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맞아 본가 광주에 내려왔다. 아침에 벌떡 일어나 누룽지를 끓여먹고 부산스럽게 산행 준비를 했더니, 게으른 큰딸의 낯선 부지런함에 엄마가 새삼 놀라신다. 오늘의 목적지는 무등산! 동네 뒷산마냥 익숙하긴 한데 정작 어른이 되고 정상까지 오른 기억은 없다. 어릴 적 온 가족이 눈 쌓인 무등산에 오른 뒤, 산 아래 백숙집에서 2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기에 그냥 집으로 돌아와 바닥까지 긁어먹었던 보릿국의 추억은 아직도 종종 회자되곤 한다.
+ 찾았다 그 날 사진!
그러고선 수능을 마친 고3의 12월 31일,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고 교회 친구들과 10대 특유의 호기(혹은 객기)로 새해 일출을 보겠다며 무등산으로 향했다가 (산행 준비는커녕 등산화도 안 신고...) 중머리재에서 덜덜 떨면서 뜨는 해를 간신히 보고 친구넘한테 거의 질질 끌려내려온 이후로 딱히 내 발로 찾아간 적은 없었다.
작년 가을 등산을 시작한 이후, 특히 눈이 오기 시작하면서, 눈쌓인 무등산의 입석대 서석대를 보러 굳이 멀리서까지 찾아오는 산객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체감하고서야 뒷산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렇게 당연한 듯 있어주는 뒷산이지만 제대로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아 연휴를 맞아 반원정산행에 나서게 되었다. 증심사 주차장(종일 주차 3,000원)에서 입구를 놓쳐 버스 종점에서 유턴하고 다시 입구로 찾아가려다 우연히 눈에 띈 운림동 공용주차장(무료)에 주차를 하고 조금 더 걷기로 한다. 초행이나 마찬가지라 살짝 긴장했는데 나랑 비슷하게 주차하고 출발하시는 산쟁이같은 아저씨가 보여서 무작정 따라가기로 한다. 포장도로를 따라 증심사까지 슬렁슬렁 걷다가 증심사를 지나고부터는 산길 시작이다.
쭉쭉 뻗은 대나무를 보며 걸으니 따뜻한 남쪽 산인 것이 실감난다. 당산나무를 지나고 중머리재까지는 급경사는 아니지만 꾸준한 오르막(평균 경사도 19)이라 하드쉘은 잠시 넣어둔다.
사실 오늘 무등산 코스는 거의 삼각형 모양이다. 오르막에서는 계속 오르기만 하고 입석대 올라서 서석대까지 아주 잠시 평지 이후 내려오다 중봉을 아주 살짝 오르고서는 하산까지 쭈욱 내리막이다(사실 무등(無等)이라는 이름도 이런 연유라고도 한다). 지난주 도봉산의 업앤다운을 생각하면 조금 밋밋할 수도 있지만 (사족보행 따위 없음) 그래도 국립공원의 해발 1,100m는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중머리재에 오르니 탁 트인 조망에 광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바람을 막으려 다시 하드쉘을 꺼내 입고 장불재까지 이어진 꾸준한 오르막을 묵묵히 올라간다. 간만에 혼산이라 그런지 내려오시는 아저씨들이 위에는 춥다, 날 추운데 고생한다, 라며 한 마디씩 건네주신다. 장불재를 지나 입석대를 향해 가다 보니 드디어 주상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장불재에서 사진 품앗이를 해준 모자지간을 다시 만나게 되어 또 사진 품앗이를 해주고 드디어 입석대를 지나 서석대로 향한다. 군부대라 일 년에 두 번 개방되는 천왕봉을 제외하고 보통 서석대를 무등산 정상으로 인정해주는데 무등(無等)이라는 이름답게 뾰족한 봉 없이 넓게 펼쳐진 능선인지라 전망은 끝내주지만 사방에서 들이치는 바람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 거의 태백산 천제단과 맞먹는 바람이 부는데 바람에 떠밀려 얼른 하산을 해야겠다 싶어 스틱도 조립하고 부랴부랴 경량 패딩도 껴입고 귀도리 모자를 뒤집어쓰고 선글라스까지 장착한다.
