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그리고 반쪽 짜리 어른
비엔나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새벽부터 조용히 내린 눈은 온 도시를 하얗게 덮어, 새로운 세상을 펼쳐 놓은 것처럼 다른 색깔의 비엔나를 보여줍니다. 낯설기도, 아름답기도 한 아침입니다.
올해의 첫눈은 언제라고 할까요. 올 초 겨울의 한가운데, 새해를 맞이할 즈음인 1월에 내렸던 눈일까요? 더운 여름을 살아내고 가을을 지나, 다시 찾아온 겨울의 시작에 내린 연말의 눈일까요? 사람마다 첫눈의 정의는 다르지만 아무렴 어떤가요. 처음은 늘 설레기 마련이니, 내리는 눈을 보고 오랜만에 마음이 다시금 반갑고 설렜다면 무엇이든 첫눈이지 않을까요.
어렸을 적엔,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굳게 믿곤 했습니다. 여름에 외할머니댁 텃밭에서 봉숭아를 따고, 곱게 빻아서 손에 칭칭 감고, 손톱에 빨갛게 물든 봉숭아물이 최대한 천천히 없어지도록 네 달 남짓을 버티며 첫눈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해 봉숭아물과 첫눈이 이뤄주는 사랑이 진실로 나타나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그때만큼 손꼽아 첫눈을 기다렸던 때는 앞으로도 없을 것 같습니다.
비엔나에 첫눈이 왔다는 소식에, 눈을 뜨자마자 좋아하는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누구보다 예쁜 곳에서 비엔나의 눈을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혼자 보기는 아까운 풍경이라 가족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었습니다. 서울은 아직 눈이 오기엔 이르다고 했습니다. 쌓인 눈을 보러 공원에 나온 제 모습을 보시곤 엄마가 "강아지처럼 뛰어나갔어?"라고 했습니다.
그러게요. 눈이 가득 내렸다는 이유만으로 옷을 후다닥 챙겨 입고 망설임 없이 밖에 나온 건 정말 오랜만입니다. 차가운 것도 잊고 맨손으로 눈을 뭉치고 굴려,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 제멋대로 눈코입도 붙여주었습니다. 비엔나의 눈은 어쩐지 서울의 눈보다 차갑게 느껴졌는데, 사실은 이렇듯 천진난만하게 눈사람을 만들어본지도 참 오래되어 눈이 가진 온도를 잊어버려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내리는 눈을 보고 마냥 기뻐하면 아이, 출근길 걱정을 하면 어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기에 아직 나는 한참 먼 것 같은데, 서울에서의 나는 눈이 내리면 예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질척이는 도로부터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눈이 쌓이면 조금씩 걱정도 쌓이기 시작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 언제부터였을까요. 더 이상 봉숭아물을 들이지 않고, 매번 서울의 첫눈이 마냥 반갑지 않았던 것을 보면 나는 이미 서툴고 이상한 반쪽 짜리 어른 정도는 되어버린 듯합니다.
첫눈이 내리고 있으니 작은 고백을 해볼까 합니다. 조금은 도망치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다들 그렇듯 나도 치열하게 살아와서, 미래가 불안해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어른이 되어야 할 것 같지만 막상 어른이 되기는 싫은, 반쪽 짜리 어른은 그럴 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웃기게도 꼭 도망쳐야 한다면 아주 조금은 용감하게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겁 없이 내가 모르는 세계의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으면 뭔가 조금은 달라질 거라 믿었습니다. 왠지 이곳에 오면 꼭 우연처럼, 운명처럼 꿈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꿈을 찾는다고 하니 어쩐지 어른이랑은 한 발짝 더 멀어진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언젠가 <나빌레라>라는 공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60세 할아버지가 발레의 꿈을 늦게나마 이루기 위해, 나이의 한계와 주변의 시선을 극복하며 천천히 변화를 만들어 가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공연이 끝나고 어른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때의 저는, '어른이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황된 꿈을 좇아가는 철없는 사람이 아닌, 멋지게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라고요. 하지만 이 공연의 주인공 할아버지처럼 꿈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빛나는 이야기를 마주할 때면, 영원히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 역시 종종 하게 됩니다.
나는 비엔나의 첫눈을 뭉쳐 아무 걱정 없이 천진난만하게 눈사람을 만들면서,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반쪽 짜리 어른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정말 어른이 되더라도 서울 어딘가에 나를 닮은 눈사람 하나 정도는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도망쳐온 이곳에서, 내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갈지 그것까진 모르겠지만요. 최소한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그런 마음을 가진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내리는 첫눈 아래서 생각했습니다.
벨베데레 궁전에 첫눈이 소복이 쌓였습니다. 첫눈이 온 길에 길게 나여진 발자국들을 보며 스물네 해 동안 내가 걸어온 자취들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눈밭 위로 첫 발걸음을 내딛듯 설레고 조심스럽게,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자취들도요.
첫눈을 보면서 하기에는 다소 복잡한 생각들일지도 모르겠어요. 오늘은 이만, '예쁘다' 정도에서 생각을 멈추기로 합니다. 긴 생각 하지 않고 가만히 비엔나의 첫눈을 바라보는 일은 충분히 행복할 거예요. 집에 들어가는 길에 잊지 말고 핫초코를 사가야겠어요.