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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걍 Mar 20. 2021

문장에 질감을 칠할 수 있을 때까지




드로잉 하는 손 / Ultrafine400, CanonEF, 50mm.


 오랜만에 박준을 읽었다. 읽기를 오래 미뤄둔 산문집이었는데, 산문집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그의 시에 나왔던 언어들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성싶었다. 박준의 글에서는 박준의 질감이 느껴졌고, 그것이 문장 쓰는 이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그가 부러웠다.


 보편적인 언어가 나를 통해 개별적인 언어로 거듭나려면 고유한 특징이 있어야 했다. 그 특징은 문장 속에서 때로는 양감처럼, 때로는 질감처럼, 때로는 건조하거나 축축한 것처럼 느껴지곤 하는 어떤 것이었는데, 그런 것 하나 없이 모두에게 무색무취인 글보다는 취향을 타더라도 특정한 향기가 있는 글이 더욱 매력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어서, 고유의 것이 있는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문장에 질감을 칠할 수 있는지 고민하곤 했다.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질감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 속에서 또 나만의 언어를 따로 형성해야 했다. 이른바 조탁한다고 말하는 언어의 선별화를 위해서는 창의력뿐만이 아니라 노력과 끈기, 일정량 이상의 시간 따위를 쏟아부어야 했는데, 쉽게 말해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게 답이었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건 지난한 고통을 견딘다는 뜻이었고, 향유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편하고 행복한 일인지 알면서도 왜 굳이 글이란 걸 써서 고통받는지 나는 가끔씩 의문스러웠다. (글쓰기에 엮인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쯤 떠올려보는 의문이리라.)


 세상에 글쓰기만큼 비효율적인 일이 없을 텐데도 사람들은 글쓰기에 빠져들었다. 효율을 따지자면 애초에 글을 쓰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효율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그리고자 아득바득 써 내려간 글들을 읽다 보면 위안이 됐다. 그러니 세상에는 그런 비효율적인 바보들이 한둘쯤 필요했다. 쓰는 즐거움보다 읽는 즐거움을 훨씬 크게 느끼곤 했으면서도 내가 직접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나도 그런 바보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겠지.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게 천성인지 후천적인 집착인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저 멋진 문장을 읽고 나면 쓰는 사람들이 대단하고 부러워서, 감탄 속에 섞인 시샘이 나를 고민하고 계속 쓰게 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조금씩 계속 쓰고자 한다. 내 깜냥에는 그저 놓지 않고 쓰는 것만도 대단하단 걸 안다. 나한테 글은 취미이고, 엄청나게 대단한 글을 남기겠다는 욕심이 없더라도 잘하고 싶은 사람 욕심이야 어쩔 수 없지만,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기로 마음먹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쓰다 보면 그래도 한 십 년 뒤쯤에는 내 글에서도 질감이 느껴지지 않겠어? 어차피 나는 타인이 바라보는 나를 평생 알지 못할 테니까 내 글이 어떻게 읽히는지도 평생 알지 못할 테고, 그러니 나만의 글 같은 게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평생 알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니까 그냥 속 편히 살련다. 나만의 언어는 나만이 쓸 수 있는 거라고 스스로 믿으며 살아가면 정신건강에는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이렇게 알량한 글쓰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글쓰기계의 개미투자자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자가 실험을 시작해 보기로 할까. 사실 시작한 지는 좀 되었지만, 명확한 시작 시점을 짚을 수 없으니 대충 오늘을 1일 차로 삼아 보기로 하자. 이 형편없고 들쑥날쑥한 애정이 최대한 긴 세월 지속되길 바라며, 언젠가 더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아지는 순간이 올 때까지 내 삶의 한 귀퉁이를 글에게 내어주기로 한다.



─202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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