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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고양이 Nov 05. 2024

지방공무원 첫 발령지의 추억!

1990년 2월 지방행정서기보 발령

1989년 11월 1일 만 19살의 나는 난생처음 입어본 투피스 정장에 구두를 신고 시골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D시 A구청으로 향했다. 그 당시에는 버스가 직행이 아닌 완이어서 약 4군데를 들러서 1시간 정도 걸려서 D시  A구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을 하였다. 그때는  버스 내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던 시절이었어서 담배 피우시는 분이 있으면 겨울이라도 창문을 열고 다녔었다.


 예전  A구청은 시장 안에 있었기에 버스터미널에서 조금 걸으면 도착을 하는 곳이었다. 마랑 미리 답사를 와봤었기에 A구청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예전 A읍사무소를 활용하던 A구청은 장소가 좁아 이곳저곳으로 부서 사무실이 흩어져있었다. 첫 출근을 한 총무과는 내 기억으로 2층에 있었다. 수습을 받으러 왔다고 하니 사무실 옆에 있던 회의실? 같은 공간을 알려주셨고 거기 가보니 이번에 발령받은 약 6명의 신규 공무원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만 19살의 앳된 아가씨였으나 다른 분들은 다 대졸자였으며 같이 임용을 받은 언니들 3명은 65년생 뱀띠로 나보다 5살이 많았고 남자분 세분은 그보다 더 나이가 들었던 거 같다.  

 이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만 19살의 앳된 시골 아가씨가 조금은 촌스런 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왔으니 그분들 눈에는 내가 나름 귀엽기도 하고 짠하게 보였을 거 같기도 하다. ^^

 (그날  처음 신어본 구두에 발꿈치 뒤가 딱딱한 구두에 살이 벗겨져서 얼마나 아프던지.. 발 뒤꿈치에 밴드나 이런 것을 붙이는데 런 것을 전혀 알 리 없는 만 19살이었다.)


89.11.1 출근 첫날 회의실을 메웠던 너무나 어색했던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조금 더 기다리니 그 당시 인사팀장님께서 오셔서 의례적인 인사말씀을 하셨고 이후 인사팀 업무담당자님이 우리가 각 부서별로 배치되어 6개월간 실무수습을 받게 될 거라고 하셨다.


요즘 임용받는 공무원들은 바로 임용이 되고 6개월 후에는 시보를 떼고 바로 서기보로 임용이 되 그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정식 발령 전에 실무수습이라는 기간을 거쳤고 실무수습기간은 공무원 근무기간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다만 급여 산정을 하는 호봉에는 반영이 되었다.


나는 지금의 복지부서인 사회과로 발령을 받았다. 수습직원이라서 정식 업무를 맡은 것은 아니었고 지금은 없어진 법령집 가제정리 직원들 서류 정리 보조업무, 또한 차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하고 그런 일들을 했던 기억이 있다. 특히 지금은 법령집이 전산화가 되어 법제처 홈페이지에 가면 법령집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그때는 법령이 개정되면 가제정리집이라고 하서 따로 인쇄해서 내려오고 그것을 정비표를 보고 이전 법령집에서 빼낼 부분은 빼내고 새로 신설된 부분은 더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이전에 했던 가제작업이 완벽하지 않았던 건지 정비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엄청 고민하고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집에 가서도 걱정이 되기도 하였었다.


지금은 여자, 남자 모두 상관없이 7급 이하는 "주무관"으로 통일되었으나 내가 다니던 89년에는 7급이하분들 중 남자직원들은 "주사님", 여자들은 성을 붙여 "김양" "이양" 이런 식으로 불리었고 결혼을 하신 여자 7급이하분들은 "여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양"으로 불리는 것은 그 이후에도 한참을 이어졌다.  


사회과에서 첫 수습근무를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그 당시 과장님께서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신 일이다.

나를 부르시더니 "도라지"를 사 오라고 하셨다. 나는 "도라지"가 뭔가 싶어 정말 도라지를 사 오라는 말씀이신지 싶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으니 옆에 계신 주사님이 그게 담배이름이라고 알려 주셨던 황당한 기억이 있다. 여직원에게 담배 심부름이라니.. 지금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또한 출근해서 직원들 책상을 닦고 그 당시에는 사무실에서도 담배를 피웠기에 재떨이 정리, 사무실 컵을 닦는 것은 여직원들 차지였다. (책상 닦기, 컵 닦기, 차 심부름 등은 내가 7급이 되어도 계속 이어졌다.ㅠㅠ)


 89년 당시에 정규직으로 발령받은 결혼하지 않은 여직원분들은 부서에 거의 없었고 타자수로 불리었던 여성 기능직 직원분들이 대부분이어서 나이도 어린 만 19살의 여성 정규직원이었던 나는 약간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우리 사회과는 시장 바로 옆에 있어서 창문을 열면 바로 시장통이었고 남자 직원들이 자주 이용하시는 듯한 다방도 바로 앞에 있었고 다방 레지 아가씨가 지나가기라도 할라치면 남자 주사님들은 창문을 열고 큰 소리로 레지를 불러 인사까지 하였다.

