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언니, 밑으로 남동생.. 원하던 아들이 아니고 둘째 딸로 태어난 나는주체적으로 결정하고 결단력 있는 아이로 자랐다.~^^)
어릴 때 부모님 두 분 다 연탄공장을 다니셨던 우리 집은 가난했고 연탄배달도 하셨던 우리 부모님을 길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어쩔까 하는 걱정도 하는 그런 철없던 소녀였다. 그러나 부모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 삼 남매는 아주 잘 자랐고 지금은 우리 부모님께 무한한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학기 초에는 늘 부모님 직업에 대해 손을 들고 그걸로 담임선생님께서 집계하셨는데 그 시간은 정말로 괴로운 순간이었다. 지금은 우리 부모님을 정말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님 직업이 조금 부끄러웠었다. 심지어 집에 있는 가전제품도 손을 들어 조사하던 시절이었다.
활달했던 언니와 남동생은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고 오느라 집에 늦게 오는데 말없고 조용하던 나는 학교 끝나자마자 집에 왔고 방학 때도 거의 집 밖을 나가지 않아 부모님과 언니, 동생은 나를 안방귀신이라 불렀다. 집에 있으면서 공부를 했던 거 같지는 않지만 책 읽는 것은 엄청 좋아했다.
나는 국민학교(이후 초등학교로 바뀜)에 입학할 때 글씨조차 읽을 줄 몰라서(그 당시는 대부분 아이들이 그러했다) 1학년때에는 받아쓰기를 빵점을 맞을 정도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2학년 반에서 1등을 하였고, 이후 중학교에 가서도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그 당시 내가 다닌 시골은 반에서 10등 정도까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인근 도시로 진학을 하였다.
중학교 3학년 반에서 1등, 전교에서 10등 안에 들었던 나는 인근 도시로 진학할 실력이 충분히 되었으나 고된 노동을 하시며 우리 삼 남매를 키우시던 부모님을 생각하며 도저히 도시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지역의 여고로 진학을 하였다.
나는 지역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을 했고 수석으로 졸업을 하였다. 공부를 그렇게 밤을 새우면서 한 것은 아니었으나 시험은 잘 봤다.
요즘처럼 서술식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100% 객관식으로 답을 유추해서 정말로 잘 찍었다.
(세대의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ㅎ)
원래는 어려서부터 선생님이 되는 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다,고2 6월 모의고사까지는 전국 상위 10%까지 들었기도하였지만고3 때 늦은 사춘기로 방황을 하는 바람에 교대입학은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인근 국립대에 지원을 하였다. 그 당시 우리는 학력고사 세대로 미리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고 지원 대학교로 가서 시험을 보는 방식이었다.
내가 지원했던 국립대학은 인근 도시에 있었는데 아침 일찍 학교로 가야 했기에 도시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는데 그 당시 같은 반에 있던 친구가 마침 그 도시에 살아서 자기 집을 제공해 주었다.
그 친구는 해당 대학을 지원한 학생도 아니었고 나 포함 2~3명이 그 집에서 묵었던 기억이 난다.
아침밥도 차려주시고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친절을 베풀어준 친구와 부모님께 정말로 감사드린다.
나는 응시했던 국립대에 일부 금액 감경 장학생으로 합격을 하였으나 사실 우리 집안 형편으로는 나를 대학에 보내줄 수 없었다.
대학에 꼭 가고 싶던 나는 입학금만 내주시면 나머지는 내가 다 벌어서 하겠노라고 엄마,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빌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 아버지의 맘은 찢어지듯아프셨으리라...
어떻게 소식을 들으신 건지 나의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대학 입학금을 내주셨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선생님께서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셨을까? 선생님 덕분으로 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선생님~♡
그러나 소극적이고 낯을 가리던 나는 자유로운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또한 원하던 과가 아니라서 공부에 재미가 없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데도 많이 어려웠다.
자유로운 대학생활에 적응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대학을 졸업한다 하더라도 취업이 과연 될까 싶었고 엄마, 아버지의 계속되는 고생을 이제는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1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기도 전에 나는 휴학을 결정하였다.
(입학금을 내주신 선생님께는 너무나 죄송했다. 나중에 편지를 드렸고 축하인사를 해 주셨다.)
그리고 나는 두 번째 장래희망이었던 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맘을 먹었다.
어려서부터 엄마는 늘 여자도 경제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었다. 그래서 내 꿈은 결혼해서도 직업을 가질 수 있던 선생님이 1차 희망, 그다음은 공무원이었다.
휴학 후 제일 먼저 89년 6월 통신공사 시험을 보았으나 보기 좋게 떨어졌고 그 통신공사 시험장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D시 지방공무원 시험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이어 D시 지방공무원 시험을 접수했고 89년 7월에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았다. 그 당시 시험은 현재 시험하고는 많이 달랐고 지금은 없는 수학과목도 있었고 행정법은 없던 시대였다. 다른 과목은 다 자신 있었으나 수학이 제일 어려웠던 나는 수학 과락만 면하기를 빌었다.
내가 시험을 보던 89년이 마침 양성평등제가 실시되어 남녀 구분 없이 성적순으로 선발하던 첫 해였다. 그전에는 예를 들어 10명을 선발하면 그중 남성은 8명, 여성 2명 이렇게 여성에게 불리하게 선발이 되었다고 한다.
89년 8월경에 합격자 발표를 하였다. 그 당시에는 ARS 전화로 수험번호를 눌러 확인을 하였는데 합격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D시청에 기차를 타고 방문하여 시청 앞 게시판에 합격자 명단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왔다. (그때는 대학합격자 발표, 공무원 합격자 발표 등을 다 일일이 글씨로 써서 게시판에 붙이던 시대였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기뻐하시던 엄마,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힘들게 우리를 키우셨는데 둘째 딸이 공무원시험에 합격했으니 얼마나 뿌듯하셨을지..
나도 엄마, 아버지에게 기쁨을 드린 거 같아 너무 기뻤다.
늘 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는 것이 나의 인생 목표였다,
당시 엄마는 시골 군청에서 청소미화를 하고 계셨는데 군청 공무원분들이 축하를 많이 해주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만나는 청소 아주머니를 만날 때마다 엄마를 만나는 것 같아 반갑고 애틋하여 항상 깍듯이 인사하곤 했다.
합격자 발표 이후 출근은 언제부터 하는 건지 연락이 10월 중순이 넘어도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집배원 아저씨를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 어서 빨리 출근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출근하라는 통지가 11월 1일 출근 1주일을 앞두고 왔다. 알고 보니 통지를 보낼 때 주소를 다른 지역으로 오기재하여 다른 지역으로 갔다가 오느라 늦은 것이었다.
부랴부랴 엄마와 나는읍내시장에 가서 가서 정장 투피스를 사고 난생처음 구두도 샀다. 출근하기 전에 엄마와 같이 버스를 타고 A구청을 미리 다녀오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복작복작한 A시장 내에 구청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렸던 (우리 큰애보다도 5살이나 어리고 우리 둘째보다 불과 1살 많았던) 만 19살의 나는 당차게도1989년 11월 1일 D시A구청으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