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팔자를 완전히 맹신하지는 않지만 2000년이 넘게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의 사주풀이를 보면 "역마살"이 있다고 나온다. 또한 학문을 일찍 닦아 관직에 오른다고 되어 있고 고향을 떠나는 사주라고 되어 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역마살이 있던 나는 결국 만 30살에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곳으로 신랑하나 믿고 왔던 것이다. 대체 나의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난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정작 신랑은 일로 너무 바빴고 낯선 환경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2000년 인사교류 당시에 큰 애는 시골에서 어머님이 돌봐주셨기에 집에 가면 나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맘이 너무 헛헛하여 먹는 걸로 그 헛헛함을 채웠다. 그잖아도 큰 아이 낳고 몸무게가 불었었는데 둘째 낳고 살을 왕창 빼기 전까지 나날이 살이 쪄서 내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찍기도 했었다.
D구 A동 전입 첫날 나를 마중 나와줬던 직원은 나보다 두 살인가 어렸고 아주 의욕적인 직원이었다. 나를 태우고 가는 동안에도 이것저것 물어보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동으로 도착했을 때에도 동장님, 사무장님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인구수가 D구에서 가장 많은 동이라서 그런지 직원들도 약 15명 정도 되었던 거 같다. 그 당시 총무담당자가 7급 여성분이었는데 그 점도 D시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 당시 D시는 여성들이 본청 요직 부서나 동사무소 총무업무를 담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자마자 나를 "ㅇ 주사님"이라고 불려줘서 너무 놀랐다. 그 당시 D시는 결혼한 여직원을 아직도 "여사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업무를 민방위와 농지원부 업무를 맡게 되었다.(이전 근무지였던 D시에서는 여직원이 농지원부나 민방위 업무를 맡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다른 지자체에서 전입을 해 온 직원에게 일반 업무를 맡기다니.. 당시 사실 조금 놀랐었다. 처음 맡게 된 민방위 업무는 민방위 교육 통지서를 출력하여 통장님에게 부탁하여 배부하고 통장님이 못 돌리시는 경우 내가 직접 방문해서 돌리기도 하였다. 또한 농지가 많았던 A동은 농지원부를 신청하러 오는 민원이 많았는데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자경"이라고 적어 달라고 하는 등 민원이 발생하는 업무였다.
그래도 공무원 경력 10년이 있었기에 업무를 익히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첫 발령지였던 A동은 D구에서 조금은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동사무소는 밤 8시까지 당직근무를 하였는데 야근하는 직원이 없을 때는 혼자서 문을 잠그고 있다 보면 무서웠고 특히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로 잠글 때는 뒤가 좀 무섭기도 하였다.
지금은 위탁을 주고 있지만 그 당시는 국경일에 가로변 태극기를 거는 일과 민방위 훈련 때 민방위기를 게양하는 일은 모두 동사무소 공무원 차지였다. 그래서 트럭뒤에 타서 가로변 전봇대 등에 있는 국기봉에 일일이 손으로 꽃아 줘야 했다. 트럭 짐칸에 따서 트럭 난간을 디뎌서 국기를 꽂는 일은 참으로 위험하고도 힘든 일이었다. 그 작업을 하고 나면 멀미도 나도 몸이 많이 힘들었었다.
D구로 전입을 하면서 7급에서 8급으로 강임을 하였는데 D구로 전입한 지 한 달 만인 2000.12월 7급으로 승진을 하였다. 신경 써주신 인사담당자분(이후 과장님으로 퇴직하셨다.) 정말로 감사드린다.
A동에서 만난 사람들은 후에도 좋은 인연으로 이어졌다. 약간 외진 곳에 있었던 A동은 아주 가족적인 분위기였고 정이 있었다. 근무 후에 동사무소 뒤에 있는 정자? 비슷한 곳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비가 오면 파전을 부쳐 먹기도 하는 등 아주 분위기가 좋았다.
A동에서 근무한 지 막 1년이 지났을 무렵 사무장님께서 새로 오셨는데 새로 오신 사무장님께서 나를 총무담당자로 임명하셨다. 다른 곳에서 전입을 해 온 나에게 총무담당을 맡겼으니 그만큼 내가 인정받은 느낌이 들어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기분 좋게 저녁 한턱을 내기도 하였다.
당시 국이 3개 있었는데 국장님들께서 다들 50대 초반에 승진을 하셔서 미래가 없다고 8급 직원들이 광역 지자체로 전입시험을 보고 전출을 많이 갔는데 그건 아주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우리 구의 8급 직원들은 광역 지자체로 너무 많이 전출을 가서 8급 직원이 현저히 부족한 상태까지 되어 한동안 전입시험 응시 자체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내가 7급일 때 9급으로 만났던 직원은 광역 지자체로 가서 6급도 나보다 먼저 달았고 심지어 내가 6급도 달지 못했는데 5급을 달았던 직원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자기 미래를 분석하고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정말 승진이나 이런 것에 아무 생각이 없던(?) 무지한 공무원이었다.
