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승일 May 06. 2024

미소

 단한 무어라도 아닌데, 꼭 큰일 전후로 탈이 난다. 작년 2월 몸살을 앓고 지긋지긋한 퇴행기를 처형하자고 써놨건만. 보라고 시키지도 않은 책과 영화에 다급하게 몰두하다 어느 책장 앞에 멈춰 선다. ‘거리를 초조한 마음으로 내딛고 있는 우리 자신의 원형을 찾아보려’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뒤져왔는지.


 백 년 전 벨 에포크 때도 지금도 사람들은 아스라한 몽상에서 깨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지난날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다가올 날들을 기대하는, 주워 담지도 못할 것들을 가득 쥔 채 틈에 껴버린 친구들. 그러다 뜬금없이 정육점 앞에 멈춰 선다.


오른쪽 사진, © 낸 골딘(Nan Goldin)


 연한 기회로 이세돌 에세이를 읽었다. 국어 교사를 할 때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과 대화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친 적이 있다. 그와의 대화는 천재는 없고 노력가만 있다는 결론. 책 이후 있었던 구리 10번기와 알파고 대국 뒤로 가려진 비슷한 사는 모습에 괜한 안도감을 가진다. 다만 판을 엎으라는 다소 생뚱맞은 제목의 날 좀 봐달라는 구호와 함께.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것은 선택과 매진의 결과일 뿐, 진정한 명국은 거기에 있다. 알면서도 주저한다. 하나둘씩 알아간다는 사실이 우리를 조금 급하게 만들지만.



 어제오늘 비가 계속 온다. 집으로 들어가는 문 바로 옆에 정육점이 있는데, 아저씨와 인사 나누기가 어색해 볼 때마다 서로 멀뚱하다. 우산을 정리하느라 길을 막고 있었는데, 머뭇거리는 뒤쪽 낌새를 보니 아저씨가 웃으며 기다리고 있다. 입간판에 유치한 말들도 많이 쓰는 아저씨지만, 순수한 맘과 표현이 좋아서 내심 좋았던 차다. 눈으로만 인사하고 책 반납하러 가는 길. 아무 계획도 없는 연휴지만 괜히 급했던 맘을 잠시 접고, 사람 사는 세상 정까지 속으로 들먹이며 발걸음이 조금 가볍다.


 막걸리 좋아하세요? L의 장난스런 인사에도 J는 웃어준다. 셋이 만났다 일곱이 된 술자리에서 비트코인으로 돈을 벌어 세계를 전전한다는 곱슬머리 스케이트보더를 만났다. 친구와 클럽에서 만났고, 클럽에서 다시 막걸리로. 갑자기 미셸 공드리 영화 같아진 분위기에 다들 멋쩍게 웃다가 누가 시시한 소리를 한다. ‘makgeolli가 인도네시아어로 가기에 좋은 장소래.‘.



 른 삶을 살고 싶으면 친구를 바꿔라, 가족도 만나지 마라. 사람을 만나면 돈이다. 그런 말들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꽤나 심각하다. 힘들 때 웃기만 하면 스마일마스크 증후군이라는데, 증후군도 참 많다.


 카페 옆자리 단체석에서 장난치며 미소 짓는 꼬맹이들을 잠시 지켜본다.

작가의 이전글 빨랫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