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무 경험치

by LifeRpg

사람이 많이 없는 부서이거나 막내일 수록 주업무 외 '잡'업무를 하게되는 일이 부담스럽게 많다. 탕비실을 정리하고, 회식장소를 알아보고, 점심메뉴를 고르다보면 정작 내 업무를 하지 못해 불안감이 몰려온다.


이런 일들은 이력서에 쓸 수도 없다. 경력 기술서에 3년간 회식 장소 섭외 및 맛집 검색 담당이라고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잡무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내 커리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버려지는 시간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의 스킬 트리를 이해하면 잡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게임에는 화려한 불꽃을 쏘거나 칼을 휘두르는 액티브 스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캐릭터의 기본 능력을 올려주는 패시브 스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동 속도 증가나 독 저항력 강화, 흥정 기술 같은 것들이다.


회사에서의 잡무가 바로 이 패시브 스킬을 올리는 훈련 과정이다. 깐깐한 부장님의 점심 메뉴를 고르고 식당을 예약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상사의 취향과 동선을 고려하고 예산 범위 내에서 최적의 대안을 찾아내며 식당 주인과 원만한 소통을 통해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과정이다.

나도 모르게 정보 수집 능력과 협상력 그리고 상황 대처 능력이 1포인트씩 오르는 중이다. 이 능력이 쌓이면 훗날 중요한 클라이언트와 미팅 장소를 잡거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프로젝트를 조율할 때 빛을 발하게 된다.


복사기 토너를 갈고 엉망인 공유 폴더를 정리하는 일은 어떤가. 남들이 귀찮아하는 일을 처리하며 사무실의 환경을 쾌적하게 만드는 경험은 훗날 내 사업을 하거나 관리자가 되었을 때 조직 전체를 살피는 시야를 만들어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빈틈을 찾아 메우는 센스는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귀한 능력치다.


우리는 흔히 전문성이라는 것을 아주 좁은 의미로 해석한다. 코딩을 할 줄 알거나 회계를 할 줄 아는 것만이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조직에서 높이 올라가거나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이 태도와 관련된 능력치가 만렙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어떤 난관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는 평정심을 가지고 있고 사소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는 꼼꼼함이 있으며 누구와도 유연하게 대화하는 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위대한 능력들은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신입 시절 흘렸던 그 수많은 땀방울 즉 잡무 속에서 길러진 것이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던 신입 사원이 어느새 수화기를 들며 동시에 메모를 하는 능숙함을 보일 때 그것은 멀티태스킹 스킬이 레벨 업 했다는 증거다. 급하게 떨어진 업무 지시에도 당황하지 않고 우선순위를 정해 처리한다면 위기 관리 능력이 상승한 것이다.


그러니 안심해도 좋다. 우리가 잡무라고 무시하는 그 시간 동안에도 우리는 충분히 업그레이드 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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