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7.8.30일에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1년 등 총 15개월의 휴가를 마치고 사회복지과로 복직을 하였다.
처음에 복직 후 발령지는 사회복지과가 아니고 다른 부서였었던 거 같다. 결원이 있던 그 부서 직원이 나에게 연락이 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발령은 그 부서가 아니었다. 부서배치는 여러 요인들이 발생하고 그 당시 시작되는 노령연금 T/F팀을 구성하라는 지시가 있었기에 시급성에서 사화복지과로 발령이 난 거 같다.
여하튼 그때의 나는 어느 부서로 가고 싶은지 얘기도 하지 않고 그저 가라는 부서로 가는 여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육아휴직 후 부서배치 등 이런 인사적인 부분은 개인에게 아주 중요한 부분이므로 자기의 목소리를 내어 인사팀에 충분히 얘기하는 부분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지금은 지침상 육아휴직 후 복직자의 부서배치 시에 복직자 의견을 반영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내가 복직했었던 2007년 8월은 기초연금으로 불리는 노령연금제도가 시작되려고 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그 업무를 초창기에 보게 되었고 일시에 신청을 받았기에 업무량이 많았었다. 노령연금 신청 접수가 끝나고 한숨 돌리나 했는데 이번에는 장기요양보험제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2008년 7월부터 시작되는 장기요양보험제도를 위하여 방문요양 시설 등 신고수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요양등급판정받은 어르신들의 서비스 신청접수 후 기관으로 보내주는 업무를 처리하는 등 업무량이 어마어마했다.
야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아 근무시간 내에 정말 열심히 일해야 했고 집에 간다 해도 두 아이들 저녁, 집안정리 등 정말 너무 바쁘고 힘든 시절이었다. 신랑은 그때도 엄청 바빠서 밤늦게 오고 주말에도 출근하여 모든 집안일과 육아는 내 차지였다.
둘째는 2008년 3월부터 직장 내 어린이집을 다녔는데 아침에 둘째를 데려다줄 때 어린이집 앞에서 들어가지 않는다고 울고 우는 아이를 억지로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눈물을 삼키고 사무실에 들어와 일하면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싶고 회의가 들기도 했다. 아이들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인데 이게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인가 싶어 혼란스러웠다.
또한 시댁도 친정도 멀어서 비상이라도 걸리면 두 아이를 집에 놓고 갈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우리 두 아들은 별로 아프지 않고 건강히 잘 자라주었다. 아주 가끔 아플 경우에는 병원도 혼자 가고 혼자 집에서 약 먹고 쉬어야 했다. 지금은 추억처럼 얘기할 수 있지만 직장 생활하며 두 아이를 키웠던 그 시절은 너무나 힘들었었다.
직원들이 다 앉아서 근무를 하고 있을 때 나는 1등으로 6시 땡 하면 집으로 가기 바빴다. 지금은 그런 게 조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나.. 2006년 당시만 해도 과장님이 퇴근하기 전에 퇴근하는 것은 정말 엄청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근무시간 중에 화장실 갈 때도 뛰어갔다 오는 등 정신없이 일하였고 6시에 퇴근하면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울 정도였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나는 근평에서 B를 받던 시절이었다...)
6시 땡 하고 과장님께 먼저 퇴근하겠다고 인사하러 갈 때마다 맘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두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마자는 애들 저녁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9시가 훌쩍 넘었다. 그러고 나면 애들을 재워야 하고 애들 재우고 개인시간을 즐기려 해도 피곤해서인지 같이 자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리 애들은 맞벌이이라서 그런지 밤잠이 별로 없었다.(?!) 엄마와 있는 시간이 적어서인지.. 애들은 밤 11시는 되어야 잠을 잤다. 나는 이전에는 밤 12시가 넘어야 잠이 들던 사람이었는데 애들이 어렸을 때는 어찌나 졸리던지... 애들을 키워보니 부모님의 맘을 알 거 같았다. 왜 아이를 나아서 키워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하는 건지 알 거 같았다.
사회복지과에서 장장 2010.9.16까지 3년을 넘게 근무를 했다. 다른 곳으로 보내주겠지 하고 기다리기만 했는데 3년이 넘어도 발령이 나지 않아 나는 이번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여기서 너무 오래 있었으니 다른 부서에 가서 새로운 업무를 맡고 싶다고 인사팀에 편지를 보냈었다.
그랬더니 정말로!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렇다. 나는 더 일찍 더 적극적으로 의사를 인사팀에 피력했어야 하나 나는 기다리기만 하던 바보였다.
그래도 2년이 넘었으면 인사팀에서 챙겨서 보내줄 법도 한데.. 너무 아쉬운 일이었다.
우리 후배 공무원님들은 나처럼 바보 같은 행동을 하면 안 된다. 인사팀도 많은 인원을 관리하기에 놓치는 인원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것이 본인에게 훨씬 유리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2010.9.17 평생학습과로 발령을 받았다. 평생학습과 청소년팀으로 발령받을 당시는 최초로 교육감을 선거로 선출하던 시기였고 교육청에서는 지자체와 교육협력사업인 "oo교육지구"를 공모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가자마자 00 교육지구 지정 신청업무와 학교용지 부담금부과 및 환급업무, 학원연합회 단체 관리 등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
특히 00 교육지구 지정은 단체장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항이어서 국장님, 과장님, 팀장님들도 엄청 챙기고 신경 쓰는 업무였었다. 00 교육지구 지정신청은 그 어디에서도 하지 않던 최초의 사업이었기에 어디에 도움을 받거나 사례를 찾아볼 수도 없던 업무였다.
