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에밀 자토펙
오랜 시간 달리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이제는 마라톤이 하나의 이벤트나 건강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8년을 지내면서 내가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는 달리기를 시작한 것이다. 달리기는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습관과 한계, 타성에 젖어드는 유혹에 곧잘 빠지기 쉬운 나라는 존재에게 달리기는 끊임없이 몸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을 가르쳐 주었다. 가만히 있으면 금방 잊었을 것을 몸에 새기고 기억하는 방법이 달리기였고, 바로 나를 살아있게 하는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달리기는 또한 '목표 없이 달리지 않는 것'(1코린 9,26)을 통해 목표 없이 살지 않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달리기하는 그 시간에 다른 좀 더 건설적인 일을 하는 게 어떻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지금까지 달리기보다 더 건설적인 일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 길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있다. 육체적 고통이다. 통증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통증 역치(Pain threshold)와 통증 내성(Pain tolerance)을 구분한다. 통증 역치란 처음으로 그 상황을 고통스럽다고 표현한 시점이다. 통증 내성이란 포기하기 전에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얼마나 오래 견디는가다. 러너들은 통증 내성에서 강점을 발휘한다. 달리는 일은 몸에 고통스럽다. 하지만 의지를 가지고 몸을 계속 단련하면 고통은 견딜만한 것이 된다.
실제로 몸의 근육을 움직이는 주된 에너지원은 글리코겐(Glycogen)인데 탄수화물을 섭취할 때 인체에 생성, 축적된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인체에 저장할 수 있는 글리코겐은 보통 2000kcal인데 마라톤 풀코스에 소모되는 에너지는 2500kcal이다. 그러니 마라토너는 누구나 대개 32킬로미터 지점에서 글리코겐을 다 소모해 벽에 부딪치게 되고, 그때 고통을 느낀다.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러너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지만 미리 준비한 러너는 그 순간을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대비할 수는 있다. 여기서 대비란 장거리 달리기 연습과 체력훈련, 탄수화물을 더 많이 축적하는 카보 로딩(Carbohydrate loading) 등을 통해서 가능하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몸과 함께 하는 마음이다. 몸은 어쩔 수 없이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만 정신은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즉 고통(pain)과는 다른 고난(suffering)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마음의 자세에 따라 레이스가 달라질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다. "육체적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고난은 선택할 수 있다."
장거리를 계속 뛰면 육체적 충격은 피할 수 없으며 그것이 쌓이면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을 어떤 고난으로 받아들일지는 러너에게 달려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
십자가 없는 부활, 죽음 없는 생명, 어둠 없는 빛이 없듯이 고난 없는 영광 또한 있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기 위해서 맞아들여야 했던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짊어지셨던 인간을 위한 고난이었다.
마찬가지로 러너 역시 육체적 고통 속에서 스스로 선택한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계속 뛰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보통 때는 상상할 수 없는 감정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을 '러너스 하이', 곧 몸에서 분비되는 엔돌핀이 상승하면서 일종의 희열감을 느끼게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바람(Second wind)'이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고난을 스스로 선택한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일부가 아닐까!
몸은 이야기를 한다. 우리의 몸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디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건강한지, 그리고 얼마나 살 수 있는지까지 몸은 말하고 있다. 다만 몸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만이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몸처럼 우리 존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없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몸이란 자동차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저 필요할 때마다 잘 쓰고, 고장과 사고 없이 오래 유지, 관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좋고 특별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몸에서 가장 큰 기관인 피부의 바깥 표피는 각질층인데 전부 죽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그토록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 우리를 사랑스러워 보이게 하는 것이 모두 죽은 것이라니 흥미롭지 않은가. 이 바깥 피부세포들은 매달 교체되는데 1분에 약 2만 5천 개, 즉 1시간에 100만 개가 넘는 피부 조각이 떨어져 나간다. 손가락으로 책꽂이에 내려앉은 먼지를 죽 훑으면 대부분 한때 자신의 몸이었던 것의 잔해일 것이다.
우리는 소리 없이 그리고 냉혹하게 먼지로 변해간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무지한 가운데 속은 외면한 체 겉만 꾸미며 안은 모른 체 밖만 아는 척한다. 정말 뼛속까지야 알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자신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구원 역시 몸에서 시작된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찔린 옆구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우리의 정의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심을 목격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성경은 말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랑(LOVE)은 실재했던 한 사람의 몸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우리 역시 사랑(love) 하라고 주어진 몸을 가지고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예수님의 삶은 이 한 문장에 담겨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몸을 통해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바오로 사도는 증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하고 말씀하십니다...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5-10).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St. Pope John Paul 2, 1920-2005)은 이것으로 예수님께서 '몸의 언어'를 완성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몸을 완전히 내어 주심으로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인간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랑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성실하게(아낌없이) 선사하지(내어주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타인을 위해 내어줄 때에야 인간은 참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며, 몸과 영혼이 함께 구원받을 수 있다.
자기 자신을 타인을 위해 기꺼이 내어주는 행위는 성체성사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매일 성체성사 안에서 기꺼이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다. 성체성사를 통해 영혼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영적인 차원에만 머물면 성체성사의 완성에로 나아갈 수 없다. 영과 육, 마음과 몸의 일치가 진정한 삶이며, 사랑이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처럼 구체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은 입이 아니라 심장에 가깝고, 말이 아니라 행동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도록, 곧 그분처럼 변화되도록 초대받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이 달리기를 통해서 자신의 몸을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것 또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성체성사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성체성사 안에서 창조주의 선물인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고, 변화된 자신의 몸을 타인을 위해 내어주면 자신의 몸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 곧 '성령의 성전'임을 깨닫게 된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19-20).
사람은 몸이다. 몸 없이 마음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몸은 돌보지 않고 불안한 마음만 계속 바라보며 힘들어하고 실망하고 절망한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자라듯이 먼저 자신의 몸에 귀를 기울이고 몸을 잘 돌보는 것은 고결한 정신을 지니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 과정에서 달리기와 같은 운동은 몸에 꼭 필요한 일이다.
더 나아가 몸이 느끼는 모든 것, 그 가운데에서 제대로 살아있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구원의 신비를 깨닫는다면 몸은 바로 구원의 시작이 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내어 줄 몸이 있다. 그 몸으로 자신을 바쳐 이웃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몸은 사람을 구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