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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한라에서 백두까지

대학 즐겨 불렀던 '백두산'이라는 노래가 있다.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우리들의 백두산으로
신선한 겨례의 숨소리 살아뛰는 백두산으로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만주벌판 말을 달리던 
투사들의 마음의 고향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서해에서 동해에서 남도의 끝 제주도에서 
그 어디서 떠나도 한 품에 넉넉히 안아줄 백두산 
온 힘으로 벽을 허물고 모두 손 맞잡고 오르는 
백두산이여 꺽이지 않을 
통일의 깃발이여 (노래마을)


중국 연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백두산'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노래는 내 의식의 어느 한켠에 고이 보관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 백두산으로 찾아간다. 우리들의 백두산으로.

서파로 백두산 천지 오르는 길


백두대간(白頭大幹)은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산줄기로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뻗어 내린 겨레의 큰 산줄기이다. 그 시작점인 백두산에 오르는 것은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특별한 의미가 있다.


2023년 12월 31일 태백산을 오르며 시작한 나의 두번째 산티아고는 우리나라에 있는 22개 국립공원을 2024년 말까지 모두 가는 것이다.(현재 12곳을 다녀왔다)


해상공원 4곳을 제외하고는 18개의 국립공원이 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여러 산을 타면서 언젠가는 백두산과 금강산도 가보리라 마음 먹었는데 그 꿈이 이렇게 빨리 실현될 줄은 몰랐다. 모든 것이 중국에서 사목을 하다가 학교로 오신 신부님들의 경험과 가이드로 가능해진 일이다.

중국 연길공항


연길공항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조선족이었다. 한국에서 10년을 일한 경험으로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는 분인데 여름에는 백두산, 봄 가을에는 장가계, 겨울에는 해남성에서 가이드를 한다고 했다.


가이드로부터 조선족으로 중국 땅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들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도 가장 척박한 동북 3성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이 연변 조선족 자치구로 지정되어 있지만 중국 정부로부터 받는 차별과 핍박은 생각보다 컸다.


동북 3성은 옥수수를 중심으로 식량 생산에 특화되어 있으므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얼마전부터는 연길을 제외한 지역 학교에서는 조선말로 교육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도문시 조선족 설명


우리 일행은 도문이라는 도시에 들러 북한 남양시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이름뿐인 도시에는 선전하기 위해 만든 창문도 없는 펜션이 줄지어 서 있고 멀리 보이는 기차역에는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보였다.

두만강 너머 북한 남양시


한때 도문으로 탈북한 북한 사람을 수용했다는 도문 북한 수용소는 폐쇄되었고, 중국과 북한 사이에 두만강은 여전히 흐르지만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북녘 땅은 멀게만 느껴졌다.


버스에 오른 일행은 가이드가 가리키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펼쳐졌던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만주벌판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두산을 오르려면 머물러야 하는 도시 이도백하로 가는 길에 들른 용정시는 해란강이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고, 가까운 산에는 조선인들이 대한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일송정이 있었다.

해란강과 (멀리 보이는 산 정상의)일송정


그렇게 투사들의 마음의 고향 백두산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백두산(白頭山)은 '백번 가도 두번 보는 산'이라며 가이드가 엄포를 놓았다. 해발 2,200미터 천지는 일년 중 280일이 흐리고 80일이 맑다고 하니 그 말도 이해가 되었다.


다음날 일행은 먼저 서파로 백두산을 올랐다. 새벽같이 서둘러 버스를 세번 갈아타고 서파 1,444개 계단 앞에 서는데 3시간이 걸렸다. 백두산을 흰눈이 길게 뻗어있다는 뜻의 장백산(長白山)으로 부르는 중국인들로 서파는 북적거렸다.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해발 2,500미터 서파에서 바라본 천지는 안개에 싸여 흐렸다. 그럼에도 그 크기와 위용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파에서 바라본 천지


대신 사람 구경 실컷하고 내려오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곧 장대비로 바뀌었다. 


백두산 폭발로 생겼다는 금강대협곡을 걸을 때 비는 잦아들었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연상시키는 산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금강대협곡


다음날 북파로 백두산을 올랐다. 하루 2만 5천명 관광객이 몰려든다는 북파는 보통 입장권으로는 2-3시간은 기본적으로 기다려야 하기에 일행은 작년부터 생겼다는 VIP 패스로 빠르게 올라갔다. 


스타렉스처럼 보이는 수십대의 차량이 꼬불꼬불한 백두산 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르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10분을 걸으니 백두산 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날씨 요정이 드디어 제 일을 한 것일까, 해발 2,660미터 북파에서 바라본 천지는 빛났다. 

북파에서 바라본 천지


반대편에는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해발 2,744미터)이 우뚝 서 있었다. 북한에서만 오를 수 있는 남파 정상에서 하나의 길이 백두산 천지 물까지 이어져 있었다. 언젠가 그 길을 따라 백두산 천지에 내려가 손을 담글 수 있지 않을까.


가장 깊은 천지 수심이 350미터나 된다고 하니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물이 어디서 오는가 궁금했다. 가이드는 말하길, 빗물이 30%, 나머지 70%는 지층을 통해서 바닥에서 솟아난다고 하니 믿기지 않았다.


북파에 머문지 30분이 지났을까, 안개가 몰아쳐 올라왔다. 곧 구름 속에 갇힐 백두산은 '이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북파 정상 차량 도착지


북파에서 내려오는 길에 장백폭포에 들렀다. 백두산 천지만을 생각하고 있던 내게 장백폭포(우리나라에서는 비룡폭포라고 부른다)의 웅장함은 말을 잊게 만들었다. 

장백폭포


천지의 물이 흘러나와 125미터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광경은 멀리서봐도 환상적이었다. 장백폭포 가는 길에는 활동중인 활화산에서 나오는 펄펄 끓는 물이 지천이었고 그곳에서 삶은 달걀을 팔고 있었다.


이땅에 산들을 오르며 나는 비로소 조국(祖國)을 조금 더 알게 되었고, 백두대간을 걸으며 한민족의 기상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인 백두산 올랐다.


백두산은 힘찬 아버지 같았다. 어디서 누구라도 한 품에 넉넉히 안아줄 백두산은 남도의 끝에 서 있는 어머니 한라산과 함께 이 땅을 보살피고 있고, 그날이 오면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만날 수 있는 꿈을 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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