 마음을 열고 다가서면 누구에게나 의지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제주도만의 공동체 문화라 할 수 있다.


제주도 담은 섬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바람이 숭숭 지나가도록 허수룩해 보이지만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까닭이다. 제주도 담은 제주도 사람들이 환경에 적응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내일부터 마지막 미션을 떠난다. 


동료 사제 둘과 함께 제주도 환상자전거길 234킬로미터를 종주하는 것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먼 길을 준비하면서 박노해의 말을 떠올린다.  


경험은 소유하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다. 체험 속에 나를 소멸해가는 것이다. Experience is not something owned and accumulated. Inside experience is what will extinguis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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