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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고양이 Nov 12. 2024

1999년 지방행정주사보 승진과 결혼, 출산

아이를 낳으면서 운명의 방향이 바뀌다..

1999.12.1, 7급으로 승진을 하여 동으로 발령받은 나는  그즈음 큰 애를 임신한 상태였고 동에서는 회계 업무를 봤었다. B동은  인사교류를 하게 되면서 나의 공무원 인생 중에서 가장 짧게 근무했던 곳이 되었다.

동장님은 총무과에서 승진하셔서 오신 분이었는데 당시 권위적인 상사가 많았던 시절에 아주 자애로우셔서 직원들이 잘 따르던 분이었다. 그래서 근무환경도 너무 좋았다.  타시로 전출 가고 나서도 한차례 연락도 주셨던 아주 고마운 분이셨다.


이즘에서 내가 신랑을 만나게 된 야간대 진학얘기를 해볼까 한다.

내가 D시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1991년에 조용필의 "꿈"이라는 노래가 내 가슴을 울렸었다. 나도 꿈을 찾아  D시에 왔기 때문이었다. 노래  가사가 너무 좋아서 노래를 좋아했고 나도 이 도시에서 어서 자리 잡겠다고 맘을 먹었다.

공부라면 늘 자신이 있었고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남았기에 나는 꼭 대학 졸업장을 받겠다고 다짐했다.

야간대를 가기로 결정하고 학과를 고민했는데 예전부터 세계사와 국사를 좋아하던 나는 사실 세계사 선생님이 가장 큰 꿈이어서 사학과를 꿈꾸었으나 야간대에 사학과가 있을 리 만무했고 영문과나 이런 문과계열 과는 사립대에 는 있었으나 학비가 정말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H대학교가 된 D산업대가 국립으로 학비도 싸고 하여 D산업대학교로 결정하였고 학과는 앞으로 컴퓨터 관련 과목이 뜰 거라고 생각해서 전자계산학과로 결정하였다. 야간대 시험을 봐서 합격을 하여 1992년 3월에 입학을 하였다.


 그러나 합격한 1992년도 그해에 Y동에 규 아파트가 입주하면서 업무가 너무 바빠져서 도저히 다닐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아 학기 초에 부득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전입을 해도 전산처리로 간단하게 처리하면 되나 그 당시에는 주민등록등본, 초본에 다 일일이 주소 고무인을 찍어 수기로 정리해야 했고 전출자는 관련 서류를 봉투에 넣어 전입지 주소로 우편으로 송부해야 했고 이와 더불어 전산으로도 자료를 다 정리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야간대 1년을 휴학한 것은 나의 운명을 바꾸었다.!

(왜냐하면 1년 후 복학한 나는 93년도에 같은 학과에 입학한 지금의 신랑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본청 사회과로 발령받고 업무에 익숙해졌던 나는 93년 3월에  휴학했던 D산업대에 복학을 했다. 그래도 사무실에서 고맙게도 양해를 해주셔서 나는 야간대를 다닐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낯을 엄청 가리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야간대를 진학은 했으나 사람들이 너무 낯설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 수업시간은 괜찮은데 쉬는 시간은 정말로 곤혹이었다. 알고 보니 일부 학생들은 개강 전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이미 만나서 인사를 나눈 사이로 벌써 서로  친해져 있었고 쉬는 시간에 서로 얘기를 하느라 바빴다.

넓은 교실에서 섬처럼 홀로 지냈던 나는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고 책을 읽는 척하느라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어서 수업시간이 끝나고 집에 가면  목이 아파서 힘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힘들게 들어온 학교니 이번에는 꿋꿋하게 수업을 듣고 학교를 다녔다.  같은 반에 나처럼 말이 없던 나보다 한 살 어렸던 친구를 만나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 학교를 다닐만했고 또한 우리 신랑을 학기 초에 만나서  내가 먼저 저돌적으로(?) 고백해서 신랑과 사귀게 되었다. 신랑은 조금은 염세적이었던 나와 달리 아주 긍정적인 사람이라 마음에 들었고 또한 화를 내는 것을 큰애가 태어나기 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할 정도로 (물론 이후에는 가끔 화내기도 했다는 건 안 비밀..ㅎ) 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신랑과 한창 데이트를 하던 중 같은 반에 70년 개띠 친구들이 많았는데 70년 개띠 친구들과 "텐플러스"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우리는 자주 뭉쳤다.  24살이 되도록 숫기 없고 말없고 집에서만 지낼 정도라서 "안방귀신"이라 불리었던 나는 그동안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중 우리 신랑과 친했던 친구 J 이렇게 우리 셋은 주말에도 만나고 같이 탁구도 치러 가고 영화도 보러 가는 등 다른 친구들 보다고 더욱더 친하게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만 22살이 될 때까지 남자와 말도 잘 못해 보았던 나는 대학에 와서 신랑을 만나고 동갑 친구들을 만나면서 성격이 정말로 많이 바뀌었다.


전자계산학과는 사실 문과출신인 나와는 맞지 않는 과목이었고 그래서 나는 공부는 뒷전이고 신랑과 데이트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는 것이 너무 즐거웠던 엉터리 대학생이었다. 캠퍼스 커플로 4년을 보낸 야간대학 시절은 내 인생에서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의 20대는 정말로 즐겁고  행복하고 걱정 없이 지냈던 시절이었다~!)


신랑과 나는 1학년때부터 CC였고  CC였던 우리는 학생들의 관심사였다. CC는 반드시 깨진다느니 하였지만 4학년 2학기때부터 취업을 해서  지역으로 올라간 신랑과 나는  꿋꿋이 헤어지지 않고 계속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랑과 나는 둘 다 둘째였는데 신랑은 형님이, 나는 언니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었다. 지금은 순서를 바꾸어 결혼하는 일이  흔하지만 그때까지는 위로 손윗분이 있으면 기다리는 일이 많았다.


1998년 2월 D산업대학교 졸업식에서 신랑과



위생과에 근무하던 1999년 5월에 나는 드디어 결혼을 했다. 그 당시 나는 나이가 만 29살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어린 나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노처녀 소리를 듣고 결혼을 했었다. 신랑과 연애만 7년을 하였는데 나에게는 언니가, 신랑에게는 형님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우리는 두 분이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중에

직전 연도에 두 분이 결혼을 하면서 우리도 그다음 해에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날은 석가탄신일이 있는 3일간의 연휴였는데 딱 중간에 있는 날에 결혼식을 하여... 민폐를 끼치게 되었다. 신랑의 고향 아랫지방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직원분들과 친구들이 버스를 타고 먼 시골까지 와주셔서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특히 나와 이름이 같았던 친구는 하루 전날 시골에 와서 내 짐도 챙겨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로  너무나 고맙고 잊지 못할 일이었다.

D시에서 10년을 근무했고 내가 임용되고  약 6~7년간 신규 공무원 채용을 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나는 그때까지도 나이로는 제일 막내였고 10년 정도 근무하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랑은 1998년부터 D시와 166km 떨어진 곳으로 취업이 되어서 타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D시를 너무 사랑하던 나는 절대로 D시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주말부부 생활을 하기로 하였다. 신랑이 내려오는 주말마다 장을 봐서 상을 차렸었고 연애를 7년이나 했어도 주말부부라서 그런지 신랑을 봐도 설레고 애틋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99.12.16 7급으로 승진하여 B동으로 발령이 났고 당시 나는 큰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큰 아이는 시골에 계시는 시어머님께서 봐주실 예정이었기에  우리 셋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일단 신랑과 둘이라도 합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단을 내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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