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석사까지 마친 남편이 그렇단다.
멘붕이었다. 오늘은 통계학 기말고사 날이었다. 듣고 있는 수업 중에 통계학이 제일 어려웠다.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고 모의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시험날 아침도 생각보다 마음이 여유로워 오~ 나 마인트 컨트롤 잘하는데? 이제 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했다.
그런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이번학기에 수학 수업 두 개에 매주 에세이를 하나씩 써내야 하는 수업도 하나 듣고 있다. 이번주도 마찬가지로 에세이를 하나 써서 제출해야 했다. 특히 기말고사 에세이라 배점도 가장 높았다. 근데 내 마음에는 통계학 수업이 가장 신경 쓰였고 그래서 일단 수요일에 있는 통계학 시험에 집중하고 시험이 끝나면 에세이를 제출하겠다 마음을 먹었다. 근데 이게 뭐지? 에세이 제출 기한이 이미 지나있었다. 그리고 그걸 통계학 시험 보기 두 시간 전에 깨달았다.
운전해서 학교 가는 길에 자꾸 멍~ 해졌다. 분명 내가 모든 것들을 다 잘 챙기고 있고 놓치고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어이없게 에세이 제출 기한을 놓쳐버린 것이다. 아니 나는 왜 에세이 제출기한이 일요일까지인데 그 일요일이 지나고 수요일에 있는 통계학 시험을 보고 에세이를 제출할 거라는 요상한 마음을 먹은 걸까? 이제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선생님은 늦게 내는 학생의 에세이를 받지 않겠다고 공지에 분명히 적어놓으셨다.
일단 시험에 집중해야 했다. 원래는 시험 시작 1시간 전에 도착해 공부하고 시험을 볼 참이었으나 멘붕이 와서 허둥지둥하다 보니 시험시작 20분 전에서야 학교에 도착했다. 어찌어찌 정신을 다 잡고 문제를 풀고 제출하기 전 마지막으로 다시 검토를 하는데 실수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이 소수점 둘째짜리 까지 써내라고 하셨는데 한 자리까지만 쓴 것이다. 수학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게 나는 문제를 풀 줄 몰라서가 아니라 문제를 제대로 안 읽어서 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정말 왜 이럴까. 왜 맨날 이렇게 덜렁댈까. 자책하며 답을 수정하고 제출했다.
하루종일 풀이 죽어있었다.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에세이 수업은 그렇게 어렵지 않던 수업이라 분명 많은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해왔기에 마지막 에세이를 내지 않은 내 점수는 90점이었다. 근데 아무리 내 점수가 90점이라도 내 앞에 91점 이상 맞은 사람이 많으면 D 받는 거 아냐? 장학금 받으려면 B는 맞아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나온 내게는 대부분의 수업이 상대평가였으니 말이다.
시무룩해 있는 사이 남편이 집에 왔다. 남편은 미국에서 나고 자라 대학원까지 다녔다. 내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다가 지금 에세이를 제출 못한 수업의 점수가 90점인데....라고 하니 놀란 얼굴로 돼 묻는다.
날짜를 착각해서 풀이 죽은 건 이해하는데 90점이면 뭐가 걱정이야? 충분히 B 받고도 남겠는데?
아니, 이 수업이 그렇게 어려운 수업이 아니었다니까? 에세이만 내면 되는 수업이었다고. 그러니까 90점 이상 받을 애들이 수두룩 할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가 90점이면 90점이지. 90점 정도면 A도 나와.
이 수업 상대평가일 거 아냐?
상대평가가 뭔데?
여기서 잠깐 멈칫했다. 엥? 상대평가를 모른다고?
한 반 모든 학생들의 수를 100프로로 보고 그중에 상위권 점수 몇 프로만 A, 그다음 몇 프로는 B 이렇게 점수가 나눠지는 거잖아?
난 그런 채점 방식 처음 듣는데? 걱정하지 마. 미국에는 그런 거 없으니까. 그냥 네가 잘하면 잘한 거야.
정말? 미국에는 상대평가가 없다고?
응,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정말? 휴~~ 다행이다. 난 당연히 상대평가일 줄 알았어.
한국 학생들이 왜 그렇게 경쟁이 심하고 같은 반 친구들을 적으로 보는지 알겠다. 너무 끔찍한 시스템이야. 그냥 내가 잘하면 잘하는 거지 꼭 그렇게 까지 평가해야 해?
참고로 남편은 한국에서 영어학원 강사로 3년 동안 일한 경력이 있다.
그리고 방금, 선생님이 학교 홈페이지에 내 시험 점수를 업데이트하셨다. 100점이다.
휴, 이번학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다음 학기 시작은 2주 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