 부서에 귀한 손님이 오시면 다방에 차를 전화로 주문해서 배달을 시켰고 레지 아가씨들이 보자기에 커피포트와 찻잔을 싸들고 사무실까지 와서 차를 따라주기도 하는 진풍경도 있던 곳이었다.


 지금은 절대로 생각하지도 못하는 일이지만 그때는 팀장님들과 과장님들은 아주 가끔 오후 근무시간에는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전날 술을 드시면 점심 드시고 사우나에 가서 사우나를 하시고 퇴근 직전에 들어오시기도 하였다.


처음 수습근무를 하고 받은 월급은 기억에 금 172,500원이었다. 당시 80kg 쌀 1 가마니 가격이 약 84,600원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9급 공무원 초임이 낮다고 하는데 그때도 공무원 봉급은 박봉이었고 이후  김대중 대통령님이 당선되시며 공무원 급여를 사기업 대비 현실화 시켜준다고 하여 1997년도부터 연도별로 조금씩 급여가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A구청에 발령받은 제1기 공무원들은 모임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인원이 더 있었으나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가기도 하여  여자 3명, 남자 2명 해서 총 5명이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고 그중에 나는 막내였으므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나이가 제일 연장자인 분께서는 내가 지금은 너무 풋풋한 모습이지만 5년만 지나면  능구렁이가 될 거라고 말씀하기도 했고 그 풋풋하고 청순한 모습을 끝까지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언니도 있었고 우리 5명은 내가 D시를 떠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모임을 하는 등 꽤 사이가 좋았다.


당초 수습근무가 6개월이라고 했는데 3개월 만에 우리는 지방행정서기보시보로 정식 임용이 되면서 발령장을 받았다. 같은 구청에 있으니 서로 만나서 의지가 되었던 동기분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사회과도 겨우 적응이 되나 싶었는데 또다시 새로운 곳으로 발령이 나니 긴장이 되었다.

동기 중에 한 언니는 그 당시 워드라는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아서 총무과 인사팀에 실무수습 때부터 배치받았는데 정식발령도 인사팀으로 받았고 나중에는 8급때 상급기관으로 전출 가는 등 우리와는 약간 다른 길을 갔다.

되돌아보면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것 같다.

그렇게 1990.2.1 나는 A구 8개 동중 인구수가 2번째로 적었던 T동으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수습근무 3개월 만에 1990.2.1일 자로 발령받은 T동은 내가 있던 시골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에  인사팀에서 왕복 2시간을 통근하는 나를 배려하여 T동으로 발령을 내주셨던 거 같았다.

이제 T동으로 정식으로 발령을 받았기에 나는 그동안 직원들의 보조 업무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업무를 맡게 되는 정식 공무원이 된 것이었다.!


첫 발령지인  A구 T동사무소는 전 직원이 10명도 안되던 아주 작은 동이었다. 89년 이전까지만 해도 D면에 속해있다가 A시로 편입된 곳이었어서 아주 시골스런 분위기였다. 나 또한 시골 출신이었기에 시골스런 분위기가 좋았다.


내가 처음 가서 맡은 업무는 주민등록 업무 전반이었다. 지금도 공무원이 동으로 첫 발령을 받으면 대부분 맡는 업무일 것이다. T동은 워낙 작은 곳이라서 등초본 발급 민원처리와 주민등록증 발급, 주민등록 사실조사 업무를 혼자 담당하였다.


발령을 받고 그 당시 추진된 주민등록 전산화 작업으로 발령받은 지 3개월 만에 전산교육을 90.5.21~6.2까지 2주간  A시 지방공무원 교육원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같이 발령을 받았던 동기 언니들과 같이 가게 되어 맘도 편했었다. 지금은 교육가도 사진을 찍거나 하지 않지만 그때는 수료증도 주고 교육생 전체가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이후 공무원으로 임용되고 1년 6개월이나 지난 91.7.8~8.3까지  공무원 신규교육을  받았는데 그때는 교육기간 중  다 같이 숙식을 같이 했었다. 새벽 6시에 기상해서 국민체조를 하고 아침을 먹고 9시부터 5시까지 교육을 받았다.  잠자는 방은 한방에 6명씩 잤던  기억이 있고 이층 침대였는데 밤에 소등 후에도 잠을 자지 않고 이 얘기 저 얘기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공무원교육 중 가장 설레고 풋풋하고 즐거운 교육이었다.

교육기간 중에 노래를 배웠는데 제목이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곡이었는데 아주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있는 곡이다. 그 노래를 배울 당시만 해도 서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까마득히 먼 일 같았는데 돌아보니 시간이 참 빨리 갔던 거 같다.

첫 발령지인 T동은 5급 사무관 동장님, 6급 사무장님, 7급 이하는 총무담당, 회계담당, 산업담당, 주민등록 담당, 또한 특이하게 청원경찰분도 근무하셨었는데 아마 개발 제한 구역이라서 배치되셨던 듯하다.  