A동 근무 시에 가장 큰 기억은 눈비가 정말로 많이 와서 비상근무를 정말 많이 했다는 것이다. 특히 전입 첫해 겨울은 정말로 눈이 많이 와서 비상근무를 하느라 시골에 있는 큰 애를 보러 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도 지방공무원들이 겨울에 눈이 오면 눈을 치우는 것을 모르시는 분들도 많다. 공무원 되기 전에는 눈 오는 것을 참 좋아했는데 공무원 되고 나서는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오면 비상이 걸리기에 눈이나 비가 많이 오면 맘이 무거워 지곤 했다.
큰애가 24개월까지 어머님께서 키워주셨는데 어머님이 너무 고생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2주에 한 번씩은 꼭 시골에 내려갔다. 24개월이 되고 큰애를 데리고 왔을 때에도 비상이 자주 걸려서 애를 맡길 데가 없을 때는 큰 애를 데리고 비상근무를 가거나 야근할 때도 아이를 데리고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다. 지금은 다행히 만 5세 이하의 자녀를 가진 공무원은 야간 비상근무에서 제외해주고 있다.
큰애와 A동사무소 야간 근무 중에
A동에서 총무를 보고 있었을 때 2002.6.13 제3기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선거업무도 총무를 보고 있는 내 담당 업무였다. 선거업무를 맡아서 처리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도 긴장이 많이 되었었다. 일단 선거를 치르기 전에 직원들이 선거구별로 담당이 지정이 된다. 당시에는 주민등록 전산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아서 선거구별로 동으로 출장을 나와서 종이 주민등록등본과 전산 출력된 주민등록 명부를 확인해서 누락자 등을 수기로 확인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선거 벽보 첩부, 공보발송, 투표안내문 발송까지 공무원들이 해야 했고 또한 그 당시에는 합동 연설회도 나가서 근무를 해야 했다. 지방선거 업무를 치를 때 밤을 새우기도 하고 긴장 속에 보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선거업무는 별일 없이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A동에서 근무한 지 2년 2개월 만인 2003.1월 나는 본청 세무과로 발령이 났다. 그 당시 세무과는 세무직과 행정직들이 같이 근무를 하였다. 지금 세무과는 세정과, 징수과로 분리되고 세무직이 업무를 거의 다 맡고 있지만 그 당시는 세무직 팀장님들도 행정직에서 전직하신 분들이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재산세팀의 종합토지세 업무였다. 전임자분도 행정직이셨는데 6급으로 승진 후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셨다. 그 당시 재산세팀은 5층 세무과에서 마지막팀이어서 자리가 가장 끝자리였고 내 자리 바로 뒤는 캐비닛이 있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없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그 당시 과장님은 정년퇴직을 얼마 남지 않은 분이셨는데 공무원의 정석 같은 느낌이 드는 분이셨고 아주 가끔 내 뒤에 출몰(?)하셔서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하는지 어떤지 감시하신 거 같은 느낌적 느낌..이었다. ^_^
나는전입을 왔기에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처음 근무해 보는 낯선 세무업무를 익히기 위해 지침도 집으로 가져가서 공부하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나를 예쁘게 봐주신 우리 팀장님께서 나를 장관상을 받게 추천을 해주셔서 나는 전입 온 지 3년 만에 운 좋게 장관상을 받았다. 정말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 장관상
세무과에서 2005.5.1까지 근무하였는데 당시 종합부동산세가 6월부터 최초 시행되고 주택가격조사 업무가 실시되는 등 준비해야 하는 작업들이 많았다. 그중에 2005년 5월 문화공보담당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2005.5월 발령받은 문화공보담당관에서 나는 문화재 관련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듬해 학예연구사가 신규로 채용되어 우리 팀으로 왔으나 내가 발령받을 당시는 행정직이 업무를 수행하였다. 같은 팀에는 직원이 나 포함 2명이었는데 다른 직원이 광역지자체 전입시험에 합격하여 발령 나서 가는 바람에 2~3개월은 2명분의 일을 혼자서 담당해야 했었다.
혼자서 육아를 해야 했기에 너무 힘들었었는데 큰 애가 5살이 되면서 조금은 편해졌고 주위 선배님들이 애는 2명은 되어야 한다며 더 늦기 전에 둘째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을 하곤 했다. 나보다 삶의 경험을 많이 쌓은 인생 선배님들의 조언은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큰애가 초등학교를 들어가면 큰애 입학당시에는 약 한 달간 점심을 먹지 않고 오전에 하교를 하였던 시절이었다. 어린이집을 다녔던 큰 애는 1차로 2시에, 2차는 5시에 하원을 했다. 내가 아무리 6시 땡 하고 퇴근하고 가더라도 어린이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6시 40분이었고 큰 애는 가방을 메고 어둑한 어린이집에서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마지막으로 하원하는 아이는 우리 아이였다.
그래서 우리 큰애는 자기도 어린이집 버스를 타고 일찍 집에 오고 싶다고도 하였고 동생 갖는 것이 소원이라고도 하였다.
큰 애의 초등학교 입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큰애 입학에 맞추어 둘째를 낳기로 결심하였다.
당시에는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고 큰 애도 돌봐줄 수 있으니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