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8시, 늦어도 8시 10분까지는 당일 업무계획 보고하세요”
중고신입 입사 직전 일이다. 출근 1주일 전 생긴 예비 신입 단톡방에 담당 선배가 입사 전 지시를 내렸다.
업계에서 굴러본 중고의 감은 말했다. 저것은 9시 출근 전 일이라고. 그래도 소망을 품었다. 잡xx닛 평점을 알고 있고, 극복하려 노력하겠다는 약속에 빗장을 살짝 열어둔 탓이다.
이런 사정, 가정으로 넌지시 건넸다.
“아 그럼 출근이 8시인가요?”
출근하자마자 보고하긴 어렵다. 그래도 10~30분 여유는 내 시간을 들여 양보 내지 양해할 수 있다는 속뜻이다. 더 진솔하게는, 시작 전 자신에 대한 작은 타협이었다.
“출근은 9시입니다. 첫날은 특별히 9시 반에 하세요”
소망은 실망이 됐다.
“옙 감사합니다~“
“옙 감사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소리가 신입방에 울려 퍼졌다.
소망이 간 자리엔 배알이 고개 들었다. 배알은 등장부터 몸을 배배 꼬았다. 뒤틀렸단 말이다.
소망이 있어 본 지 오래됐다. 사라질 때 배알이 나타난다는 걸 잠시 잊었다.
월급 받는 시간에 올린 공지 카톡 하나다. 아직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은 이들에게 이 카톡이 왜 감사한 일인지는 모를 일이다. 카톡 내용은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오히려 화가 날 일이다.
하여 혼자 공지에 답문 하지 않는 소심함을 일단 대담히 드러냈다.
생각했다.
입사 뒤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순결 신입 때처럼 들이받아 볼까, 중고답게 적당히 숙일까, 그도 아니면 중고신입에만 한정된 다른 길이라도 있을까.
우문이었음은 잠시 뒤 밝혀졌다.
담당 선배는 17시에 끝나는 교육 일정을 공지했다. 퇴근이 이른 것으로 보였다.
“옙 확인했습니다”
나의 작은 반란은 카톡 답문 하나로 ‘뻘쭘형’을 받아 교수대에 올랐다.
다만 그 우문은 현문의 꼬리를 낳았다.
들이받음은 오만일까, 숙임은 겸손일까, 혹은 그와 완전히 반대일까.
기준이 필요하다. 중고신입이라는 벼랑 끄트머리에서 길을 밝혀줄 기준이다.
어떤 숙임은 비굴이다. 다른 숙임은 겸손이다. 어떤 들이받음은 자신감, 패기다. 다른 들이받음은 오만함, 객기다.
물음은 애초에 신입, 중고, 중고신입으로 결정되는 형질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중심이 본질이다.
만일 중심이 힘에 있다면 “감사합니다” 사태가 벌어진다. 감사한 일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윗 직급인지, 힘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때 숙임은 ‘비굴’이다.
중심이 힘이 아닌 내게 있을 때 일은 반대로 흐른다. ‘내’가 감사해야 감사하다. 타인에 대한 감사는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채워지는 과정이다. 이때 숙임은 ‘겸손’이다.
힘은 두렵다. 비굴해짐은 두렵다. 채워짐은 즐겁다. 겸손해짐은 즐겁다.
사람은 두려움을 피하려 한다. 비굴한 사람은 힘이 미치지 않는 범위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힘이 막으려 했던 것을 한다. 원래 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그저 복수일 수도 있다. 어찌 됐던 힘이 막으려 했던 일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막을 순 없다. 힘에게나 비굴에게나 앞날에 도움 되지 않는다. (업무시간 인터넷 쇼핑 등이 해당된다.)
즐거움은 찾으려 한다. 겸손한 사람은 채워줄 대상을 찾아다닌다. 의무로 규정된 때와 장소, 대상을 가리지도 않는다. 출근 전 지하철일 수도, 점심시간 운동장일수도, 퇴근 후 스터디일 수도 있다. 막을 수도, 막을 이유도 없다. 이런 즐거움을 열정이라고 한다. 모이면 앞날을 비춘다.
비굴함은 무능과 태만으로, 겸손함은 유능과 열망으로 귀결된다. 본질적으로 비굴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겸손할 수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아래 직원에게 정치와 사회정의를 논하던 은퇴 직전 상무가 회장 행차에 직각으로 허리를 꺾자 드러난 민머리 정수리를 잊을 수 없다. 그 반짝임엔 비굴함이 묻었다. 직위에 맞지 않는 능력과 태도가 돋보이던 사람이었다.
윗사람과 버럭버럭 다투면서도 인내와 포용으로 후배를 인격체로 인정하는 선배도 있었다. 그 묵묵함엔 겸손함이 스민다.
어떤 때는 헷갈리기도 한다. 윗사람에게도, 아랫사람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비굴했을까 겸손했을까.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는 건 거의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직급이 아닌 사람이 두려웠을 수 있다. 사람의 시선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그런 두려움은 감히 비굴함으로 적는 것조차 두렵다. 애처로울 뿐이다.
‘들이받음’도 기준은 ‘숙임’과 쌍둥이다. 부족함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패기는 무엇이 부족한지 알고, 위험을 감수하며 채워짐에 도전한다. 도전에서 실패는 성공을 위한 자양분이다. 도전하는 사람 얼굴은 수확철 가을 햇살 아래 농부처럼 밝다.
객기는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이 위험한지 모르고 일단 던진다. 도박이다. 도박에서 실패는 성공과 이혼 재판 중인 부부다. 재결합할 수 있지만 십중팔구는 깨진다. 이미 실패한 패는 판돈 깎고 성공률을 떨어뜨린다는 게 그나마 관계성이다. 도박하는 사람 얼굴은 메마른 논바닥을 기는 탈수 환자처럼 어둡다.
부족함에 대해 생각한다.
부족함은 물질일 수도, 시간일 수도, 감정일 수도 있다. 나아가 총량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진정한 신은 피조물을 사랑할지언정, 피조물에게 감사하지 않는다. 무엇도 신외로 비롯된 게 없고, 무엇도 신의 존재함에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피조물에겐 감사할 게 넘쳐난다. 그 무엇도 나만으로 조물한 게 없다. 하물며 감정마저도 유전자로부터, 관계로부터 받고 배운다.
조물주와 피조물 간 관계가 이러하다면, 실로 아이러니다. 감사할 게 없는 조물주로부터 사랑받지만, 감사할 게 많아도 감사하지 못해 사랑 주고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이 많다.
나는 어떨까. 하루를 감사함으로 채워갈 수 있을까. 의문을 현실로 답하기 위해 나는 나와 시간을 보내주고, 나의 시험을 걱정해 주고 내게 필요한 것을 고민해 주는 나의 소울/서울 메이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그가 아니었다면 무너진 하루를 어떻게 살아냈을까. 고통스러웠음이 자명하다.
“감사합니다”라는 우리의 순결신입들은 어떨까. 그들이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았고, 앞으로 수많은 두려움, 비굴함의 역경을 겪을 것이라는 예측은 내 오만이고 객기일까. 그들이 그를 현명하게 딛길 바라며 몇몇은 진실로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 믿음도 오만이고 객기일까. 혹은 오만과 객기를 구분 지어 자락에 깐 순간부터 오만과 객기가 시작되진 않았을까.
이 밤은 꼬꼬무다. 우문이 낳은 현문의 꼬리에 다시 우문의 꼬리가 물린다. 입사 뒤 9시 출근 전 8시 출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