서석대에서 중봉 구간이 조금 깔딱이지만 내려다보는 전망이 멋지다고 해서 하산길로 잡았는데 완전 실수였다. 그쪽 길은 볕이 들지 않아 쌓였던 눈이 녹다가 꽁꽁 얼어버려 완벽한 빙판이다. 돌과 돌 사이는 완전 얼음덩어리라서 살짝씩 드러난 돌만 골라 밟고 살금살금 내려가면서 아이젠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며 올라오시는 분들께 물었더니 그리 길지 않으니 아이젠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다신다. 눈길 산행은 몇 번 해봤지만 이렇게 죽죽 미끄러지는 빙판 산행은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채로 거의 엉금엉금 내려가다 서석대 아래쪽 전망대에서 사진 한 장 찍을 겸 잠시 숨을 고른다. 지나가던 아저씨께 한 장 찍어달라 부탁드렸더니 내 폰을 좀 만져보시다가 이걸로는 안 되겠다며 (미안하다 S9+) 본인 카메라로 찍어서 보내주시겠단다. 알고 보니 갤럭시 어시스턴트로 활동하시면서 갤럭시로 찍은 핸드폰 사진으로 전시회도 하시는 42년 차 프로 사진작가님이시란다. 감탄이 절로 나는 멋진 사진에 어머, 저 오늘 완전 계 탔네요! 감사합니다! 라며 꾸벅 배꼽인사를 올려드린다. 다시 빙판 내리막을 쫄보 등린이가 초속 5cm로 엉금엉금 기어내려간다. 간신히 목교에 이르자 드디어 해가 보이고 중봉까지 멋진 (미끄럽지 않은) 능선이 펼쳐진다. 영차영차 속도를 내어 오르는데 앞서 가시던 사진작가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 내가 오르는 모습도 찍어주시고 중봉 인증샷까지 멋지게 찍어주신다.
본인은 원효 분소 쪽으로 내려가신다셔서 거듭 배꼽 인사를 드리고 다시 혼자가 되어 증심사 쪽으로 하산한다. 역시나 많이 가파르지도 않고 눈도 녹아 전혀 미끄럽지도 않아서 조금 수월하게 중머리재까지 내려와 그제서야 싸온 간식을 먹는다. 엊그제 배탈 때문에 어제 조심하느라 조금만 먹은데다 아침에 김밥 파는 곳이 없어 그냥 싸온 약과와 사과로 허기만 달랜다. 김밥이라도 먹었으면 원래 계획대로 세인봉까지 찍고 오려고 했는데 눈길에서 진을 뺀 터라 세인봉은 다음 기회로 미뤄둔다. 오를 땐 씁씁후후 한참 올랐던 것 같은데 내려갈 때 이 길이 이렇게 짧았나 싶게 증심사가 금방이다.
등산로 입구에서 등산화도 쓱싹쓱싹 깨끗하게 닦아준다. 집에 가서 맛있게 밥을 먹을까 하다가 그래도 서석대까지 오른 나에게 주는 포상의 의미로 호떡 하나를 허락하며 오늘의 보람찬 산행도 마무리!
광주에서는 눈만 들면 보이는 무등산. 이제 보릿국, 눈물의 일출 산행에 이어 사진작가님과 호떡의 추억까지 보탠 하루이다.
[요약] 1. 코스: 증심사-당산나무-중머리재-장불재-입석대-서석대-목교-중봉-중머리재-당산나무-증심사, 약 12.5km, 총 5시간 반 운행 2. 기온: -4/4, 풍속 1ms (해발 1,000m 능선의 바람을 무시하지 말자) 3. 착장 - 베이스 레이어: 콜롬비아 옴니히트 - 미드 레이어: 코오롱 스포츠 폴라텍 알파 - 아우터: 파타고니아 토렌쉘(들머리 잠깐, 장불재부터 쭈욱), 네파 경량패딩 (정상부터 하산까지) - 하의: 블랙야크 기모본딩 등산바지 4. 기타 준비물 - 방한: 버프, 장갑 - 등산용품: 등산스틱, 아이젠(사용 안 함), 무릎보호대, 썬크림&립밤 - 행동식: 젤리, 약과, 하루견과, 사과 5. 장점: 오를 땐 오르고 내려올 땐 내려온다 6. 단점: 능선에서 바람 (태백산 천제단 바람이 입석대부터 서석대까지 계속 분다) 7. 다음 방문 계획: 원효사 무등산 옛길 코스로 도전 + 세인봉
[별점] (5점 기준) 1. 난이도: 3 (쭈욱 오르다 잠깐 평탄하다 쭈욱 내려온다) 2. 풍경: 4 (산꼭대기의 주상절리와 광주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조망, 다만 내게는 익숙한데다 설경이 아니라 아쉬웠음) 3. 추천: 4 (국립공원답게 잘 정비된 등산로 + 곳곳의 화장실)
[오늘의 교훈] 1.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2. 등로에 해가 드는지 잘 살펴보고 등로를 정하자. 3. 꼭 젊은이라고 사진을 잘 찍는 건 아니다. 어머니 모시고 온 아들내미 사진은 별로였음. 애인이랑 온 커플을 공략해야 여친의 사진 조련으로 잘 찍어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