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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Apr 18. 2024

채식을 하면 정말 인생이 재미 없어지나요

새로운 선택이 주는 즐거움.

채식한다고 이야기하면 으레 듣는 이야기 중 하나. "그럼 인생이 너무 재미 없어지지 않나요?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이런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건 나 역시 채식을 시작하기 전 그런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채식을 선언하는 일은 곧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범위가 확 줄어든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그 범위가 줄어들수록 자유는 좁아지고 이제껏 즐겨왔던 메뉴들에는 눈물의 작별을 고해야 하는 슬픔을 의미한다. 연탄불에서 지글지글 구워 겉면이 황금색으로 타오른 돼지갈비, 한입 먹으면 여름이 입속에서 펼쳐지는 듯한 물회, 콰작하고 베어 물면 육즙이 입술을 타고 흐르는 치킨 등.. 이 모든 매력적인 음식들과 헤어지고! 오고 가며 인사는 했지만 친하지 않았던 채식과 손을 잡으라니! 환승연애도 이렇게는 안 해요.


아무래도 음식에 진심인 먹짱의 민족으로 식사 메뉴가 줄어든다는 건 꽤 크리티컬한 부분이겠지만 실제 그러한가를 살펴보면 또 아니다. 마치 내가 이제까지 뛰어놀던 운동장에서 다른 운동장으로 이동하며 "별로일 것 같아!"라고 했지만 의외로 넓고 쾌적해서 "뭐야, 이런 곳이 다 있었어?" 하는 느낌이다. 그 안에 마련된 운동 기구도 익숙하지 않지만 몇 번 깔짝거려 보니 어느새 사용법에 도가 트고, 이전의 운동장이 생각은 나도 그리워지진 않는 느낌이랄까. 사는 동안 나도 모르게 선택'해야 한다고 믿었던' 옵션을 버리고 주체적으로 다른 옵션을 선택해 보니 알 수 있는 재미다. 한편으론 세상에 대해 다 아는 듯하고, 그래서 삶이 지겹다고 생각했던 매너리즘을 단번에 타파해 주는 기분 좋은 번거로움이기도 하다.


내가 새롭게 눈 뜬 부분은 식재료의 다양성이다. 집안 요리를 담당하는 엄마가 육고기를 선호하지 않는 덕분에 남들보다 더 많은 채소를 접해봤다고 자신할 수 있는데, 매년 이맘때쯤 먹을 수 있는 봄나물류도 그중 하나다. 두릅, 엄나무 순, 참나물, 방풍나물 등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간단히 소금, 참기름 등으로 간을 한 봄나물은 그 자체로 향취가 근사하다. 날이 서서히 더워지면 나오는 콩국도 무시할 수 없지. 꾸덕한 콩국에 메밀국수를 삶아 올리고, 그 위에 식감을 더할 수 있는 우뭇가사리나 오이, 토마토 등을 잘라 넣으면 그 자체로 여름이다. 요즘엔 서리태 콩물도 흔해져서 특식 개념으로 사 먹곤 하는데 감칠맛이 으뜸이다. 최근 외식 때는 콜리플라워를 구워 그 위에 칠리오일을 뿌린 따뜻한 샐러드를 먹었는데, 맛이 괜찮아서 집에서 따라 하려고 시도 중이다. 물론 똑같이는 안 되지만요...


콩국수의 계절이 온다!


디저트 역시 찾아보면 다른 선택지들이 있다. 이전 글에서 워낙 빵, 과자를 입에 달고 살다 보니 디저트로 할만한 게 견과류밖에 없어 슬프다고 적었는데, 글쎄. 이전 방식을 유지한다면 아무래도 고달플 수밖에 없다. 인기 있는 베이커리 중에 비건 빵을 판매하는 곳은 매우 적고, 있다고 해도 우리 집과 꽤 먼 거리라 먹고 싶을 때마다 사 먹을 수도 없으니. 과자도 비건 과자라고 불리는 사또밥만 주야장천 먹을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요즘 활용하고 있는 게 오트밀이다. 오트밀과 으깬 바나나를 섞고, 시나몬 가루를 뿌려준 후 에어프라이기에 구우면 달콤한 쿠키가 된다. 으깬 바나나 때문에 다소 물렁한 식감이 쿠키에 대한 기대감을 조금 무너뜨리긴 한다만 화장실은 정말 잘 간답니다? 또 다른 간식은 과일. 천연 당이기 때문에 당수치를 생각한다면 적게 먹어야 하지만(더군다나 요즘 과일들은 하나 같이 똑같은 단맛이라 설탕을 주입한 게 아닌지 의심이 간다) 그래서 간식량을 더 줄이는 효과도 있다. 매번 비슷하게 먹던 과일들이 질려 최근엔 카라향을 주문해 먹어보았는데, 상큼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단맛이었다. 


약속이 생겼을 때 음식점을 찾는 일도 새로운 즐거움이다. 사회생활을 이어오다 보니 외식 메뉴도 죄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고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메뉴도 없고.. 매번 비슷한 음식들만 고르는 게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비건 음식점을 찾아야 한다면? 새로운 퀘스트가 생긴다. 서울, 경기 등 수도권에 있는 비건 맛집은 일반 맛집 대비 수가 현저히 적기 때문에 자체로 새로운 시도가 된다. 만나는 지인이 특별히 먹고 싶은 메뉴가 있는 게 아니거나 새로운 시도를 환영하는 성향이라면 한 번쯤 슬쩍 던져봐도 좋을 만한 일상 속 도전이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내 인생은 채식을 시도함으로써 더 재밌어졌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사는 일반인으로 도파민이 빵빵 터질만한 재미야 바라진 않아도 그저 어제보다 조금 다른 오늘을 기대하는 사람으로서 채식은 그 변화의 물꼬를 터준 신선하고 재밌는 요인이었다. 분명 본인이 익숙한 방식을 즐김으로써 나오는 삶의 재미도 있겠지만 그런 일상이 다소 지루하고 뻔하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에게 채식은 어쩌면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줄 새로운 운동장일지도 모른다. 이미 새로운 운동장에 발을 뻗은 사람으로서, 초대장을 건네본다. 여기 꽤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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