나중에는 방송수신료 업무가 한전(?)에서 지자체로 이관되면서 방송수신료 수납 업무를 담당하시던 분이 동으로 배치받으셔서 91년 초인지 오셨던 거 같다.

그리고 지금은 건강보험 관리공단이 따로 있지만 그때는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된 초기로 의료보험 조합(지금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직원분이 동 사무소로  파견되어 민원대에서 의료보험 상담과 수납업무를 담당하셨다.

아주 단출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T동에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되어 내가 퇴근하면서 그 당시 있었던 주민등록 전출입 수불부 대장을 꺼내놓고 갔었다 보다. 아침에 출근해  그게 없어서 막 찾으니 다른 주사님들이 웃으시면서 "이제  큰일 났네. 수습 기간 중에 실수하면 발령 못 받을 텐데~"하면서 나를 놀리듯이 말씀하시는 거다.

나는 덜컥 겁이 나서 더 열심히 수불부를 찾았는데 나중에 총무담당 주사님이 내가 퇴근하면서 어제 캐비닛에 넣어 놓지 않고 갔다고 나에게 주시면서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얼마나 놀랐던지.. 그래도 그 기회를 통해 보안점검을 더욱 잘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무원은 개인정보 등 공공정보를 아주 소중히 다루어야 하므로 수시로 보안점검을 하게 되고 보안점검에 걸리면 부서평가에 감점이 되기도 하고 개인에게도 평점 불이익이 생기니 공무원에게는 문서서류를 캐비닛에 넣고 책상을 잘 잠그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또한 그때는 동에서도 당직을 하였는데 여성들은 일직만 하였는데 여직원이 2명밖에 없었기에 남자분들도 섞어서 일직을 하였음에도 한 달에 한 번은 일직 근무를 해야 해서 주말에 출근해야 했고 봄, 가을 산불기간 중에는 주말에 조를 짜서 사무실로 출근해야 했기에 주말에 거의 쉬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방송수신료를 담당하시던 주사님은  군 장교 출신이라고 하셨다. 그 당시는 자가용을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남자분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는데 그분도 아주 멋지고 큰 오토바이를 가지고 계셨다. 내가 주민등록 사실조사 등으로 출장 나갈 일이 있으면 그 주사님께서 태워주셨는데 오토바이 뒤에 타서 바람을 맞는 것은 참으로 상쾌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다만 오토바이를 오래 타고 바람을 맞으면 머리카락이 수세미처럼 거칠어지는 것이 단점이었다.


또한 청원경찰을 담당하셨던 분은 나에게 여기가 땅값이 엄청 오를 거라고 하시면서 나보고 땅을 사라고 하셨다.(우리 집은 워낙 가난해서 살 돈도 없었 대출은 꿈도 꾸지 못했으나 그 땅을 아마 샀다면 아마 엄청 부자가 되었을지도....ㅎ)


그 당시 나는 아주 여린 맘을 가지고 있어 민원들에게 꾸중을 듣거나 하면 전산실로 가서 우는 일이 많았는데 그래서 별명이 울보였다.


또 하나 곤혹스러웠던 기억은 주민등록증 발급 업무였다. 그 당시는 주민등록증을 직접 공무원이 직접 써서 발급을 해주었고 주민등록증을 코팅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구청에 직접 다녀와야 했다.  동에서 일정 수량의 백지 주민등록증을 이중 금고에 보관했는데 수불부도 작성하고 한 장이라도 잃어버리게 되면 큰 징계를 받았다. 타 지자체에서 아주 가끔 백지 주민등록증 분실사고가 있어 공문이 오기도 하였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사실 글씨를 멋지게 쓰지 못했다.  거기에 한자까지 써야 하니 아주 곤혹스러웠다.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서 민원인에게 교부할 때마다 미안해서 얼굴을 들지 못했었다.  어떤 민원인 한분은 아주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티를 내셨으나 다행히 화는 내지 않으셨다.  그때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기 이전이라 공무원을 그래도 존중(?)해주던 시기였다.

감사합니다.! 그때 저의 졸필을 너그럽게 양해해 주신 모든 분들~!


그래도 T동에서 1년 8개월 정도 근무하면서 나는 어느 정도 업무에 익숙해졌고 직원분들도 나를 이뻐라 해주셨다. 직원이 10명도 안되어서인지 더욱더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T동에 잘 적응하고 즐겁게 생활하고 있던 나는 91년 11월 16일 임용받은 지 1년 10개월 만에 8급으로 승진(당시 9급에서 8급으로 승진 시 최저 소요기간은 2년이었는데 수습기간 3개월을 반영한 듯하다)을 하였고  우리 구에서 가장 큰 동인 Y동으로 보직변경 발령을 받았다.!


 Y동은 A구청이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구 A구청 청사를 사용하는 시장통 중간에 있는 곳으로 아주 규모가 큰 동이었다. 이제 정이 든  직원들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해니 너무 긴장되고 맘이 많이 무고 아쉬웠다.

이제 8급으로  승진하고 초보티를 조금 벗은 나의  두 번째 공무원 인생이 펼쳐지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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