(둘째를 낳고 사회복지과에 복직하면서부터 나는 늘 새롭게 신설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노령연금, 정기요양보험제도에 이어 이제는 00 교육지구라는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었고 이 징크스는 이후에도 나를 내내 따라다니며 신설되는 업무만 맡게 되는 일복이 덩굴채 내게로 굴러왔다.)
나는 다른 공모사업 등의 사례를 분석하고 참고하여 00 교육지구 지정신청서를 작성하여 교육청에 공모신청을 하였다. 공모신청 후 교육청에 가서 사업 프레젠테이션도 하고 교육청에서 현지 실사도 나왔고 여러 지자체에서 지정 신청 하여 경쟁도 치열하던 사업이었다.
나는 평생학습과로 발령받아 제일 먼저 추진했던 00 교육지구 지정 신청업무에서 정말로 운 좋게도 우리 구는 00 교육지구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선정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많은 업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생학습과에서 근무했던 시절은 내 공무원 생활 중 정말로 바쁘고 일을 많이 하던 시기였고 업무능력 향상에도 정말로 많은 도움이 되던 시절이었다.
00 교육지구 업무 초창기에 학부모지원단을 구성하였는데 이때 학부모회장으로 선출되신 분과 그 당시 00 교육 공동체 간사로 계셨던 분들과 우리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던 맨땅에 손수 발로 뛰며 기초를 다졌고 각종 교육협력사업과 특히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교복 나눔 행사를 처음 기획하고 실행했었다. 우리들은 정말로 끈끈한 의리로 뭉쳐졌고 아이들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학부모지원단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고 나도 성장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학부모지원단 회장님은 이후 의원님으로, 00 교육공동체 간사는 임기제 공무원 등으로 채용되는 등 그 사업을 기반으로 나름 성공적인(?) 경력들을 쌓았다.
나는 평생학습과 발령당시 7급 재직기간이 (강임기간 1년을 제외하고도) 10년이 넘어 이제는 6급 승진 물망에 오르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근속승진 비율이 높지도 않아서 6급으로 승진할 수 있는 인원은 회당 2~3명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같이 근무하던 팀장님은 아주 열성적인 분으로 공무원 승진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었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와는 생각이 달랐다. 나는 승진보다는 가족과 시간이 더욱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때 팀장님께서는 내가 7급때 1년 육아휴직을 한 것이 잘못한 거라며 나에게 지적을 하시기도 하였고 승진을 위해서는 야근도 더해야 하고 일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과장님도 잘 모셔야 하는 등 다른 일에도 두루 잘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므로 팀장님 생각도 존중한다. 그 팀장 입장에서 보면 내가 답답해 보여 조언을 해준 거라고 생각한다. 당시 다행히 신랑이 시간에 여유가 생겨 나는 주말도 없이 출근하여 일하던 시절이었다.
여러 번 승진 물망에 올랐으나 나는 두 번을 내리 미끄러졌다. 그 당시 인사발령은 인사담당자가 승진, 전보발령자 명단을 청내방송을 통해 알려주던 시절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나서야 이후에 새올게시판에 게재하였었다. 그래서 인사철이 되면 방송이 시작되는 딩동댕 소리만 나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던 시절이었다. 방송을 시작하면 모두들 귀를 쫑긋하고 사무실내에도 정적이 찾아왔다. 두 번째에도 승진을 못한 나는 두 번째 인사발령 방송 후에는 정말 너무 슬퍼서 울음을 참지 못하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 창피하지만) 그만 책상에 엎드려 울고 말았다.
참.. 생각해 보면 지독히도 나는 관운이 없었다.
민선 5기가 끝나기 직전 상반기에 1번의 승진기회가 남아있었다. 그 당시 국장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이번에는 내가 승진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오늘 인사위가 있는데 내가 승진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그날 오후 인사팀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나를 잠깐 만나자고..
벌써부터 불안감이 엄습했다. 당시 총무과 옆 창가로 나를 부르셨던 인사팀장님은 나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이번에도 승진이 안되었다고 이런 얘기를 전해야 하는 본인도 너무 맘이 아프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근속승진이 아닌 심사승진으로 다음에 될 수 있으니 더 좋은 거라고 말씀도 해주셨지만...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눈물이 마구 흐르면서 그야말로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위안이 된다면 그래도 승진하셨던 분이 나보다 연배가 나보다 한참 위였고 나하고도 잘 지냈던 언니라서 그래도 덜 속상했었다.
다만 당시 명절을 앞두고 있었고 내가 언제 승진하냐고 늘 물어보시던 아버지에게 이번엔 기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못하게 되니 그게 너무 슬펐다. 당시 아버지는 몸이 조금 안 좋은 시절이었기에 더욱더 맘이 아팠다.
복직 후 나의 7급 시절을 되돌아보면 늘 새로운 업무를 맡아했으며 특히 평생학습과에서는 야근과 주말근무를 밥 먹듯이 하던 시절이었으나 나는 공무원을 시작한 지 24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7급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