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를 낳기로 결심하고 바로 임신이 되었다. 예정일은 2006년 7월이었다. 예정대로라면 큰 애랑 같은 7월에 태어날 예정이었던 둘째는 두 달이나 빨리 세상에 태어났다.
둘째가 태어난 날은 제4회 지방선거일이었다. 나는 그때 둘째 임신 중 이어서 선거 사무원에서 제외가 되었다.(지금은 당연히 제외지만 그때는 우리 과 남자 직원 두 분이 본인들이 근무하겠다고 힘써 주셔서 제외되었다.) 당시 농협에서 하는 주말 농장을 분양받아 텃밭을 가꾼 지 2달이 지난 무렵이라서 나는 그날 투표를 하고 텃밭에 갈 예정이었다.
당시 가꾸던 텃밭
큰 애는 예정일보다 열흘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기에 둘째는 일부러 더 많이 움직였었다. 텃밭도 가꾸고 집안일도 엄청 부지런을 떨었다. 큰애가 태어날 때는 내 몸만 챙기면 되었지만 둘째 임신했을 때는 큰 애도 챙겨야 하니 몸이 더욱 바빴다. 그래서 몸을 더욱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너무 많이 몸을 혹사했었나 보다.
5월 31일 지방선거일 아침 베란다 청소를 하다가 양수가 조금 새는 것을 느꼈으나 그런 경험이 없었기에 나는 아직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당시 집 근처 초등학교가 투표소였는데 나는 초등학교에 투표까지 하러 갔다. 투표를 하고 나오는데 양수가 아침보다 더 새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산전 진료를 받고 있던 M산부인과로 향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한참 기다리는 중 진통이 너무 심해졌고 나는 진료를 받자마자 신랑과 큰애랑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상급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면서 곧 아이가 나올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진통이 시작되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응급수술에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 둘째는 지방선거일인 5월 31일 오후에 예정일보다 두 달가량 먼저 1.65kg로 세상에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한 달간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고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아이를 데리고 퇴원할 수 있었다.
(둘째를 낳았을 때는 만 5세 미만이 입원할 경우 입원비가 지원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그 이전에는 인큐베이터 이용료가 상당했다고 들었다.)
일찍 태어나는 것이 단지 일찍 태어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많은 위험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였다. 의사 선생님은 조산을 하게 되면 뇌성마비, 미숙아 망막증, 폐에 구멍, 심장에 구멍 등 갖가지 질병(?)들에 대해 말씀해 주셨고 한 달에 한 번씩 정기검진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또한 일찍 태어난 아이들은 철분을 합성하지 못해 철분제를 따로 분유에 타서 먹어야 하는데 특유의 쇳맛으로 아이들이 잘 안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으나 우리 둘째는 감사하게도 병원에서 퇴원 첫날부터 철분제를 탄 분유를 정말 엄청 잘 먹었다. 날마다 아이가 먹은 양과 몸무게 등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둘째는 다행히 잘 먹고 쑥쑥 자랐다.
한 달에 한 번씩 병원 정기검진날은 시간을 예약했어도 1시간 정도 기다리는 건 다반사였다. 퇴원 후 첫 번째 정기검진 날에 부모들이 아직도 다른 아이들보다 작았던 우리 둘째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말 걸고 할 때는 정말 괴로웠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씩 1년의 검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우리 둘째는 정상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너무나 힘든 과정을 거쳐 1년 만에 정상 판정을 받았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조산아 다음 카페에 가입했었는데 여러 부모님들의 이야기가 많이 도움이 되었다. 일찍 태어나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정말 여러 생각들이 많았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우리 둘째는 건강하게 자랐다. 그래서 둘째는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길 바랐다. 둘째를 낳으면서 많이 내려놓게 되었다.
둘째를 낳을 때 태아보험을 들었어야 했는데 일찍 나오는 바람에 들지를 못해서 둘째는 보험 가입도 태어난 지 1년이 지나고 의사의 진단서까지 첨부하여 겨우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대형 보험사는 거절하였고 중소 보험사에서 가입을 해주어 얼마나 고맙던지..! 태아보험은 임신하고 나면 바로 가입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둘째와 지낸 1년의 육아휴직기간 동안은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장을 보는 것도 신랑이 해주었다. 일찍 태어난 조산아들은 세균감염에 취약하다고 조심해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둘째가 태어나 육아휴직을 한 덕분에 우리 큰애는 어린이집 7세 2학기는 오후 2시에 어린이집 버스를 타고 하원할 수 있어 엄청 좋아했고 나도 맘이 편했다. 휴직으로 큰애의 소망도 들어주고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고 1학기까지는 돌봐 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복직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작은 애는 복직을 하기 전에 단지 내 어린이집에 맡기고 큰 애는 미리 태권도, 피아노 학원을 등록하여 집으로 혼자서도 올 수 있도록 노선을 같이 연습하였다.
큰애는 주말이 되면 아침에 자전거를 혼자 끌고 나가서 친구들과 놀고 저녁에 들어오는 아주 용감한 아이였다. 그래도 엄마 없이 큰 애가 잘해줄지도 걱정이었고 15개월밖에 안된 아이를 아파트 놀이방에 맡기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복직을 할 수 밖에는 없었다. 지금처럼 3년의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다면 기간을 연장하여 더 쓸 수 있었을 텐데 2006년도는 육아휴직의 최대기간은 1년이었다. 1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고 적어도 2년간은 엄마나 아빠가 아이를 돌봐주는 것이 정서적으로도 안정되고 애착형성에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큰 애와 둘째 - 이때까지만 해도 큰 애가 참 이뻐했는데... ㅎ
아이가 하나일 때와 둘일 때의 상황은 정말 너무나 달랐다. 2배가 아니라 거의 3~4배는 힘들었던 거 같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기쁘기도 하지만 누구 하나 도움 없어 온전히 홀로 감내해야 하는 육아의 무게는 사실 고백하자면 너무나 힘들었던 시기였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와 이제 만 1살인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출산휴가 3개월과 육아휴직 1년을 마치고 2007년 8월에 복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